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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12화 (12/120)

< 12 : 11. 자정의 부산(Midnight in Busan)(3) >

생체신호 감지기는 심박으로 착용자의 생존 유무를 판단한다.

암습 상황에서의 경보나 근접전 유도 측면에선 유용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인체에 대해 익숙한 고수가 연습 좀 하면 심장 박동을 흉내 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생체신호 감지기를 속일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이, 이런 미친……. 말도 안 되는……."

노의사가 벌벌 떨며 탄식했다.

낮에 본 영감님이었다.

병원 안에 끄나풀이 있는 수준이 아니라, 절맥과 그 외 내공 기관을 담당하는 의사 본인이 이 집단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정한수는 처음부터 나를 의심했다고 했다.

아마 그가 말하는 처음은 이 의사의 진료를 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오래 걸릴 것 없이 다가와 말을 걸고 바로 야산으로 셔틀을 보냈겠지.

"이봐, 영감님. 내가 연기를 하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상식적으로 증상이 절맥 증상이었지 않나?"

"네, 네놈은 몰라도 된다!"

"어째 순순히 말해주는 법이 없군."

하지만 몰라도 된다는 말은 뭐가 있다는 말과 동의어다.

그냥 진료 결과만으로 파악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지금 말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대답을 촉구하는 화술에 아주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정한수에게 했던 것처럼 말하기 편한 환경만 마련 해주면 된다.

"보아하니 쓸 수 있는 전력은 거의 다 쓴 거 같은데."

주변을 눈으로 죽 훑었다.

넓은 지하실을 터놓은 직사각형 공간이었다.

한쪽에는 실험 기구들과 생필품들이 있었고 반대쪽에는 실종자로 보이는 자들이 갇혀 있었다.

내가 들어온 곳을 제외한 출입구는 없는 듯했다.

최소한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실종자로 보이는 사람들은 케이지 안에 갇혀 있었다.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실험용 흰쥐로 대하는 모양이었다.

숫자는 총 스물일곱.

기절한 사람이 열에, 정신을 반쯤 차리고 있는 사람이 열일곱.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하나 있었는데, 김지원의 동생 김소원이 아직 살아있다면 그녀일 것으로 보였다.

실종자 중 고수로 보이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다들 아파하는 걸 보니 이미 전부 복용한 건가? 그렇다면 곤란한데.

그 반대편, 흰 가운을 입은 의사 혹은 연구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여덟 명.

정황상 총책임자는 노의사로 보였다.

그들 무리에선 그나마 노의사가 절정의 경지로 무공 수위가 높은 편.

한곳에 뭉쳐 슬금슬금 환자들 무리로 물러나는 중이었다.

그쪽에 비상출입구가 있을 수도 있고 인질을 잡을 수도 있다. 주시해야겠다.

그 외 무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네 명 정도 있었는데 경지는 죄다 절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화경이나 현경의 무인을 끼지 않고 핵폭단을 연구할 리가 없었다. 열화 된 핵폭단이라 그런가?

일차적인 목표는 정했다.

"도하나. 저 무인 나부랭이들을 정리하도록. 그리고 곧장 의사들을 제압한다. 나는 일단 환자들부터 살핀 후 움직이겠다."

"네, 사형."

스릉.

나와 도하나는 각자 무기를 꺼내들었다.

일단은 환자들의 용태부터 살핀다.

도하나보다는 내가 인체에 익숙하니 내가 하는 것이 맞다. 곁눈질이지만 의술도 조금 배웠다.

나는 도약해 바로 가장 가까운 케이지로 향했다.

스걱.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강철로 된 케이지가 작음 소음을 내며 갈라졌다.

"으, 으음. 누, 누구……?"

"가만히."

나는 눈을 반만 뜨고 신음하는 여자의 맥을 짚고 내기를 주입해 경맥을 탐색했다.

과연 주요 경맥 중간중간에 끊긴 곳이 몇 있었다. 이 여자는 오음절맥쯤 될 것이다.

그러나 불규칙하고 강렬한 내기의 파도가 계속해서 들이닥치며 절맥이 이어진 것처럼 내공이 통행하고 있었다.

속도와 힘으로 도약해 다리가 끊어진 절벽 사이를 뛰어넘은 셈이었다.

순 억지였다.

그렇지만, 절맥 자체만 따진다면 유효한 치유법일 수도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내공을 도인했다. 이윽고 단전을 살폈다. 내기 파도의 발원지.

그리고 확인했다.

단전이 조금씩 깎아져 나가며 내기의 파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진원지기를 분해해 가용한 내공으로 치환하는 것.

핵폭단의 원리와 동일했다.

대신 그 속도와 강도가 폭발적이지 않을 뿐이었다.

이 사람은 아주 느릿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해결책은…….

그런 건 없었다.

이미 진행되기 시작한 핵폭단의 작용을 막을 수는 없다.

