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은 협객의 사회-17화 (17/120)

< 17 : 16. 서열전(Ranking)(3) >

원지혜는 당수련을 물끄러미 살폈다.

오른 손에는 당가검. 경지는 딱 일류랬다. 입고 있는 옷들은 평범한 중저가 브랜드였다.

그나마 흰 피부와 생머리, 좀 이쁘장한 외모 정도가 좀 튈까. 그 외엔 눈에 띄는 부분이 없었다.

'이상한 애1.'

당수련에 대한 감상은 그 정도였다. 참고로 2번은 오늘부터 김지원이었다.

암왕의 손녀.

사천당가 종중의 직계가 아니라지만, 암왕 당기백이 몇 십 년째 사천당가를 지배하고 있는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가의 직계라는 말이 아무런 힘을 가지 못하는 시대.

암왕의 손녀야말로 현 사천당가의 실질적이고 진정한 적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는 물이 달랐다.

원주원가도 물론 명문이다.

이신이 속해있는 덕수이가에, 안동김가, 전주이가를 포함한 대한민국 삼대세가에 못 미칠 뿐. 원주원가 역시 국내에서 이름 높은 명가였다.

달리 말하면 국내에서나 명문으로 통하는 가문들이라는 것이다.

사천당가를 굳이 대한민국 삼대세가로 꼽히지 않는 건, 당가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나머지 세가들과 비교 자체를 불허할 정도로 세력이 거대한 초국적(超國的) 세가이기 때문이다.

그 당가의 중심이 당기백이다.

팔현경(八玄境) 중 암왕(The Pluto). 대한제일수. 천하제일독. 당가주.

그런 당가주의 손녀인데.

'너무 평범해.'

보아온 바, 성격도 모난 곳이 없다. 가끔 저 수상쩍은 단발 조교에게 열성을 보이는 것만 빼면 완전 순둥이였다.

그렇다고 또 정상은 아니었다.

당문의 일원이라 한들 꼭 사천공대를 진학할 필요는 없을 것인데, 제 경쟁자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천공대에 진학하고.

암기가 아니라 굳이 검을 쓴다.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다.

원지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잡념을 털어냈다.

'이긴다.'

아무리 암왕의 손녀라 한들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는 승부를 억지로 져줄 생각은 없었다.

초절정이 화경을 이기기가 요원하듯, 일류가 절정을 이기는 것도 힘들다.

검강의 유무가 초절정과 화경을 가르듯, 일류와 절정 사이에는 검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검기는 뛰어난 병기로 극복할 수 있는 정도의 위력이다.

그러나 당수련이 들고 있는 것은 평범한 당가검.

원지혜가 발하는 창기를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바로 끝낸다. 그리고.'

원지혜는 정이삭을 슬쩍 바라보았다.

오늘 바로 2순위까지 도전할 것이다.

원지혜의 목표는 늘 이신이었다.

가문의 다른 어른도, TV에 나오는 유명한 고수도 아니었다.

이신이 초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잠깐 절망했지만, 목표가 바뀌지는 않았다.

어차피 원지혜가 이신을 앞선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으니까.

그냥 처음 만났을 때. 그때만큼 격차가 벌어진 것뿐이다.

"시작."

단발머리 조교의 신호를 들은 동시에 원지혜는 곧장 창기를 피워올리며 당수련에게 달려들었다.

칭칭챙─!

당수련을 나름 결심한 표정으로 원지혜에게 맞섰으나 세 번째로 병기를 마주했을 때 검을 놓치고 말았다.

원지혜는 당연하다는 듯 당당한 표정으로 비무대를 벗어났고, 당수련은 침울한 표정으로 축 처져 내려갔다.

***

"도 소저. 어떻소?"

"검수가 아니네요."

"음. 역시?"

소걸 역시 동의했다.

"손끝에 굳은살이 두드러지죠? 특히 엄지, 검지, 중지 쪽. 반면 손바닥은 매끈하고 부드럽고요."

"그럼 암기?"

"전 그런 것 같은데요?"

"동의하오. 검은 초보를 간신히 벗어난 수준이군."

"그나마 수비 쪽은 좀 나은데 공격은 영 꽝이었어요."

"음. 의견이 같군. 그럼?"

"그럼 뭐요?"

"우리가 조언이라도 해줘야 하지 않겠소?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후기지수고 정파의 동량인데."

"왜요?"

"왜?"

"그건 교수님이 하겠죠."

"……음."

그렇네. 나 왜 열심히 하려고 하냐. 적당히 시간만 때우면 되는데. 하긴 뭐 그건 교수 월급 받는 교수가 해야지.

소걸은 고개만 끄덕였다.

***

"끝났어?"

"넹. 여기요."

나는 피폐한 안색으로 도하나가 내미는 결과표를 보았다.

교수 연구실이었다.

오전에는 숙소에서 쉬다가 점심으로 죽을 먹고 막 나온 참이었다.

아, 속 안 좋아. 단전 쓰려.

나는 결과표를 빠르게 훑었다.

이신이 1위. 정이삭이 2위. 당연한 거고.

나머지는 대부분 입학 순위가 곧 서열이 되었다.

개강한지 고작 10일 남짓. 크게 가르친 것도 없는 만큼 입학 순위를 뒤집지 못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그나마 8위였던 김지원이 7위를 이긴 게 이변이라면 이변이었다.

