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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16화 (16/120)

< 16 : 15. 서열전(Ranking)(2) >

어느 날 스승님이 내게 말했다.

"산아."

"예, 스승님."

"너는 좀 특별한 별자리를 타고났단다."

"별자리 따위가 특별할 수가 있나요? 대충 생일 따라 나누는 거 아니었습니까?"

콩.

스승님은 공기를 뭉쳐 내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아프지 않았다. 아프지 않았기에 오히려 신묘한 경지였다.

"스승이 말하면 그냥 그러려니 할 것이지."

"스승님께서 제자에게 항상 틀에 갇히지 말고 자유로운 사고를 하라 하……."

콩.

"……셨으나 스승님의 금과옥조 같은 말씀은 항상 예외로 두어야죠. 예."

콩콩콩.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자고 부른 것이 아니다. 산아."

"예, 스승님."

"별 건 아니고."

"네."

"너는 천살성을 타고났다."

"천살……. 예? 제가요?"

내가 천살성이라니. 아무리 스승님 말씀이라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천살성이라고 하면 피에 미친 사이코패스 같은 인간말종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사형제들을 좀 막 굴리기는 해도 그건 다 서로 좋자고 하는 일 아니겠는가?

"지금까진 네가 피에 미칠 만한 상황이 없어서 잘 견뎌온 거다. 네 오성이 지극히 뛰어난 덕도 있고, 내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한 바도 있다."

"예……."

"하지만 언젠가 그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이제 너도 화산을 나서 바깥 일을 할 나이가 아니냐. 부디 하나만 명심하거라."

스승님은 화산의 하늘을 닮은 듯 투명하고 맑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저 눈을 보면 나는 잘못한 것도 없지만 괜히 움츠러드는 심정이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다만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이유로 죽이면 안 된다. 그것만은 항상 가슴 속에 품고 살아라."

"예, 스승님."

그 정도쯤이야. 내가 무슨 피에 미친 살인광도 아니고.

나는 씩 웃으면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때 대답처럼 늘 쉬운 일은 아니었다.

허나 나는 항상 그 다짐을 지켰다.

때론 죽이고 싶은 자들이 있었으나 그 이유만으로 죽이지는 않았다.

설령 그자가 내 친우를 죽인 자라 하더라도. 입술을 깨물며 칼을 거두었다.

죽여야만 하는 자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서 죽였다.

나 자신과 아직 살아있는 내 사형제를 지키기 위해서.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세상은 시대의 마지막 협객을 잃어버렸다.

***

정이삭은 5명의 스승을 두었다.

그는 지리산 인근을 떠돌던 고아였다.

근처에서 잡다한 심부름을 하면서 근근이 연명하다, 무인들의 자존심 싸움에 끼게 됐다.

그들 중 누구의 무공이 가장 뛰어나고 중요한지 다투다가 근골이 뛰어난 고아 하나를 가르쳐 결론을 짓기로 한 것이다.

"저놈 어떠냐?"

"보자. 흠. 괜찮아 보이네."

"이놈아. 혹시 무공 배워볼 생각 없느냐?"

"제가 왜 무공을 배워야 하는데요?"

어린 정이삭은 아주 낭랑하게 대꾸했다.

"밥은 굶지 않게 해주마."

그 말에 정이삭은 노인들을 따라 산을 올랐다.

그 중엔 대문파의 장로였던 사람도 있었고, 손을 씻었으나 이름 높은 대도였던 사람도 있었다. 삼재종합공의 대가도 있었다.

그들은 정이삭에게 각자 검, 권각법, 삼재종합공, 경신법, 기공을 가르쳤다. 어느 것 하나 수준 낮은 것이 없었다.

정이삭은 다섯 무공 모두에 꽤 재능이 있었다.

스승들이 처음에 했던 내기는 흐지부지된 지 오래였다. 정이삭에게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던 덕이다.

정이삭이 그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였고, 스승들은 정사를 막론하고 어느새 악우(惡友)가 되었다.

그러기를 십수 년.

정이삭이 약관의 나이가 되어 산에서 내려가게 됐을 때 스승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또래에게 맞고 다닐 일은 없을 거다."

"혹시 모르지. 소년화경 같은 종자가 또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일 아니냐? 나도 정사대전에서 그놈한테 맞을 뻔했다."

"예끼. 이번엔 저 도둑놈 말이 맞다. 화산검룡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경우 아니냐. 그놈도 몇 년 전부터 소식이 없던데 내 생각엔 요절했지 싶다. 그 정도 재능이면 그럴 만하다."

"잡소리들 말고. 이삭아. 늘 자신감을 가지거라. 너는 우리 모두가 인정한 공동전인이다. 동년배 중엔 너를 이길 자가 없을 거다. 너는 천재다."

정이삭은 스승들의 배웅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완숙한 절정.

검기가 단단하고 출력이 안정적이다. 좌수로 뻗는 쾌검과 사이사이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권각의 연계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연스러웠다. 발도 가벼웠다. 오늘 몸 상태가 아주 좋았다.

몸 상태가 좋아서 더 잘 와 닿았다.

정이삭은 분명 약관 치고 무척 뛰어나다.

