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 8. 이신(Yi sin) >
원지혜가 8살이 되었을 때, 이신을 처음 만났다.
이신이 막 청룡검법의 전수자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가문의 어른들은 원주원가는 덕수이가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했다.
원주원가와 덕수이가 충무공파.
원균과 이순신.
각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선조들은 한 시대를 향유했다.
그러나 위상이 달랐다.
한쪽은 큰 기회를 수없이 날려버린 패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나라를 지킨 조선 유일의 화경이었다.
그렇다 한들, 500년 전의 빚이 아직 남아있단 말인가.
원지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무튼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잖아.
그건 마치 현존하는 빚이 아니라 가문 자체가 벗어날 수 없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원지혜는 빚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가문의 열등감은 그대로 계승했다.
순전히 재능의 차이였다.
원지혜는 수재였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인재라고 했다. 가문의 보석이라 불렸다.
그러나 '진짜' 앞에서 보석은 빛이 바랬다.
이신은 천재였다.
파조 이래 제일의 재능이랬다.
원지혜가 보석이라면 이신은 별이나 달, 태양, 뭐 그런 거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원지혜는 단 한순간도 이신을 이기지 못했다.
원지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에 매진했다.
그러기를 몇 년 마침내 같은 수준에 도달했다.
이신보다 살짝 늦긴 했지만 원지혜도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에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따라잡았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신은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지금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면, 절정은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이신과 원지혜는 자주 만났다. 많이 겨뤘다.
이신은 항상 웃는 듯 마는 듯 아주 작은 미소를 지으며 어울려 주었다.
원지혜가 일류일 때는 일류로서. 원지혜가 절정에 오르고는 절정으로서.
'왜?'
원지혜가 알기로 이신은 작년에 절정에 올랐다.
원지혜가 아는 것은 틀렸다.
이신은 원지혜를 속였다.
그 의도가 동정심이든 배려든.
원지혜는 비참함을 느꼈다.
***
이신은 천재였다.
얘 진짜 잘 치네.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신이 사용하는 무기는 긴 장검이었다.
'긴 장검'이라는 표현이 이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랬다. 사실 장검보다는 기병(奇兵)에 가깝다.
총 길이는 2m가 넘었고 손잡이 부분만 30cm 가량 됐는데, 무게도 무게겠지만 검신이 너무 길어서 중심을 잡기도 어려워 보였다.
이신은 그 장검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몇 번 대치해 보니 이신이 사용하는 검술에 대한 감이 왔다.
청룡검법.
무리(武理)를 깨우치고 내공을 다스려 초고수의 경지에 이르려는 무공이 아니었다.
삼재종합공과 마찬가지로 갈고 다듬어진 출중한 살인 기술에 가까웠다.
하긴 근본이 전쟁 검술이라고 했나.
30cm가 넘는 긴 손잡이를 쥐는 위치를 수시로 바꾸며 거리 감각을 속이려 들었다. 그러면서도 위치 전환이 깔끔하고 정교했다.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며 찌를 때는 검이 갑자기 날아오는 듯했다. 검보다는 총이나 활 같은 원거리 병기를 상대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검격, 기공, 보법에 재기까지 모든 측면에서 오늘 상대한 학생들 중에서 비할 바가 없었다.
초절정이라는 경지의 문제가 아니라, 전투 센스 자체가 다른 애들과 달랐다.
애초에 검술 자체가 센스가 부족하면 익힐 수 없는 종류의 무공이었다.
가르칠 맛 나겠네.
파악을 마친 나는 목검에 검기를 담아 이신을 물렸다.
이신이 순간적으로 검화까지 피워올렸으나 멀리 튕겨났다.
이신은 조금 흥분하고 검술에 심취한 듯했다.
"……?"
"여기까지. 실력은 충분히 봤다. 훌륭하군."
이신은 잠깐 멍하니 있다 이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원지혜의 옆으로 갔는데 원지혜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이신을 피했다.
나는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은 첫날이니 일찍 마치도록 하겠다. 내일은 아침 9시에 실내에서 수업한다. 특이사항이 있으면."
면면들을 쭉 둘러보았다. 연락 담당이 필요했다. 딱히 할 일은 없겠지만 일이 생긴다면 귀찮을 거다.
괜히 밉상인 원지혜를 지목했다.
"과대에게 연락한다. 과대는 원지혜가 맡는다."
"예? 왜 제가……!"
나는 원지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해요.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내 전화번호는 다음과 같다. 다들 저장하도록. 이상. 해산."
나는 연무장으로 뒤로하고 교수 연구실로 향했다.
밥을 시키고 도하나와 실력 테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도하나는 당수련이 너무 달라붙는 것만 말고는 특별한 사항이 없었다고 했다. 이신도 도하나와 붙을 때는 그냥 절정처럼 행동했다고.
당수련. 걔는 대체 뭘까……. 날 때린 건 니가 처음이야. 뭐 그런 건가?
당초아에게 당수련에 대해서도 물어봐야겠다. 그냥 막 대해도 되는 건지, 조심해야 되는지. 문자를 보냈다.
금세 배달 온 점심을 먹던 도하나가 문득 물었다.
"사형, 우리 근데 오늘 저녁 뭐 먹어요?"
하나야, 이제 정오거든? 그리고 너 아직 밥 먹는 중이잖아.
