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 12. 자정의 부산(Midnight in Busan)(4) >
취견자가 흥분하며 달려들었지만 그럼에도 냉정함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경의 고수는 그런 인간들이다. 싸움에 이골이 난, 무공에 미친 인간들.
어떤 상황에서도 최적의, 최선의, 최고의 싸움을 한다.
도박사가 어떤 패를 잡든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과 같다. 화경의 집중력이 무너지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 부동심이 아주 조금만 흐트러지더라도 내 도발은 제값을 한 것이다.
"무공이…… 주둥이에는 못 미치는구나……."
"아직 몸 푸는 중이라 그렇다. 나는 준비 운동을 많이 하는 타입이다."
취견자가 끊임없이 몰아붙였으나 나는 한 끗 차로 계속 피했다.
취견자와는 후기지수 시절부터 많이 봐왔다.
나이는 나보다 열다섯 정도 많았는데 내공이 중요한 무림 생태계상, 세대는 달랐으나 같이 후기지수로 묶이곤 했다.
마흔 살 언저리까지는 다 후기 취급이니까.
비무대련과 논검대회, 아시안게임 등에서 몇 번 붙어본 사이인데 여태 내가 밀린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지금은 좀 얘기가 다르긴 하다.
그때 나는 총체적 무공 수위, 무기술, 내공의 양과 질, 내공을 다루는 숙련도, 신체의 힘과 속도까지 모든 측면에서 취견자에게 앞서 있었다.
지금은 내가 그때 앞서던 면에서 절반은 밀리거나 동등한 수준이다.
나은 것은 무기술과 기를 다루는 숙련도 정도일까. 그마저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 두 가지를 꼽자면 첫째는 내가 내공을 잃은 것이고 둘째는 취견자가 화경에 올랐다는 것이다.
"홍가야, 많이 컸구나. 나와 이렇게 많은 초식을 겨룬 건 처음 아니냐?"
"하하……. 원래도…… 너보다 컸지……."
"그런 대꾸나 하다니 배포는 여전히 조막만 하구나."
후웅─.
취견자의 배트가 공기 가르는 소리가 살벌했다.
최대의 효율로 최소한의 내기를 소모하며 보법을 밟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내공 부족이 슬슬 실감이 되었다.
무기를 맞대야 하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강기로 응수해야 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강기를 아주 짧게 사용하더라도 합의 간격이 짧아서 회복보다 소모가 빨랐다.
"기묘한…… 잡기술을 쓰는구나……."
"요즘 유행이다. 미니멀리즘이라고 하지."
솔직히 말해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내공을 잃고도 적잖은 화경을 상대하고 이겨왔으나, 대부분은 상대의 나에 대한 정보 부족과, 삼재공에 대한 이해도 차이로 인한 상성 우위로 주도권을 잡은 경우였다.
취견자는 달랐다.
취견자는 후기지수 시절부터 나와 몇 번이고 무를 겨뤄왔고, 삼재종합공 대신 개방의 취권과 타구봉법을 극한까지 익혔다.
나에 대한 정보가 많은 편이었고, 무공 상성의 우위를 내세우기도 힘들었다.
"내일 아침에 수업이 있는데 이만 들어가 봐도 되겠냐? 좋은 비무였다."
"수업……? 뭔지는 몰라도…… 멱은 내놓고 가라……."
"그게 없으면 수업을 못하는데. 강의력이 떨어질 거 같아서 안 되겠다. 강의 평가가 중요하거든."
취견자는 씩 웃더니 품에서 스테인리스로 된 병을 꺼내 술을 몇 모금 꼴깍거렸다.
술을 마셔야 싸움이 잘 된다니 취권이라는 것은 하여튼 미친 무공이다.
내가 보기에 역대 개방도 중에서도 취견자보다 취권을 잘 이해한 자는 없을 것 같았다.
24시간 약과 술에 취해 있는 놈이니 하루 종일 취권을 수련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나도 그 사이 조용히 숨을 골랐다.
어떡해야 할까. 난 주변을 살폈다.
도하나가 작게 미소 지으며 날 보고 있었다. 의사들은 이미 바닥에 꿇린 채로 팔이 묶여 있었다.
도하나의 개입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화경의 비무에 초절정이 낄 자리는 없다.
"많이 힘든 모양이구나……. 이런 틈을 그냥 두는 놈이 아니었는데……."
정곡이었다.
"……그럴 나이다. 요즘 어깨도 쑤시고 무릎도 아프고 그런다."
"화경이……? 환골탈태를 너무 일찍 해서 그런가……? 뭐 됐다……."
취견자는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똑. 똑. 똑.
어느새 취견자가 들고 있던 병에서는 방울만 떨어지고 있었다. 몇 번 병을 툭툭 치던 취견자는 이윽고 고개를 찌푸렸다.
"다 마셨군……."
