소설리스트

죽은 협객의 사회-19화 (19/120)

< 19 : 18. 먼지(Dust)(1) >

"그럼 각자 과제는 그렇게 알도록 하고. 이제 삼재종합공이라는 무학의 구성 원리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삐─.

나는 태블릿과 프로젝터를 연결했다.

화면에는 삼재종합공 초판이 떠올랐다.

"삼재종합공 초판이 발행된 지는 70년이 지났다. 그런데 벌써 64판이 나왔지. 세상에 가장 늦게 나온 상승 무공이면서도 끊임없이 변화를 꾀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매년 개정판이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삼재검신이 살아있을 적에는 본인이 직접, 삼재검신 사후에도 검신의 제자들을 위시하여 삼재 재단에서 삼재종합공을 계속 관리하고 있다."

나는 태블릿을 조작했다.

"거두절미하고 딱 이 부분만 보겠다."

미리 편집해둔 표가 올라왔다.

[삼재종합공 1판, 63판, 64판의 비교 분석]

개강 전부터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하려니 아주 귀찮았는데, 다행히도 며칠 전 소걸이라는 걸출한 조교를 영입했다.

실제로 자료를 만드는 건 소걸이 다 했다. 나는 앉아서 쉬다가 검토만 했다. 이게 교수의 삶과 조교의 삶의 차이다.

도하나는? 걘 컴맹이다. 도하나는 칼질 말고는 이것저것 골고루 못하는 편이기 때문에 뭘 시키기가 쉽지가 않다.

[삼재보법 풍운유신(風雲流身)]

자료화면에는 특정한 보법의 자세를 서술한 삼재종합공의 한 부분, 그리고 판본에 따른 수록 여부가 표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초식이 70년 전 초판에 있었던 것이 63판에 없었다가 최신판에 다시 생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5판에서 63판까지 없었지. 왜? 있다가 없다 다시 생겼을까"

다음 화면.

[쾌선문 풍신보]

"그 이유는 바로 이 무공 때문이다.  쾌선문의 풍신보. 여러분 중에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들어본 사람?"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하긴 근래에 유명해진 무공이었다.

나는 그 중 한 명을 지목했다.

맨날 휴대폰만 보고 있는 더벅머리 남학생이었다. 그동안 보아온 결과, 학생 중에서는 아는 게 가장 많은 듯했다.

"박위목?"

"1940년대 전후 서계대전에서 등장한 신비문파 쾌선문의 초고속 경공 및 보법입니다. 극한의 속도가 특징이라고 합니다. 서계대전 말 문주를 필두로 문도 전원이 사망하면서 실전된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2017년 비급이 암시장에 다시금 풀리며 유명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잘 아는군. 더불어 이후 비급이 유출되고 알음알음 보급되었지. 초판의 삼재보 풍운유신은 전쟁 당시 쾌선문 풍신보에 대응하기 위한 초식이었다. 삼재공에는 초고속 직선 질주 보법에 대응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지."

나는 목을 축였다.

"하지만 익히는 난이도에 비해 쓸 곳이 적었기 때문에 풍신보 사장 후에는 풍운유신도 사장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풍신보가 보급되면서 다시 추가된 것이지."

삼재종합공은 외부 무공 환경에도 끝없이 대응한다.

그게 유서깊은 초상승 무공들 사이에서 살아남고 오히려 그들을 상대로 우위를 가지기 위한 삼재종합공의 생존 전략이었다.

종합공이라는 것 자체가 대응의 무공이다.

유리한 점은 계속 강화하고 불리한 것은 새로운 수단을 추가해서라도 극복한다.

"그럼 우린 여기서 뭘 배울 수 있을까?"

끊임없이 변하는 종합공의 특질.

나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진지하게 고민하길래 나는 잠깐 시간을 주었다.

"유행 따라 수법을 유연하게 전환하라는 건가요?"

"상황에 맞춰 대응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원지혜와 정이삭이 차례로 손을 들고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정확히 말하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최우선 순위는 아니었다.

그건 무인으로 살아가는 이상 당연한 거였고, 삼재종합공에서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다시 태블릿을 조작하여 새로운 창을 띄웠다.

[근본 삼재종합공]

"근본……?"

"1판에서 64판까지 지나면서 변하지 않은 부분. 삼재종합공의 근본. 이것만 익히면 나머지 부분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취하고 버릴 수 있다는 거다. 유행과 상황에 대응하는 것은 그 이후다."

이것은 내가 예전에 만들어놓은 자료를 기반으로 소걸이 새로 정리한 것이다. 나도 이번 기회에 새로 한 번 다듬을 계획이었다.

원지혜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근본이…… 어느 정도나 될까요, 교수님?"

"얼마 안 된다. 절반 정도. 그마저도 나눠서 할 테니 금방이겠지."

학생들의 시선이 절로 눈앞에 있는 책을 향했다. 절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듯했다.

절반이라고 해봤자 물론 꽤 많다. 실제로 금방일 리는 없었다.

내 얘기는 아니다. 나는 그냥 한 번 바뀐 부분만 되새기는 수준이면 되니까.

"딱 절반만 제대로 익히면 된다. 별거 없지?"

학생들은 대답이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아침부터 조교들과 비무대련을 하겠다. 각자 맡은 부분 위주로 연습할 수 있게 준비해오도록."

***

"수련아, 괜찮겠어? 5개 너무 많은 거 아냐?"

"응. 나 괜찮아. 해볼게."

김지원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당수련이 당차게 답했다. 많은 숙제에 부담을 가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기운이 난 듯했다.

도하나와 김산의 지지자라는 공통점 덕분인지 빠르게 친해진 사이였다.

"하아, 분량 봐. 너무 많다. 진짜."

