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 10. 자정의 부산(Midnight in Busan)(2) >
그날 밤.
나는 도하나를 3초내 도달 가능 거리에서 따라오게 둔 채 장산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소걸은 다른 일이 있다고 떠났다. 일문의 후계자란 바쁜 법이다.
대신 정한수의 얼굴은 숙지하고 뒤를 조사하기로 했다.
혹시 몰라 내공을 금제하는 점혈은 아직 유지 중이었지만 산공독은 효과가 거의 떨어진 상태였다.
만약의 상황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점혈을 풀고 바로 내공을 사용할 수 있다.
그래봤자 7년 분이지만.
병원 입구에는 장산대학병원 마크가 붙은 승합차가 하나 서 있었다. 병원 내에 끄나풀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오셨군요."
병원에서 만난 남자, 정한수가 나를 보자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나 말고도 다른 한 명이 마스크를 쓰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분은?"
"아, 저분은 저희 쪽에서 치료받고 있는 환자분의 가족입니다. 어쩌다 보니 이번에 함께 모시게 됐습니다. 타시죠."
우리는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환자의 가족? 실종자들과 연락이 됐던 건가?
그런 케이스는 못 들었는데.
그런데 그 가족이란 사람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눈치를 살피는 것이 아닌가.
마스크와 안경을 쓰고 있지만 그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눈에 익었다.
내 학생.
어제 휴학한 김지원이었다.
말 못 할 일이라 했는데 이번 일에 연관이 있었던 모양이다.
감이 옳았다. 하긴 화경쯤 되면 감은 자주 맞는 편이다.
"저……."
김지원이 내게 뭐라 말을 걸려고 하자 선수를 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산입니다. 네, 그 사람 맞아요. 사진은 죄송합니다."
이 상황에서 굳이 아는 사이인 것을 티 낼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다만 쓸데없는 말을 덧붙인 덕분인지 김지원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어쩔 수 없다.
절맥연구소가 대체 뭐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내 가치를 최대한 부풀려야 할 시간이었다.
정말 절맥 치료제를 연구하는 것이든, 핵폭단을 연구하는 것이든.
구음절맥으로 내공 기관이 망가져 버린 화경보다 좋은 실험 대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정한수가 문득 말을 걸었다.
"저 근데 김산 씨는 내공을 사용할 수 있으신가요?"
"아, 물론입니다. 많이는 못 합니다만."
정한수는 갑자기 내 손목 맥을 짚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반응하려는 몸을 겨우 멈췄다.
정한수는 볼 수 없었겠지만 그가 맥을 짚은 순간 반대편 주먹에 순간적으로 권기가 어렸다.
무심코 죽일 뻔했다.
고수는 타인에게 맥을 내어주지 않는다. 무인의 기맥은 너무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습적으로 맥을 노리고 출수한다면 자연스레 반응을 하게 된다.
김지원은 그 광경을 봤는지 동공이 커다래졌다.
"갑자기 맥은 왜?"
"아, 구음절맥이라 들어서 걱정이 돼서 그랬습니다. 위험한 상태인지 확인하려고요.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과연 내공이 거의 없는 수준이군요.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갑작스럽게 짚는다 해도 문제는 없었다. 내 몸을 순환하는 내공의 양은 실제로도 7년 분에 불과하니까. 점혈로 내공의 흐름을 제한한 현재는 1년 쯤으로 느껴질 것이다.
덕분에 신뢰를 얻은 듯 정한수가 좀 더 편한 얼굴로 웃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면서.
나는 이런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이놈과 그 뒷배가 더 의심스러워졌다.
이 상황.
도하나였다면 걸릴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내가 오는 게 맞았다.
생각난 김에 차창 밖을 살폈다.
건물 지붕들 너머로 도하나가 경공을 밟는 모습이 언뜻 스쳤다. 잘 따라오고 있군.
"언제쯤 도착합니까?"
"곧 도착할 겁니다."
정한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차는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부산의 지리는 잘 모르지만 높은 곳으로 가는 듯했다. 산인가?
어두운 산이었다. 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나무 몸대 사이로 얼핏 부산시의 야경이 스쳤다.
"다 왔습니다. 내리시죠."
"……여기요? 아무것도 없는데요?"
"하하, 아무것도 없다니요. 잘 보시죠."
정한수가 웃으면서 창밖을 가리켰다.
그러다 몸을 돌리며 품에서 단검을 꺼내 내질렀다.
"네 무덤이 여기 있잖……!"
"그러니까."
나는 손가락으로 단검 날을 툭 집었다. 순수한 육신의 힘이었다.
"아무것도 없잖아."
***
텅!
정한수는 기습이 막힌 즉시 단검을 놓고 차 문을 발로 차며 뛰쳐나갔다.