하룻밤 실전을 견식이라도 한 게 효과가 있었던 건지 그냥 7, 8위 간의 격차가 얼마 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순위가 서열을 뒤집지 못했지만 이 서열전이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위ㆍ아래 체급과 한 번 붙어보는 경험. 이건 절대 무시 못 한다.

누군가는 위 체급과 붙으면서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을 거고, 누구는 아래 체급과 붙으면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또 누구는 당장 따라잡기 힘든 격차를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신감, 위기감, 열등감 모두가 무인의 향상심을 자극하고 나아가게 만든다.

너무 과하지만 않는다면 서열전만큼 효율 좋은 자극제가 따로 없다.

최소한 벌써 배우는 것을 포기하는 학생은 없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악착같이 하나라도 더 배워 이기고, 유지하고, 못 해도 버티려고 할 것이다.

가르치기 좋은 환경은 마련됐다.

"과대한테 다음 수업부터 삼재종합공 1판, 63판, 64판 준비하라고 전달해 줘."

따로 신경 써야 할 것은 이신 정도. 나머지는 같은 커리큘럼으로 묶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사형. 아, 그리고 이거, 감상문이에요."

"감상문?"

"넹. 다른 사람 비무할 때 보고 감상문 쓰라고 했거든요. 다른 애들 비무하는 거에도 집중 좀 하라구요."

"잘했다."

나는 감상문을 받아들였다. 별 건 없겠지만 애들 안목 수준을 파악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나는 죽 훑으며 뻔한 것들은 다 옆에다 날렸다.

"아, 사형, 좀. 삼매진화로 태우든가. 그렇게 막 버리면 어떡해요."

"타는 냄새 싫어. 그 활자 폐기물들은 다 이면지 박스에 모아둬라. 그렇게 버리면 나무가 운다. 아껴야지."

"돈도 많으면서 참. 아낀 걸로 오늘 저녁 맛있는 거나 먹어요."

눈에 들어오는 것은 두 장이었다.

하나는 이신이 쓴 [원지혜 대 당수련] 감상문.

하나는 당수련이 쓴 [정이삭 대 원지혜] 감상문.

하여튼 우리 과대 당차구만.

당수련을 꺾은 이후 이신한데 진 정이삭에게도 덤볐던 모양이다.

[당수련에게는 검이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이신이 쓴 글을 읽어봤다.

이제 막 초절정에 오른 약병아리가 파악할 만큼 당수련의 검술은 형편없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암기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프레임 씌우는 거 아니야? 사천당가라고 일단 암기 쓰라고 막 적고 보는 거 아니야?

내가 보기에 마냥 완벽한 해법은 아니었다.

당수련이 암기를 익혀왔고, 검이 잘 안 맞는다고 해서 암기가 어울린다는 보장은 없다.

그 생각은 당수련이 쓴 감상문을 읽었을 때 확신이 되었다.

[제일초. 시작은 이삭이의 왼쪽 무릎. 지혜의 눈동자가 확인한다, 오른쪽 어깨를 들어 대응 시작. 지혜의 오른쪽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대각선 휘두르기. 이삭이가 확인한다. 이삭이가 곧장 시선을 위로 두며 보법을 밟기 시작한다. 동시에 아래에서 위로 받아치는 검격. 제이초. 이삭이가 오른쪽 발끝에서 뒤꿈치 발목으로 이어지는 회전을 시작. 이삭이의 시선은 여전히 위쪽. 이삭이의 시선을 따라간 지혜는 확인하지 못한다. 다음 순간…….]

"눈이 좋군."

상황을 파악하는 간격도 짧고.

시선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 특히 훌륭하다.

물론 시선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코 다칠 수도 있다. 일부러 못 본 체 연기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시선을 읽고 판단하는 것과 못 읽고 판단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나는 머릿속에 이걸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그려봤다.

검은 아니고. 암기. 암기에다가…….

나는 대충 생각을 끝내고 도하나를 바라봤다.

"근데 너흰 왜 제출 안 해."

"네? 뭘요?"

"교수 대신 봤으면 뭔가를 남겨야지. 학생들도 했는데. 조교 둘도 감상문 정리해서 제출하도록."

"힝."

"어허. 여장부가 우는소리 내는 거 아니다. 학생들이 배울까 두렵다. 당장 그치지 못할까."

"힝. 괜히 애들한테 감상문 쓰라 했어."

"얼른 써. 소 조교한테도 제출하라고 하고."

"알았어요."

도하나는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고는, 옆에 있는 조교 책상에 앉아 아까 애들이 쓴 감상문 뒷면에다 빠르게 뭔가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너 그거 자꾸 앞뒤로 돌려보는 거 같은데 기억 안 나서 참조하는 거 아니지? 초절정이나 돼서 일류 애들 거 보고 베끼는 거 아니지?

나는 도하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잠깐 째려보다가 다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옆에 든든한 호위가 있으니 오전보다는 마음 편하게 운기할 수 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최대한 여러 바퀴 돌려야 했다. 도하나나 소걸이 24시간 붙어 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몸 상태는 일찍 복구할수록 좋았다. 열화 핵폭단의 배후가 내 상태를 보면 아마 자기 생일보다 더 좋아할 것이다.

운기가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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