***
김산과 도하나가 연무장을 떠나고 나서도 이신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빈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아쉬웠다. 그 감각. 조금 더 느끼고 싶었는데. 전율이 일었다.
이신이 초절정에 오른 것은 작년 말.
이후로 전력을 다한 것은 처음이었다.
가문의 어른 중에 초절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년의 고수라 해도 이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청룡검법을 극한으로 사용하면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기가 더 힘들었다. 원지혜를 상대할 때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교수…… 님은 달랐다. 화경의 고수를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원지혜에게 듣기로는 내공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신기하게도 검기가 담긴 일격까지 술술 쳐냈다. 속임수를 섞고 길이를 극한까지 조정해도 모두 받아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힘들어하는 원지혜를 보기가 힘들어 상황에 끼어든 것이었지만 김산과 검을 맞대면서 이신은 점점 신이 났다.
최선을 다해도 되는 상대를 찾았다. 오랜만에 검을 휘두르는 것이 즐거웠다.
딱히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원지혜가 여기 온다고 해서 따라온 거였는데.
저 멀리 벽이 보였다.
벌써 벽을 찾아냈다.
그 사실이 반가웠다.
초절정에 오르고 나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는데, 올바른 방향이 보였다.
벽을 향해 가면 된다. 벽에 닿고 나면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신도 자기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야, 너 왜 끼어들었어."
"어?"
정신을 차리니 원지혜가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불쌍해 보였어?"
"아니. 그냥 힘든 거 같아서……."
"그리고 초절정이라고? 너 나랑 비슷하게 절정 된 것처럼 말했었잖아."
"……그게."
네가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열등감을 느낄까 봐. 그 모습을 보기 싫어서.
그러나 그 말 역시 원지혜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기에 이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할 걸 아니까.
"흥. 됐어. 너랑 안 놀아."
원지혜는 그게 무슨 큰 형벌이라도 되는 양 코웃음을 치며 떠났다.
이신은 그 뒷모습을 보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까 내가 너를.
***
다음날 9시.
자율무공학부의 전용 건물 독접관.
본인이 이사장이면서 무슨 교외 고수에게 후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뻔뻔하게 자기 별호를 붙여놓은 당초아의 자신감이 두드러지는 이름이었다.
수업은 독접관 2층의 작은 건물에서 진행되었다.
오늘의 수업 1교시. 무림사학.
주제는 화경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화경이 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 하지만 여러분들은 화경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럴 만도 하다. 옛 무림에 비해 화경이 많은 시대라지만 아직도 현존하는 화경은 400명 언저리에 불과하니까."
70억 분의 400.
학생들은 집중했다.
무공을 업으로 택한 이상 세상에 화경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 무인은 없다.
"화경이라는 경지와 명칭 자체는 몇 백 년 전부터 있었지만 화경과 그 아래의 경지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분석이 나온 것은 몇 십 년도 되지 않았다."
"1980년대 당시 '천뇌'라 불리던 제갈세가의 제갈천심은 최초로 화경의 신체구조를 완전히 분석하는데 이르렀다."
"제갈천심이 꼽은 화경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환골탈태를 하고 그를 통해 신체에 신경망 대신 기 신경계를 형성할 것."
"기 신경계가 왜 중요한지 아는 사람?"
대답이 없었다.
"과대?"
"……반응속도가 빨라져요."
"맞다. 인간의 신경계가 생체 내의 전기 신호를 전달하는 속도는 느리지 않지만, 초고수 간의 접전에서 이루어지는 속도에 반응하기엔 너무 느리다. 또한 원거리 공격에 있어서도 그렇지."
"그러나 기 신경계가 형성되고 신경계와 기경팔맥을 연결하면, 상대의 공격을 감지한 이후 기 신호를 통해 거의 즉각적인 반응을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혈류 속도를 조종해 고속으로 움직였을 때 시야가 어두워지는 블랙아웃 현상도 방지할 수 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현대 무림에서 이 즉각적인 반응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
"총 때문이다. 총."
"날아오는 총알을 보고 쳐내는 것은 절정의 고수에게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등 뒤에서의 기습적인 총격이나 한꺼번에 날아오는 공격, 소리가 한참 늦을 정도의 초장거리에서의 저격 등을 막는 것은 기 신경계로 반응 속도를 극한까지 올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한국에 사는 여러분은 와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외국에서는 총 맞고 죽어나가는 절정, 초절정의 고수가 부지기수다. 까놓고 말해 전쟁터에서 총을 쓰지 않는 무인은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천뇌는 이러한 신경계와 기경팔맥이 연결된 화경은 명백히 현생인류로부터 진화한 다른 종이라고 주장하며 '호모 수페리오르(Homo superior, 넘은 인간)'라고 명명했다."
"이 외에도 화경에게는 강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 근처의 기를 자유롭게 수발할 수 있을 것 등이 요구된다."
"실제로 존재하기는 힘들겠지만 이 세 가지 조건만 충족시킬 수 있다면 무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화경이라 부를 수 있다는 거다."
"질문 있는 사람?"
잠깐 정적이 돌았다. 그러다 정이삭이 손을 들었다.
"그럼 화경은 어떻게 상대해야 하죠?"
"좋은 질문이다."
나는 한번 고개를 끄덕여주고 답을 주었다.
"너도 화경이 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