나도 느긋하게 그를 따라나섰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김지원에게도 나오라고 했다.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뭐 차에 폭탄이라도 설치되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상대가 내리면 따라 내리는 것이 안전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연기 잘 통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언제 알았지?"
"처음부터 의심했다. 맥을 내어줬을 때는 확신했지."
이런. 과한 연기가 오히려 독이 된 모양이다.
정한수가 손짓을 하자 주변 숲에서 인영 여럿이 튀어나왔다. 스물에 가까운 숫자였다.
절반가량이 초절정이었다.
배후가 작은 규모는 아닌 듯했다.
"깜짝파티를 준비하고 있었군. 추운 데서 기다리느라 다들 고생이 많았겠다."
"쳐라."
"믿는 구석이 고작 이거냐?"
정한수는 못 들은 체하며 뒤로 빠졌다.
일류가 초절정보다 상급자인 걸 보니 실제로 연구과장이나 비슷한 직위의 간부인가 보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 변경이다.
이 야산이 놈들의 근거지가 아닌 것은 확실하니까. 저놈들을 족친 다음 정보를 캐야겠다.
그래, 변장하고, 약한 척하고. 그런 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나도 이쪽이 편하다.
그냥 치고받고 싸우고 이긴 놈이 다 가져가는 거다.
클래식한 강호의 갈등 해결법이다.
나는 검을 꺼냈다.
혹시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제대로 챙겨왔다.
그동안 쓰던 당가검이나 목검이 아니었다.
화산신물.
──자하신검(紫霞神劍, The purple glow).
물론 레플리카다.
이런 잡범들을 상대하는데 진짜 신물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신병이기는 레플리카 역시 비싸고 단단하고 날카롭다는 점은 강조하고 싶다.
당문제철의 최상위 장인들이 혼신의 노력을 다해 벼려내는 것으로 한 자루에 수 억이 넘는 물건이다.
진짜의 '업'은 따라 할 수 없으나 검을 구성하는 재료와 짜임새는 진짜와 다를 게 없다.
놈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고 검진을 형성했다.
초절정이 가까이 서고 절정들이 후위에서 도움을 주는 형태였다.
고전적이지만 하나의 고수를 포위하고 상대할 때는 효과적인 수법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 정도 숫자의 초절정 고수들이 검진을 형성하고 버티기만 하면 나도 뚫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정한수를 놓치면 오늘 한 것은 다 허사가 된다. 다시 꼬리를 잡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정한수에게 여유가 있었던 것도 이해는 된다.
게다가 나는 김지원을 보호하면서 싸워야 하는 상황.
나 혼자라면 그랬을 것이다.
"나도 믿는 구석이 있긴 하거든."
그리고 3초.
콰쾅!
하늘에서 거대한 도기가 벼락처럼 내려쳤다.
"죽일까요?"
한순간에 바깥에서 포위하고 있던 절정들을 쓰러트려버린 도하나가 물었다. 저 검진의 약점은 외부의 공격에 약하다는 것이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이놈들이 죽을죄까지 지었을까?
한국의 법. 야산이라는 환경. 저들의 의도. 현재와 상황. 여러 가지를 저울에 매달았다.
야산으로 데려온 것으로 봐서 좋은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나뿐만 아니라 김지원까지 데려왔다는 것이다.
학생이 보고 있는데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김지원 역시 무인이고 성인이다.
무인으로 사는 이상 죽고 죽이는 것은 언제까지나 유예할 수는 없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숫자 좀 줄여."
***
삐이이이이이─.
"취소 취소. 죽이지 마."
나는 도하나가 첫놈을 죽였을 때 살인에 대한 허락을 거뒀다.
놈들은 생체 신호에 감응하는 경보 장치를 차고 있었다.
생체 신호가 멎는 즉시 경고음이 울리며 중앙 시스템으로 정보를 보내는 장치.
보통은 군 시절이나 재벌들의 별장 따위에서, 경비원들이 근접전을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다. 총기에 의한 기습을 억제하기 위해서.
여기서 놈들을 다수 죽인다면 본대가 물건을 정리하고 철수할 게 뻔했다. 최대한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쪽으로 가는 게 맞았다.
"네, 사형."
도하나가 인형 같은 눈동자로 방글방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뺨에는 방금 튄 핏물이 묻어 있었다.
내가 다 무섭다, 야.
도하나가 단발을 휘날리며 다시 달려들었다. 초식 동물을 사냥하는 사자처럼.
도하나의 경지는 초절정의 끝.
내공은 두갑자 이상. 화경에도 밀리지 않는다.
거대한 도에서 나오는 무거운 도격은 하수에게 매 순간 치명적이다.
나야 뭐 말할 것도 없다. 한 번 휘두를 때 팔다리를 하나씩 날렸다.