'상대도 안 되는군.'

눈앞에 진짜 천재가 있었다.

뭐랄까, 좀 불공평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정이삭 본인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그렇게 생각될 만도 한 천재였으나.

모든 면에서 뒤처진다고 느꼈다. 어느 것 하나 앞서는 것이 없었다.

길이 2m가 넘는 거검을 정이삭이 쥔 당가검과 속도를 맞춰 휘두른다. 정이삭이 속도를 올려도 마찬가지였다. 맞춰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기의 질 역시 비등했으나 이신의 것이 우세했다. 굳이 검화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칠 수도 있었다. 까놓고 말하면 그냥 스펙 차이일 뿐이었으니까. 배우고 익히고 단련해 뒤집을 여지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검술 그 자체였다.

사일검법(射日劍法, Shooting sun).

해를 쏜다는 의념을 목표로 하는 쾌검. 화살처럼 쏘아지는 극쾌의 찌르기.

닿지 않았다.

멀었다.

정녕 활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멀리서 정이삭의 찌르기를 걷어내고 곧바로 찔러 들어왔다.

같이 받아친다면 길이가 일방적이었다.

장병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근접 거리에서 박투가 효과적이겠으나 얄미울 정도로 거리 조절에 능숙했다.

초근접 거리에서 권각을 섞은 박투에서는 정이삭 역시 자신이 있었으나 애초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보법 역시 이신이 우세했다.

스승님들이 보고 싶었다. 오늘은 좀 따지고 싶었다.

'동년배 중에서는 적수가 없을 거라 그러시지들 않았습니까.'

거기다가 소년화경 요절했을 거라면서요. 그 사람이 요즘 저 가르칩니다.

하긴 스승님들 잘못은 아니었다. 재능이 모자란 제자가 부족한 탓이지.

'그런가? 그냥 저들이 자연재해 같은 거 아냐?'

정이삭은 깔끔하게 받아들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격차라고 여겨지지는 않았으나, 당장 이신을 넘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서로 살수를 쓰는 실전이라면 몰라도.

'더 열심히 해야겠군.'

정이삭이 물러나며 검을 거두었다. 가볍게 포권했다.

"한 수 잘 배웠다."

"마찬가지. 오늘 몸 상태가 좋았네."

'몸 상태는 나도 좋았거든.'

정이삭은 말하려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한 번 붙어봤으면 좋겠네."

'한 10년쯤 뒤에.'

***

슥슥.

[자율무공학과 비무실습(I) 2주차 서열평가]

1위. 이신.

2위. 정이삭.

도하나가 대진표를 적어둔 화이트보드에 휘갈겼다.

"정이삭도 턱도 없군."

"그렇네요. 쟤는 제대로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차이가 크네요. 후개 오빠랑 붙으면 어떨 거 같아요?"

후개 오빠? 낯선 호칭에서 오는 위화감을 뒤로하고 소걸은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이신이 뛰어나긴 하지만 아직은 그에게 못 미쳤다.

물론 저 나이 때 소걸은 초절정에 이르지 못했으니 이신의 재능 자체는 인정하는 바였으나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넘을 정도는 아니었다.

소걸도 대방파의 후계자. 말하자면 세계 수준에서도 통하는 후기지수다.

"질 것 같지는 않은데."

물론 청룡검법을 뚫고 공격권으로 진입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도 소저는 어떻소?"

"죽여도 되면 삼초지적이고. 안 다치게 하려면 꽤 오래 붙어야 하겠는데요?"

살벌한 대답이었다.

도하나의 과거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후개로서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답이었다.

'하긴 그 고독에서 살아남은 몸이니.'

예의와 배려가 기본이 되는 비무대련보다는 죽고 죽이는 생사결에 훨씬 뛰어난 게 당연했다.

'까불면 안 되겠군.'

따져보면 도하나나 이신과 학생들이나 나이가 거기서 거기일 텐데.

재능도 재능이지만 살아온 환경이 차이가 나니, 이신과 달리 세월을 극복할 만한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신이 천부의 재능이라 하나 아직은 결국 온실 속의 화초.

'그렇기에 오히려 미래가 기대된다.'

실전과 경험을 통해 이신은 분명 주목할 만한 후기지수가 될 것이다.

개방으로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이신은 주류 대방파에 속하지 않는 정도의 인물이었으니까. 가까이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아 보였다.

'이신의 실력이 더 알려지기 전에 덕수이가와 끈을 강하게 연결해야겠군. 덕수에도 지부가 있나? 없다면 하나 만들어야겠군.'

소걸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계산했다.

무의식적으로 도하나를 상급자로 여기게 된 것은 덤이었다.

그 사이 도하나는 다음 대진을 불렀다.

2번 대진.

"원지혜 대 당수련. 비무대로 올라가세요."

원지혜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먼저 올랐다.

당수련은 잠시 눈을 감고 있더니 결심한 표정으로 도하나에게 다가왔다.

"조교 언니! 저 응원해주세요!"

"네? 넹, 뭐. 파이팅?"

"헤헤. 감사합니다."

당수련은 도하나의 성의 없는 응원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비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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