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 13. 자정의 부산(Midnight in Busan)(5)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응급실이었다. 이래서 다칠 거면 병원에서 다치는 것이 가장 좋다.
"사형, 정신이 드세요?"
"교수님!"
눈을 뜨니 도하나와 김지원이 보였다. 시야를 넓히니 소걸과 김소원도 근처에 있었다. 주변 다른 병상에는 실종자들이 누워있었다.
나는 일단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5시였다. 두 시간쯤 기절했던 모양이다.
뾱. 뾱.
나는 팔에 꽂혀 있는 링겔과 몸뚱이에 가득 꽂혀 있는 대침들을 하나씩 뽑았다. 고슴도치도 아니고 사람 몸뚱이에 무슨 침을 이렇게 가득 찔러둔 건지.
"그거 그냥 그렇게 뽑아도 되는 거요?"
"이런 걸로 나을 수 있다면 온종일 꽂고 다녔을 거다. 처리는?"
"다 했소. 경찰은 돌려보냈고 CCTV는 다 지웠소. 병원 고위 관계자 쪽엔 일단 방원들을 보내둔 상태요. 날이 밝으면 검경과 협력해 압수 수색에 들어갈 것 같소. 아무래도 핵폭단이 관련된 이상 처벌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오."
"깔끔하군."
"뭘 이런 걸 가지고."
소걸이 대답했다.
역시 이런 일도 해본 놈이 잘한다. 대문파의 후계자쯤 되면 말 못 할 일을 많이 겪게 되고 후처리에도 도가 트기 마련이다.
"의사들은 현재 지하실에서 방원들이 보호하고 있소. 마찬가지로 날이 밝으면 검경 쪽에 인도할 것 같소. 또한…… 취견자의 시체는 개방이 수습했는데……. 그래도 괜찮겠소?"
"물론. 선물이다."
"고맙소. 아마 방주께서도 기뻐하실 거요. 이제야 돌아가신 용 장로의 넋을 기릴 수 있을 것이니 말이오."
용 장로. 취견자의 스승. 용견개. 좋은 사람이었다.
소걸이 자세를 바로잡더니 포권했다.
척.
"개방을 대표해 개방용결 후개 소걸이 사문의 배신자를 대신 처단한 은인께 감사를 표하는 바요. 개방은 원한을 잊지 않듯 이 은혜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은인께서 개방이 필요할 때 개방은 은인의 곁에 있을 것이오."
나도 마주 포권했다.
"무림동도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 협이 필요한 순간에 협을 행했으니 그걸로 족하오."
"그렇다면 감사할 따름이오."
"근데."
"……뭐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소주천을 시작했다. 1.5초 정도. 독맥과 임맥을 통해 내기를 돌리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외상은 화경의 육신답게 빠르게 회복되는 중이었으나 내상이 심각했다. 전신 기혈이 뒤틀려 있었고 단전도 살짝이지만 쪼그라든 상태였다. 위험했다.
최소한 한 달은 주의가 필요해 보였고, 몸 상태를 온전히 회복하려면 석 달은 걸릴 것 같았다.
이때 온전히 회복함이란 내공 7년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 7년 치마저 온전히 회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 가용한 내기는 1년 치 남짓이었다. 내공만 따진다면 무공에 엊그제 입문한 풋내기와 다를 것이 없다.
금제를 억지로 건드린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당장 죽을 위기였으니까.
취견자는 그 정도 상대였다.
기본적인 체급 차이도 나는 상대였고 상성도 좋지 않았다. 거기다 열화 핵폭단을 복용해 폭발적이지는 않았으나 내공 회복이 극도로 빠른 상대였다. 내공이 부족한 나에게는 천적이었다.
만약 내가 한시적으로나마 금제를 우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취견자가 알았다면, 혹은 그게 가능하다 해도 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는 점을 그가 미리 알고 있었다면, 소걸과 도하나는 취견자의 것 대신 내 시체를 보게 됐을 것이다.
한 끗 차이였다.