"술이 다 떨어졌다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요즘은 1차만 하는 게 대세……."
쾅!
취견자가 던진 술병을 여유롭게 피했다. 슬쩍 보니 스테인리스가 거의 찢어지며 튕겨나가는 게 보였다. 맞으면 그냥 아픈 걸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참신한 암기다. 당가에 저작권을 팔아보는 게 어떠냐. 마침 아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소개해 주마."
"이제 잡소리는 됐다……. 얼른 널 죽이고 새 술을 마셔야겠다……. 화산검룡으로 검룡주를 담그는 것도 괜찮겠구나……."
"그렇게 맛있어 보이는 이름은 아닌데. 대신 취견보신탕은 어떠냐."
그렇게 말했으나 사실 속으로는 좀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주류 회사와 콜라보레이션 할 일이 있으면 꼭 저 명칭을 사용해야겠다.
취견자가 다시 달려들었다. 한껏 피워올린 봉강은 여전했다. 아니, 크기가 더 커진 것 같았다.
하긴 돈과 영약에 스승도 팔아치운 놈이다. 내공이야 넘쳐날 것이다. 방금 마신 술이 공청석유 칵테일이라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쾅! 쾅! 쾅─!
미친 듯이 바닥을 찍으며 나를 쫓아온다. 무공보다 저 행태가 더 무섭다.
"그건 뭐냐? 타구봉법 말복……. 뭐 그런 건가?"
"아니……? 그냥 내려찍기다……."
"이런."
취견자 놈의 풀려 있는 눈동자를 보았다. 흐릿했다. 당최 어디를 보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의도를 확실히 읽을 수가 없으니 움직임 자체에 대응해야 했다.
취권이라는 것은 허허실실이 핵심이다. 흐느적거리는 듯한 움직임에도 결과적인 날카로움이 있다. 이 경우엔 봉을 사용하니 취봉이라고 해도 좋다.
취견자는 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언뜻 나른하더라도 그 육신은 전차 같은 파괴력을 가진 화경의 것이며 심유한 내공이 한가득 담겨있다.
위력은 이미 충분하니 궤도 끝을 불분명하게 만드는 저 흐늘거림은 효과적이었다.
다행인 것은 놈에게 술이 다 떨어졌다는 것.
격전은 취기를 빨리 달아나게 만들 것이다. 본인이 취하고 싶다 하더라도 그렇게 된다. 몇십 합만 있으면 취견자는 술에서 완전히 깨어날 것이다.
웃긴 일이지만 취견자를 상대할 때는 술에서 깼을 때가 더 상대하기 편하다.
취견자의 공격은 직선적이고 뻔하다. 그것을 보완해 주는 것이 타구봉법과 개방취권의 현묘함이다.
자고로 뭔 짓을 할지 모르는 미친놈이 가장 무서운 법.
특히 그 미친놈이 무지막지한 떡대에다가 넘쳐나는 내공을 갖고 있다면 더욱 그랬다.
취견자가 술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 순간을 기점으로 잡아야겠다.
저 봉강도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격 순간에만 잠깐 강기를 두르는 나와 달리 취견자는 한순간도 봉강을 꺼트린 적이 없다.
취해서 내공을 저렇게 허투루 소모해 주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
몇 합을 더 겨루면서 생각했다.
그럴 수가 있나? 취견자의 내공이 그 정도였나? 아무리 영약을 처먹었어도 본래 갖고 있던 기반과 자질이 어디 가지는 않을 것인데.
"너……, 이미 먹었구나."
"네가 할 소리는…… 아닐 텐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취견자는 이미 열화 핵폭단을 복용한 모양이었다.
정도 이상으로 술과 약을 흡입하는 것 역시 파단의 고통을 덜기 위한 수단이었나.
내 내공이 쥐꼬리만큼 회복되는 동안, 취견자의 단전에서는 전신을 채울 만큼의 내공이 새로 뿜어져 나오고 있을 것이다.
이미 내공이 거의 남지 않은 상태. 이대로는 답이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이 수만큼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없었다.
첫 번째, 팔다리 하나를 내주면서 목이나 심장을 어떻게 취하는 것.
가능성이 그렇게 높아 보이지는 않았다.
첫 합부터 단기 결전을 노렸다면 모를까 내공을 소모한 지금은 어려워 보였다.
두 번째, 나도 여기 어디 있을 열화 핵폭단을 찾아 복용하는 것.
나쁘지 않았다. 당장 야구 방망이에 맞아 죽는 것보다는 말이다.
하지만 결국 죽는 것은 똑같았다. 핵폭단이 내 진원진기를 녹여낼 테니.
아닌가? 원래 인간은 죽는 법. 나도 사람이니 언젠가 죽는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죽었다. 그냥 정해진 수명보다 조금 빨리 갈 뿐이다.
싫은데.