검진이 깨진 이상 초절정이 몇이든 큰 골칫거리가 못 된다.
상황을 정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한수는 도망도 못 가고 주저앉은 채 다리를 벌벌 떨고 있었다.
일류 범생이가 보기엔 다소 잔인한 장면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리 지원이는 어떻지?
다행히도 놀란 것 같기는 했으나 겁에 질린 기색은 없었다.
"나, 나를 죽이면 안 된다! 내가 죽으면 소장님은 저, 저 아이의 동생! 그리고 실험 대상을 다 죽이고 철수할 것이다!"
"알아 알아. 안 죽여."
내가 진정하라는 듯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다가가 정한수의 턱관절을 뽑았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서.
"넌 아는 모든 걸 토해내야 할 거야. 지금부터 너의 근육을 찢고 뼈를 뒤틀어버릴 거다[分筋錯骨]. 혹시 뭐 말할 준비가 되면 울어."
"으, 으양 마하게! 마하게으이아!"
"울어야 네 진심을 믿지."
빠드득.
"으, 으으으으으으!"
콰드득.
"으아아아아아!"
***
축 늘어진 정한수를 놓아줬다.
"끄윽……."
정한수는 온몸에 피멍이 든 채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설마 본거지가 병원이었을 줄이야. 등하불명이라더니."
"그리고 이 자는 정확히 모른댔지만 설명을 들으면 핵폭단이 맞는 거 같아요."
정한수의 설명에 따르면 실종자들과 실험실 자체가 병원 지하에 있다고 했다.
다만 지하실의 문은 내부에서 열어줘야만 열린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살려서 데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한수는 정말 자신이 절맥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약효는 있지만 복용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가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실종자들 중 이미 절반이 죽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열화 된 핵폭단에 불과했다.
진원진기를 서서히 분해하는 대신 서서히 죽어가는.
"바로 가요?"
"그래, 오늘 밤이 지나면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상태는 어떠냐?"
"멀쩡해요. 내공도 8할은 남았어요."
"가자."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김지원이 내 앞에 섰다.
"교수님! 거기 제 동생이 있어요. 동생을 구해주세요! 교수님……. 제발……."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나는 따로 해줄 말이 없었다.
"동생 이름이 뭔데?"
"소원이요! 김소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최선을 다 하마."
"사형, 저건 어떡하죠? 치료할까요? 저대로 두면 죽을 거 같은데요?"
도하나가 정한수를 가리켰다.
"흠. 어쩔 수 없지. 생체신호 표시기가 있잖아."
나는 정한수를 일으켜 세웠다.
***
장산대학병원 지하 2층.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곳.
외알 안경을 쓴 노의사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닥터."
"예, 옛!"
누군가의 나른한 목소리에 노의사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나는 이만 가도록 하지. 밤이 늦었군."
"아, 알겠습니다."
"혹시 불상사가 생긴다면……, 저것들은 계획대로 처리하도록."
"존명!"
사내는 케이지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보다가 잠깐 보다가 느긋하게 자리를 떠났다.
케이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의식을 잃은 채였다.
깨있는 사람들도 복통이 심한지 표정을 찡그리고 배를 붙잡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사내가 떠나고 30분 정도 지났을 때.
노의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생체신호 표시기에 반응이 왔다. 가까웠다.
정한수에게 붙여준 고수들의 생체도 한둘을 제외하곤 다 멀쩡하니 아마 무사히 처리한 모양이다.
하긴 화경이니 어쩌니 해도 옛말.
자신이 진맥한 결과, 절맥은 아니라도 내공이 거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노의사가 신기한 것은 내공도 없는 그 퇴물 화경이 천급 낭인으로 활동할 만큼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분'이었다.
만약에 그분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초절정을 10명씩 보내는 과투자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사가 보기에 그 화경은 구음절맥이나 그게 아니더라도 그에 비할 만한 반송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역으로 이곳까지 털렸을지도 몰랐다.
"어쩌다 후레자식(Bastard) 같은 놈이 붙어서는 말이야……. 그래도 이젠 한숨 돌렸군."
똑똑.
지하실 문이 두드려졌다.
노의사는 화면을 확인했다. 정한수의 생체신호 표시기. 심박수는 평온했다.
밖에서 먼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맞았다.
노의사는 웃으며 나머지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었다.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하하하, 연구과장. 고생했네."
"고생하긴 했지. 알아줘서 고맙네."
노의사가 멈칫했다.
"의사 양반. 또 보는군."
지하실 입구로 들어오는 사람은 두 명.
하나는 낮에 본 화경이었고, 하나는 거대한 도를 패용한 단발머리 계집이었다.
정한수는 없었다.
"어떻게……?"
두근─.
그제야 노의사는 화경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산의 손에 쥐어진 채 그의 의지에 따라 박동하고 있는 생체신호 감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