방법이 있다면 끊임없이 영약을 섭취해 진원진기 자체를 계속해서 보충하는 것뿐이다.

……아니면 진원진기가 멀쩡한 다른 사람의 단전을 이식받거나.

둘 다 일반적인 해결법이라고 볼 수는 없었고, 어찌할 수 있다고 쳐도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는 없는 방법이었다.

나는 일단 여자의 팔을 내려놓고 옆에 기절한 남자의 맥을 짚었다.

이미 단전이 반쯤 소멸한 상태.

후.

나는 한숨을 쉬며 여자의 수혈을 짚었다. 그나마 단전이 파괴되는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여자가 푹 쓰러지며 잠에 들었다.

더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었다.

당장 상황은 해결하고 난 후에 생각해 봐야겠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케이지를 가르고 의식이 있는 환자들의 수혈을 짚었다.

마지막 케이지에는 15살짜리 소녀가 혼자 있었다.

"김소원?"

"네? 저 아세요?"

"그래. 김지원이 너를 구해달라더구나."

"언니가요? 음, 근데요~"

"잠시."

김소원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소녀의 맥을 짚었다.

김소원 역시 단전이 분해되고 있었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일단 쉬거라."

"근데요! 저기, 아저씨! 아니, 오빠!"

나는 김지원의 수혈을 짚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는 다치지 않게 등을 받쳐 천천히 내려놓았다.

도하나는 그 사이 절정 4명을 쓰러트린 후 의사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나도 그들을 심문을 하기 위해 그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향하려고 했다.

오싹.

살기가 느껴졌다. 솜털이 곤두섰다. 뒤였다. 우리가 들어온 출입구 쪽.

"쥐새끼들이…… 있었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심장의 펌프질을 가속해 전신의 피를 빠르게 돌리면서였다.

"그것도 아주 큰 쥐새끼가……."

구면이었다.

"친구를 바래다주고 오느라……. 환영을 못해줘서 미안하군."

"친구가 생겼다니. 축하한다. 사문을 배신한 개새끼 주제에 견덕(犬悳)은 꽤  많은 모양이구나."

"하하하……. 넌 여전하군……."

하긴 화경이 없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핵폭단이라는 것은 폭발적인 내공을 온전히 감당하고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초고수를 위한 물건이니까.

하지만, 이 자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

2m에 가까운 거대한 체구.

얼굴을 포함한 전신에 한 화려한 문신.

회색 트레이닝복 너머로 터질 듯 드러나 있는 근육은 내공 없이도 그 자체로 흉기에 가깝다.

합금으로 된 야구 배트를 쥐고 어깨에 걸치고 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느껴지는 기세가 맹수처럼 사납다.

그러나 한껏 술과 약에 취한 듯 얼굴은 빨갛고 눈동자는 풀려있다.

그 말투 역시 나른하다.

"소걸이 네놈 시체를 보면 좋아하겠구나. 선물 하나 해줘야겠다."

"소걸이 놈이 여기 왔나……? 그놈이 형님 거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립구나……."

"행여 소걸 앞에서 그 소리는 하지 마라. 간만에 그놈 화난 꼴을 보게 될까 무섭구나. 아니지. 그놈이 볼 때는 어차피 시체일 테니 말을 못 하겠구나."

자기 스승을 죽이고 도주한 개방의 수치.

타구봉법과 취권의 전수자.

개방의 장로 자리를 약속받았음에도 돈과 영약과 무공에 사문을 팔아버린 배신자.

취견자(醉犬子, Drunken dog) 홍수열.

그리고 8년 전 내공을 잃을 당시, 현장에 있던 화경.

그러고 보니 그때도 핵폭단 연구소를 파괴하러 갔다가 이놈을 만났었다.

"혹시 친구라는 놈이, 그 새끼냐?"

"하하……."

취견자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맞나 보군.

나는 냉정해졌다.

"빨리 죽어줘야겠다. 나도 오랜만에 그 친구가 보고 싶거든."

"네가…… 할 수 있을까?"

"홍가야."

"음……?"

"너는 나를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예전에 맞은 건 다 잊었느냐?"

뚝.

취견자의 몸이 잠깐 굳으며 계속 나른하던 취견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여간 술에 취하든 약에 취하든 무림을 살아가는 놈은 자존심에 사는 법이다.

"그때랑…… 지금이 같을까……? 내공이 한 줌도 안 된다던데……."

"걱정 마시오. 홍 선배."

나는 검을 쥔 채로 포권했다.

나보다 먼저 무에 입문해서 단 한순간도 내게 앞서지 못했던 천재를 비웃으며.

나는 천재에게 열등감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오랜만에 개처럼 구르는 기분을 맛보게 해주겠소. 옛날 생각나게 말이오."

"하하……. 이 개자식……."

파앗─.

문득 취견자가 달려들었다.

야구 배트 위로 한가득 봉강을 일으키고서.

콰앙─!

바닥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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