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 14. 서열전(Ranking)(1) >
나는 날이 밝자마자 퇴원했다.
비슷한 시간에 경찰들도 왔는데 끌려가던 김상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나도 마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오늘도 수업이 있었다. 학과를 담당하는 교수가 나밖에 없었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병가를 내기가 힘들었다.
뭐, 괜찮다. 오늘부터 쓸 만한 조교가 하나 더 생겼으니까.
"좋은 아침이다. 오늘 새로운 조교가 왔다. 다들 인사하도록."
"강호 무림의 새 동량들을 보아 몹시 반갑습니다. 개방의 소걸이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후개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짧은 기간이나마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었으니 이 기회를 좋은 인연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인연. 맞는 말이다.
이 자리에 있는 학생 전원은 한국에서 후기지수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었다. 개방이 인맥을 만들어놔서 손해를 볼 것은 없었다. 소걸도 다 고려하고 나의 제안을 못 이기는 척 승낙한 것일 테다.
"들은 것처럼 길바닥 거지 출신이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적선 따위를 하는 일은 없도록 해라. 조교에게 존중을 보이도록."
"……김 형이 가장 존중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오만."
"소 조교. 교내에서는 교수님이라고 부르도록."
"예, 교수님……."
소걸이 맥없이 대답했다.
"김지원이는 오늘 수업이 마치고 나면 교수 연구실로 와서 휴학 신청서를 취소하도록."
"네! 교수님!"
김지원이 씩씩하게 대답해 보기 좋았다. 밤을 새우며 여러 일을 겪은 터라 피곤할 수도 있었는데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젊은 게 좋아.
다른 애들은 김지원이 휴학 신청을 한 지도 몰랐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하긴 쟤들이 보기엔 그냥 며칠 결석하고 온 건데 휴학이니 뭐니 하니 그럴 만도 하다.
개강한 지 약 일주일이 막 지난 시점.
아직 제대로 가르친 것이 없었다.
실력 테스트를 한 이후에는 기본기를 교정해주고 있는 정도였다. 지금까지는 몸을 쓰는 것보다는 이론적인 수업이 더 많았다. 무림사학이라든지 고수론 등.
슬슬 무공을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삼재종합공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상승 무공을 이해하기엔 아직 애들의 기본 체급이 너무 낮았다.
기본 체급을 올리는 좋은 방법이 있다. 몇 번 써먹어 본 결과 때로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늘 효과는 확실했다.
특히 무인들처럼 자존심이 센 인간들에게는 아주 잘 먹히는 방식이었다.
"오늘은 서열전을 실시하도록 하겠다. 도 조교와 소 조교가 알아서 대진 짜서 관전하고 결과 보고하도록. 다들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지만 괜히 팔다리가 날아가거나 하는 일이 없게 조심하길 바란다."
그냥 등수를 매기면 된다.
대단한 보상 따위는 없다. 그냥 주어지는 순위가 전부다. 굳이 따진다면 학점 정도겠지만 학생들에게 학점 따위가 딱히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통한다.
"서열전?"
서열을 매긴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학생들의 표정에 어떤 다짐이 어렸다. 서로를 확인하고 가늠한다.
무인이라는 종자가 그렇다.
경쟁에 익숙한 인간.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 그렇게 계속 싸우고 많이 지고 다시 극복하고 언젠가 이기는 사람만이 계속 무인으로 살아간다.
"그럼 교수님은 뭘 하시나요?"
도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아주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피곤해서 자러 간다."
"……."
"왜. 뭐. 불만 있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김지원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무슨 충성스러운 군인인 줄 알았다.
"어? 어, 그래."
"네넵!"
나도 예기치 못한 반응이어서 잠깐 당황했다. 주변 다른 학생들도 떨떠름해 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생각해도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교수가 수업 안 하고 자러 간다는 소리나 하는데 왜 저렇게 예의 바른 거야? 나 먹이는 건가?
"서열전은 이 주마다 반복해서 치르겠다. 결과는 비무실습 과목 학점에 반영하겠다. 상호 간에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공지를 마친 이후 슬그머니 숙소로 향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안팎을 막론하고 전신이 쑤셨다. 서 있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원래는 오늘부터 삼재종합공을 가르칠 계획이었는데 도저히 못 할 만큼.
아, 아까 침 좀 더 맞다가 올걸. 생각해보니까 편하고 좋았는데. 그냥 병원에 누워서 조교들만 보낼 걸 그랬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취했다. 주변에는 방범 장치를 설치해놓은 채였다. 창문이나 문이 열리는 즉시 경보음이 울리도록. 그 경보는 곧장 도하나와 소걸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약하면 이런 것을 일일이 챙겨야 한다. 몹시 귀찮았지만, 강호는 그런 곳이었다. 무림에 몸을 담근 이상 은혜와 원한을 쌓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약할수록 조심해야 했다. 죽는 것보다는 귀찮은 게 낫다.
***
도하나와 소걸이 머리를 맞대고 조를 짰다.
"어떻게 하는 게 공평할 것 같소?"
"굳이 공평할 필요가 있나요? 대충 붙이죠. 어차피 이긴 놈이 센 거 아니에요?"
"……."