아무튼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지금은 열화 핵폭단을 복용하지 않은 취견자를 상대해도 커피 한 잔 마실 시간[一茶頃]도 걸리지 않아 피떡이 될 것이다.
"그 은인께서 당장 개방을 필요로 하는 것 같군."
"……뭐요."
"동네 의사와 피 대신 술이 흐르는 무공광 둘이서 핵폭단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고, 당연히 배후가 있지 않겠나?"
"……그렇지 않겠소?"
"그놈들이 날 노리면 어떡하지? 지네 계획을 망친 놈을 죽이고 싶지 않을까? 핵폭단까지 만드는 놈들이 준법정신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닌 밤중에 칼침 맞을까 무섭군."
"……그래서 뭐 어떡하자는 거요."
"당분간 날 호위해줄 고수가 있으면 좋겠는데. 가능하면 화경으로. 손이 부족하다면 초절정이라도 좋다."
"개방에 화경이 몇이나 된다고."
"초절정은?"
"거지놈들 모인 방파에 고수가 남아돌겠소? 부족하면 부족했지. 다들 맡은 임무를 처리하기도 바쁘오."
나는 소걸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는, 그, 취견도 잡았겠다. 김 형도 보았고. 본 파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또 할 일이 많소. 이번에 중동 쪽에도 낌새가 이상한데 그쪽도 가봐야 하고……."
지그시.
"험, 내 사천 지부에 한 번 연락은 넣어보겠소."
"아이고. 나 죽는다. 은인 죽어. 개방은 죽어도 협과 은원을 잊지 않는다더니, 은혜는 깨끗이 잊고 원한만 기억하는구나. 그런 곳이 무슨 동양의 적십자라고. 개방의 역적을 처단하고 그 대가로 칼침 맞아 죽게 생겼구나. 하나야, 내가 죽으면 묘비에는 개방을 너무 믿은 죄로 죽었다고 적어주려무나."
"네, 사형!"
"아, 알았소, 알았소. 얼마나 봐주면 되겠소? 일주일이면 되겠소? 금방 낫잖소."
"개방쯤 되면 내 몸 상태는 대충 알 텐데. 한 6개월은 걸릴 것 같다."
"6개월은 너무 기오! 나 후개요!"
"그럼 절반. 딱 3개월만."
"……진짜 3개월이오. 번복하면 안 되오."
"물론이지. 내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 본 적 있나?"
"너무 많이 봐서 문제요. 김 형 같은 도사는 태어나서 처음 봤소."
나는 못 들은 체했다.
"지원이, 소원이는 괜찮니?"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넹, 아저씨. 고마워요."
야. 아까는 오빠라며. 필요하면 오빠 되는 거야? 너 그런 아이니?
"근데 우리 할아버지는 어떡해요?"
문득 김지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할아버지?"
―김상후 말이오. 김지원과 김소원의 조부라더군.
―김상후가 누군데?
소걸이 전음으로 말을 걸길래 나도 전음으로 답했다.
―연구원의 책임자 말이오. 외알 안경을 쓴 노 의사.
―아.
제 손녀를 납치해 핵폭단을 먹였다는 말인가.
아니, 생각해보니 수혈을 짚기 전에 김소원은 나에게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 어쩌면 김소원만큼은 납치된 게 아닐지도 몰랐다. 물론 케이지에 있는 취급은 다른 사람들과 같았지만 말이다.
―알아봤소. 김소원이 칠음절맥 판정을 받은 것이 약 10년 전. 그 직후 이 지방 명의였던 김상후가 절맥 연구소를 설립했다더군.
―그게 진짜 있는 단체였단 말이야?
―손녀의 절맥을 치료하기 위해 발버둥을 친 것이지. 옆에 있던 연구원들도 다 비슷한 처지라 들었소. 아무리 해도 진전이 없던 와중 3년 전쯤 그자가 찾아왔다 했소.
―그 자?
―마선 말이오.
마선. 세계 삼대의선 중 한 명이다.