난 가능한 오래 살고 싶었다. 그리고 아픈 것도 싫었다.
세 번째.
"……미친 놈……."
"……사형?"
도하나의 당황한 목소리를 뒤로하며 출입구 쪽으로 뛰었다.
***
물론 취견자로부터 도주할 수는 없다.
초근접거리에서의 보법이라면 모를까. 장거리 경공에서는 내공의 차이를 뒤집을 수 없다.
나는 지하 1층으로 올라가 주변을 살폈다. 가볍게 검기를 날려 CCTV를 파괴했다. 병원 전체에 사이렌이 울리고, 곧장 취견자가 따라올라왔다.
"뭐 하자는 짓이냐? 경찰이라도 부르는 거냐? 오면 달라질 것 같나?"
"안 되려나? 경찰 아저씨가 잡아가 주지 않으려나?"
취견자는 이제 술에서 좀 깬 것 같았다. 늘어지는 말투가 또렷해졌다.
"화산검룡. 모두 너 때문이다."
"뭐가? 고백이라면 미안하다. 남자는 좀 그렇다."
"난 너 때문에 사문을 배신하고 영약을 먹었으며, 인의를 저버린 연구를 돕고 끝내 핵폭단까지 먹었다. 그 빌어먹을 재능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늘 이 악연을 끝내자꾸나."
개소리였다. 역시 별호에 괜히 견 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틀렸다. 네가 개방을 배신한 건 그냥 네가 은혜를 모르는 개새끼라서고, 난 너 따위를 악연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냥 스쳐가는 하수 중 하나였을 뿐이다.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난다. 홍…… 뭐시기였나?"
"하하, 정말 입담은 여전하군. 그래서 난 널 싫어한다."
"나도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가 먼저 싫어했다."
취견자의 낯빛이 서서히 정상에 가까워졌다. 이제 술이 거의 다 깬 모양이었다. 싸늘한 표정으로 막대한 내공을 소모해 봉강을 키워가고 있었다. 제 몸뚱이만 했다.
병원 복도 한가운데에서 나는 기경팔맥과 주요 혈도를 점혈했다.
낮에 절맥인 척 하기 위해 점혈을 한 것과 반대로 내공의 흐름을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전신에 힘을 빼고 남은 내공을 단전에 모아 빠르게 회전시켰다.
거칠고 빠르게 내공을 돌림으로써 묶여있는 내공을 진동시켰다.
금제된 내공을 건드리자 단전이 통째로 흔들렸다.
이윽고 금제된 내공이 억지로 출발해 전신을 순환하기 시작한다.
대주천(大周天, Big flow).
단 한 바퀴.
약 8초.
그 이상은 무리였다.
단전을 출발한 금제된 내공이 다시 단전으로 돌아오면 끝이다.
한 바퀴 더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실시간으로 수명이 깎이고 기혈이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오장육부도 압박을 받았는지 입에 핏물이 올라왔다.
바로 승부를 봐야 한다.
세 갑자가 넘는 막대한 내공이 전신에 퍼져나간다.
그 흐름은 거칠지만 와닿는 느낌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원래 이랬다.
숨을 쉬는 것처럼 내공을 자유롭게 다스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워할 시간도 없었다.
"……내공을 잃은 게 아니었나?"
"퉤, 그렇게 됐다."
나는 핏물을 뱉고 답해줬다.
나는 자하신검 레플리카를 들어 허공을 찌르듯이 뻗었다.
자하신공(紫霞神功)에서 비롯된 보랏빛 강기가 찬란했다.
우우우우우우웅─.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리는 병원 복도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최대한 빠르고 단순한 것으로.
나는 취견자에게 달려들며 칼을 뻗었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The 24 plum blossom).
암향척(暗香刺, Dim scent thrust).
매화의 꽃잎은 다섯 개다.
다섯 번을 찔렀다.
취견자는 한 번을 막아냈고 한 번을 피했다.
그다음 한 번은 팔. 그다음 한 번은 배를 찔렀다. 폐가 있는 쪽이었다.
마지막은 목.
"끅."
그게 취견자의 유언이었다.
대개 그렇다. 고수라고 해서 죽을 때까지 유언이 거창해질 수는 없는 법이다. 대개는 끅, 억, 말도 안 돼 등을 내뱉으며 죽어갈 뿐이다.
"잘 가, 우우우우우웩!"
나도 뭔가 멋들어진 말을 하고 싶었지만 올라오는 핏물을 쏟아내고 쓰러졌다. 대주천이 끝난 시점이었다.
존나 아팠다.
"사형!"
"김 형? 이 무슨. 이 자는 누구요? ……취견? 어찌?"
밑에서 올라온 도하나와 위에서 내려온 소걸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난 기절했다.
소걸 저 자식은 언제 불렀는데 이제 와. 일어나면…… 가만히…… 안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