도하나가 진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긴 김산의 사형제가 정상일 리가 없지. 소걸이 생각했다.
화산파 무무문이면 죄다 정신 놓고 사는 무공광만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평균 무공 수위는 화산 내에서도 압도적으로 높았으나, 화산파 연화문이 화산을 대표하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상식이 안 통한다.
근데 듣고보니 맞는 말인 거 같기도 하고. 보아하니 첫 서열전인 모양인데 애초에 공평한 방법이 있나?
"쟤만 따로 빼놓으면 돼요."
"쟤? 누구? 이신? 왜?"
"쟤 혼자 초절정이거든요."
"……초절정? 이신이?"
"넹."
몰랐던 정보였다. 이신이라면 개방 한국지부에서 나름대로 주목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분명 작년에 절정에 올랐다 들었는데, 갑자기 초절정이라니?
맞다 쳐도 이상했다. 개방 한국지부도 못 알아낸 사실을 이신을 본 지 고작 일주일쯤 된 도하나는 무슨 수로 알아냈단 말인가.
"사형이 막 패다 보니까 갑자기 검화를 일으키더라구요."
"……."
도하나가 심상한 일인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하긴. 화경쯤 되는 안목으로 이신을 관찰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절정을 붙였겠지. 이신이 최우선 관찰대상은 아니었다. 경지를 숨기는 것을 예상했다 해도 다짜고짜 저렇게 캐내지도 않았을 거고.
김산쯤 되는 인물이니까 바로 알아내고 밝혀낸 거지. 소걸은 납득했다.
"그럼 입학 서열대로 2명씩 묶어 붙입시다. 이기면 위 서열 패자에게 도전할 수 있도록 하고. 이렇게 하면 이신이 수석인 정이삭과 붙게 되겠군. 그나마 정이삭이 해볼 만하지 않겠소."
"좋네요. 그렇게 해요."
소걸은 본인이 뭐라고 제안했든 도하나가 좋다고 했을 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시각 학생 무리는 김산에 대한 이야기로 한창이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원지혜였다.
"여기 학교 좀 이상하지 않아? 괜히 온 것 같애. 사천공대라서 믿고 온 건데 웬. 교수가 한 명밖에 없고. 갑자기 자러 간다 그러질 않나. 조교도 좀 수상해. 거기다 갑자기 개방 후개는 뭐야?"
김지원이 답했다.
"난 괜찮은 거 같은데? 많이 피곤하면 자러 가실 수도 있지. 그래도 교수님 엄청나게 대단하지 않아? 내공도 별로 없다는데 신이도 상대했잖아. 또 보다 보니까 나름 잘 생기고 멋있는 거 같아."
"……."
김지원은 이틀 못 본 새 무슨 김산의 추종자라도 된 것 같았다.
"……지원이 너 무슨 일 있었어? 교수가 너 약점이라도 잡은 거야? 휴학은 또 뭐고?"
"휴학? 별 거 아니야. 잠깐 문제가 있었는데 해결했어. 약점은 커녕 교수님이 나 엄청 도와주셨어. 되게 든든하더라. 아무튼 난 교수님 맘에 들어."
"……그렇구나. 야, 니 생각은 어떤데?"
"나?"
원지혜가 이신을 폭 찌르며 물었다. 이신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잠깐 생각하더니 답했다.
"나도 괜찮은 거 같은데? 배울 것도 많아 보이고. 솔직히 가문에 있는 객 중에서도 교수님만 한 분 없잖아."
이신은 사실상 학생 중 최강자다.
다른 누가 또 이신과 같이 실력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초절정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신의 말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신의 말을 들은 학생 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
"사실 화경 고수에게 배울 기회가 많지는 않지."
게다가 김산은 그런 초절정 고수인 이신을 가볍게 제압했다. 내공을 잃었든 어쨌든, 세면 장땡인 게 강호였다.
원지혜가 생각하기에도 김산에게는 딱히 부족한 점이 없었다. 오늘 자러 간 것만 빼면 말이다. 원지혜는 그걸 꺼내려다가 그냥 본인만 좀생이가 된 것 같아 입을 꾹 닫았다.
과에 교수가 하나밖에 없는 건 이상했지만, 조교 둘이 초절정 고수였으니 덮을 수 있는 문제였다. 초절정 고수면 다른 학교에선 간판 교수가 될 수도 있는 레벨이다.
"……그건 그렇긴 한데. 넌 누구 편인데?"
"응? 누구 편?"
"……됐어."
원지혜는 괜히 등에 맨 창만 까딱거렸다.
잠시 후 도하나가 애들을 불러모았다.
"주목! 서열전 대진을 발표할게요! 다들 확인하세요. 비무 당사자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비무를 감상하고 각자 본인이 생각하는 주요 지점들은 적어서 제출하세요."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오더니 오와 열을 맞춰 정렬했다. 나란히 서서 도하나가 즉석에서 대충 휘갈긴 대진표를 보았다. 학생들이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가 당사자 둘을 보았다.
1번 대진.
정이삭 대 이신.
"이런."
"잘 부탁한다."
"하하. 살살 좀 해줘."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이신을 향해 정이삭이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가 이내 작게 포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