일반적으로 선 자는 현경쯤 되는 고수에게 붙기 마련이지만 의선은 또 달랐다. 의원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셋이 의선이라는 별호를 갖고 있었다. 한 마디로 업계 쓰리 탑을 일컫는 말이다.
그 중 마선은 천마신교 평화병원장 출신의 의사로 연단술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으로 유명해진 자다.
또한 내가 지난날 핵폭단 연구소를 습격했을 때 연구소장으로 있던 자이기도 했다. 그때 이후로 내가 계속해서 쫓고 있었다.
한동안 흔적이 없었는데 이런 곳에서 나타날 줄이야. 아직도 핵폭단을 연구하고 있었군.
―역시 마선이었나. 취견자를 본 순간 대충 예상은 했다만.
―김상후가 마선이라는 것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인상착의와 행태가 거의 동일하오. 아무튼 마선과 접촉해서 자료를 받은 이후 그때부터 열화 핵폭단을 개발하기 시작했다고 하오. 화경 미만의 고수들도 복용할 수 있는 것을 목적으로 말이오.
―김상후가 그를 도울 필요가 있었나? 협박이라도 한 건가?
―열화 핵폭단이 실제로 절맥을 극복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고 하더군. 끝내는 파단의 고통을 억제한 열화 핵폭단 개발에까지 성공했다고 하오. 그게 김소원이 복용한 것이고.
그랬군. 어쩐지 김소원은 아무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김상후가 내놓은 절맥에 대한 해답이었나보다.
절맥을 극복하기 위해 핵폭단을 복용한다라.
죽음을 피하고자 독약을 먹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를 통해 죽음을 연기할 수 있다면 합리적인 행동일지도 몰랐다.
오음절맥쯤 되면 단명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칠음절맥이면 약관이 되기 전에 9할은 죽는다.
열화 핵폭단을 복용해 진원진기를 분해하면서 나오는 내기의 파도로 절맥을 억지로 통행한다면, 수명이 조금이라도 연장되는 경우도 나올 것이다.
진원진기를 보충할 수 있는 정도의 영약만 제때 공급해줄 수 있다면, 결론적으로 절맥을 극복한 것이 된다.
절맥 역시 핵폭단만큼 고통스럽다.
고통까지 억제할 수 있는 열화 핵폭단을 만들었다면, 그건 절맥의 치료제가 맞다.
김상후는 성공한 것이다. 세기의 발견이다. 절맥을 극복했다.
그러나 김상후는 그 연구와 실험 과정에서 목숨에 지장 없는 일, 이음절맥까지 납치해 치사율 99%의 독약을 먹였다. 그건 그냥 납치 감금 살인이다.
게다가 핵폭단의 개발은 국제 협약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이번 일을 통해서 열화 핵폭단은 절맥들에게 한정적으로 허용될지도 모르지만, 세기의 발견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 김상후와 연구자들이 신약 개발의 영광을 누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것이다.
한정적인 상용화조차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열화 핵폭단 역시 핵폭단이다.
중견 화경 고수 취견자가 끊임없이 강기를 뽑아내게 할 만큼의 성능을 가졌다.
비핵화 국제 기구가 열화 핵폭단의 오남용을 절맥 치료보다 중대한 문제로 생각한다면 연구 개발이 허가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일단 개발되면 오남용을 위한 유통은 아주 쉬울 테니 말이다.
김소원은 그녀의 할아버지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크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아니, 그럴 기회조차 없을지도 몰랐다.
아까 맥을 짚어본 것으로 판단했을 때, 진원진기가 분해되는 속도를 고려할 때 영약을 복용하지 못하면 김소원은 7년 안에 죽을 것이다. 칠음절맥이 약관까지 산다고 보면 고작 4년 남짓 수명을 연장한 셈이다. 남의 인생 수십을 값으로 치르며 말이다.
나 역시 무엇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확실한 건 김상후의 죄가 김소원의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그저 김소원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생존 자체를 괴로워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