"도와줄까?"

"야, 넌 나보다 더 많잖아. 니가 뭐 나 돌봐주는 사람이야? 뭘 자꾸 도와준대?"

"그게 아니라……."

"너나 너무 많으면 나한테 도와달라고 해. 제발 도와달라고 하면 좀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

"음? 난 괜찮은데."

"……하. 그럼 알아서 하든가."

그 옆자리에선 이신과 원지혜가 투닥거리고 있었다.

"얘들아~ 이거 봐봐~"

수업 마치고 어수선한 분위기.

휴대폰을 보던 최수아가 문득 다른 학생들을 불렀다. 긴 애쉬브라운 머리에 화려한 치장을 한 소녀였다.

"뭔데?"

[고무림 사천무공대학 갤러리]

"이게 뭐야? 갤러리?"

"아, 고무림에 있는 우리 학교 커뮤니티인데 봐봐~"

<어제저녁에 집 가다가 맹수한테 습격당한 썰.txt>

<아니, 학교가 산도 끼고 있고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렇지. 맹수가 살고 있으면 어떡하냐.

나도 그래도 최근에 일류 찍은 졸업반인데 이 맹수는 최소 절정인 영물로 보인다.

툭 밀고 지나가는데 뒷모습만 겨우 봤다. 졸라 하얗고 크더라. 북극곰 같았다.

야식으로 먹고 있던 토스트도 뺏겼다. 진짜 억울해 죽을 거 같다. 맹수가 공격할 수는 있는데 토스트는 아니지, 진짜…….

진료 기록 증거로 제출한다. 교내 의원이 최소 전치 2주란다.

교내에 북극곰 기르는 삼류 대학 사잡대 out>

ㄴ<무슨 사천에 북극곰이야 ㅋㅋㅋㅋㅋ 무과 아니고 문과니?>

ㄴ<북극곰 ㅋㅋㅋㅋ 내가 보기에도 스카이 첩자가 확실하다. 사천공대 떨어지고 스카이 간 스첩인 듯.>

ㄴ<아니, 나 작성잔데 진짜라고. 개 답답하네.>

ㄴ<진짜라도 들개겠지. 무슨 북극곰이야. 작성자 최대 이류 예상한다.>

"……북극곰?"

원지혜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아니, 아무리 사천시 구석에 있는 학교라 그래도 곰은 없겠지."

"그래도 봐봐, 이거 밑에 작성자 계속 댓글 다는데 보니까 일류는 맞나 봐. 만약 진짜면 좀 위험하지 않을까?"

"하긴. 가능성은 적지만 동네 뒷산에 사는 영물일수도 있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네."

학생들은 각자 절정 수준에 달하는 북극곰이 본인을 습격하는 상황을 상상해봤다.

"……신아~ 오늘 집에 갈 때 같이 갈래?"

학생들은 이신한테 달라붙었다.

김지원과 당수련만 구석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교수님한테 데려달라고 하면 데려다 줄까?"

"난 조교 언니."

***

김지원과 당수련은 호다닥 교수 연구실로 갔지만 그곳은 이미 비어 있었다.

거의 오후 6시에 가까운 시각.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둘도 다른 학생들과 함께 하교하기로 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그리고 정문 근처.

"……교수님, 거기서 뭐 하세요?"

"……뭐, 왜."

김산은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정문 앞 초소 앞에 앉아있었다. 껄렁하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턱을 괴고 있었다.

수위 마크가 달린 모자를 쓴 채였다. 옆에 있는 도하나와 소걸도 마찬가지였다.

[사천무공대학 수위 김산]

[사천무공대학 수위 도하나]

[사천무공대학 수위 소걸]

"……수위?"

무슨 초절정, 화경 고수가 수위를 선다는 말인가.

……아닌가? 절정 맹수가 실제로 있으면 적당한 건가?

"얼른 집에나 가라. 병아리들이 늦게까지 다니는 거 아니다. 소걸, 바래다주고 오도록. 가는 김에 순찰도 한 바퀴 돌고 오고."

"그러지."

앉아있기가 지루한 것은 소걸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김산은 어느새 비어버린 커피를 털고 있었다.

"하, 이거 도하나보고 타오라고 할 수도 없고. 아, 소걸, 올 때 커피 좀 사오도록."

"김 형. 잠시 잊은 것 같은데. 지금은 교수와 조교수의 관계가 아니오."

"……커피 좀 사와 줄 수 있겠나? 내 부탁하지."

"싫소만."

소걸은 히죽 웃으며 답했다.

김산은 인상을 구겼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잠깐을 즐겨라, 조교(진)아. 북극곰인지 맹수인지 잡으면 어차피 넌 다시 조교다.

"제가 사올게요!"

김지원이 손을 번쩍 들고 끼어들었다.

"넌 집에 가야지. 뭔 커피를 사 들고 다시 와. 그냥 안 마시련다."

"전 괜찮은데……."

"집에나 가라."

김산은 초소에 달린 정수기에서 냉수를 한껏 받아 벌컥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저런 데서는 또 어른의 면모가 있군.'

그래, 아무리 조교를 괴롭혔어도 협객행을 한 개방의 은인인데 커피 사주는 것 정도 해줄 수 있지. 소걸은 생각했다.

"그냥 올 때 커피 사오겠소. 아아 사오면 되오?"

"본인은 콜드브루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도사는 화기를 멀리해야 하는지라."

"……익힌 고기는 잘만 먹잖소."

"……그래도 레어를 선호하는 편이다."

소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지그시 바라보자 김산은 고개를 들고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봄인데 벌써 모기가 있나……."

'저걸 은인이라고.'

소걸은 개방을 대표해 김산을 은인으로 모시기로 선언했던 당시의 본인을 때려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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