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 7. 첫 수업(First lesson) >
내가 주목하고 있는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수석 정이삭.
지리산 출신.
무슨 출신이 지리산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진짜 그렇게 적혀있다.
지리산에서 여러 기인들에게 사사했다고 한다.
하긴 지리산이라고 하면 한국의 대표적인 명산이고 영기가 뚜렷한 만큼 폐관 수련의 명소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미소를 머금어 한결 여유 있어 보였다.
왼손잡이 검수. 경지는 절정.
삼재종합공 및 확인되지 않은 여러 무공을 익혔다고 한다.
잘 모르겠다. 그렇게 뛰어난가? 이것저것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차석 이신.
덕수이가 충무공파 청룡검법 전승자.
덕수이가는 대한민국 삼대세가 중 하나다. 그 안에서도 축복받은 재능이라 불리며 방계임에도 불구하고 청룡검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차분한 눈빛. 바른 자세. 건장한 체구. 등 뒤에는 2m가 넘는 장검을 매고 있었다.
경지는 절정이라고 적혀 있지만……. 저게 고작 절정이라고?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되는 인물이다.
다음으로 삼석이자 날 퇴물이라고 불렀던 원지혜.
원주원가의 보석이라 불린다 한다. 가문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라고.
자신감에 찬 눈빛. 긴 키에 머리를 거칠게 땋아올렸다. 자세가 곧고 팔다리가 길었다. 무공에 적합한 신체.
혹자는 자신감이 보기 좋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나한테는 아니었다.
경지는 절정. 장창을 다룬다. 긴 팔다리와 어우러져 타격 가능 거리가 상당히 길 것으로 보였다.
암왕 당기백의 손녀 당수련.
접때 일류 몇에게 공격당하고 있던 생머리 여자.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거기다 당가의 인물. 암왕의 손녀라니 조심하고 볼 일이다. 이런 인물의 배에 주먹을 갈긴 도하나의 명복을 빌어줘야 하나?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와 도하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때리고 맞은 사이인데 뭐가 반갑다고……. 아닌가? 범인을 찾아서 할아버지에게 이를 생각에 신난 건가?
당초아와는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다.
무공은 특별할 것 없었다. 일류 수준. 특이한 게 있다면 검수라는 것 정도?
당가의 검이 유명하긴 하지만 그건 파는 물건이었지 무공이 아니었다.
그때 본 것만 해도 검에 대한 적성이 뛰어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 외에는 다 일류였다.
전체적으로 작은 세가의 인물들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대문파나 거대세가 같은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인재를 수급하고 교육할 체계가 완성되어 있다. 굳이 최고 수준의 유망주를 외부 교육 기관에 보내 정보를 노출시킬 필요가 없다.
나 역시 6살에 화산파에 입문한 이후 약관이 되기까지 화산파 내부에서만 활동하며 자라왔다.
그래도 여기 있는 자들 역시 동년배 중에서 뛰어난 편인 것은 분명하다.
"실력 테스트는 간단한 비무로 확인하겠다. 각자 나나 조교 중에 상대하고 싶은 쪽을 골라서 줄을 서도록. 만약 승리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이번 학기 전 과목 A+를 보장하겠다. 그 외에도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평가에 반영할 것이다."
뜻밖이었는지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얼핏 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개꿀 어쩌고저쩌고.
얘들아. 설마 니들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는 거니? 진짜 혼날래?
나는 나머지 학생들은 신경 쓰지 않고 원지혜만 바라보았다. 넌 제발 나한테 덤벼라.
잠깐 동안 나와 도하나를 번갈아보면 고민하던 원지혜는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는 도하나가 만만해 보였는지 그쪽으로 갈 낌새가 보였다.
하긴 도하나가 키는 크지만 몸이 여리여리해 얼핏 보기엔 약해 보일 수 있었다.
"참고로 여기 있는 도하나 조교의 경지는 초절정이다. 거기다 등짝에 매고 있는 사람 몸뚱이만 한 태도를 자유자재로 다루지. 손속에도 자비가 없는 편이기 때문에 결정하는 데 있어 신중하기를 바란다."
"사형!"
내가 덧붙인 말에 도하나 앞에 몰려들던 학생들이 슬그머니 물러나 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내 앞에 선 학생은 5명.
내가 주목하던 인물 중에선 수석 정이삭과 삼석 원지혜가 왔다.
보아하니 차석 이신은 초절정과 겨뤄보고 싶었던 모양이고, 당수련은 무슨 도하나의 팬미팅이라도 온 분위기였다.
아무튼 원지혜는 낚였다.
"마지막으로 바꿀 기회를 주겠다."
"왜요? 교수님, 자신 없어요?"
"……너는 나한테 한 수만 적중시켜도 아까 말한 보상을 다 주마."
"진짜요? 감사합니다!"
뭐가. 뭐가 감사한데? 너는 진짜…….
요즘 나를 물로 보는 것이 왜 이렇게 많을까. 역시 사람은 명성이 중요한 모양이다. 검룡 시절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하지만 안목 없이 명성에 의존하는 자들은 결국 단명할 하수일 뿐. 하수의 평가는 다 무효다. 나는 괜찮다.
"자, 시작하겠다."
***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정이삭.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우렁차게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역시 수석은 다르다. 예의가 바르다.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달까. 이미 합격이다.
"들어오도록."
나는 목검을 까딱했다.
정이삭의 눈빛이 바뀌었다. 머금고 있던 미소도 사라졌다. 진중한 태도.
왼손에 들고 있는 칼을 가슴 쪽으로 당긴 자세. 각도가 다소 방어적이다. 명명백백 나를 고수로 여기는 모양새였다.
"가겠습니다."
정이삭이 검기를 뿜으며 달려들었다. 검기가 상당히 안정적이다. 현란한 보법을 밟으며 다가온다.
삼재보는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쾌속한 움직임과 더불어 현기가 느껴졌다. 점창인가? 달려들어와 칼을 쭉 뻗는다.
검날이 낭창하게 휘어지며 내 명치를 노린다. 검술도 상당하다. 검격의 속도와 각도가 치명적이다.
삼재검으로 보이지만, 역시 왠지 점창이 느껴진다.
기인에게 사사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점창 출신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렇게 십몇 수쯤을 더 받아주다가 목검으로 가볍게 정이삭의 검을 튕겨냈다.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정이삭이 전력을 다한 것 같지는 않았다. 호흡이 안정되어 있었고 숨기고 있는 수도 많아 보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감은 잡았다.
"검격 사이사이 대기 자세가 너무 수비적이다. 고수를 상대할 때 조심하는 것은 나쁘지 않으나 수비만으로 고수를 이길 수는 없다. 익힌 검 역시 나아가는 쪽이 적합한 듯하니 호흡을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
"아……"
정이삭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탄식을 내뱉었다. 이내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후 나머지 셋을 상대했다. 그 사이 도하나는 일곱 모두와 대련을 마친 상태.
실력은 제대로 평가하고 훈수는 해줬나 모르겠다. 이신 역시 제 실력을 다 드러내지는 않은 것 같았다. 쟤는 확인해 보고 싶은데.
이신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조금 다르다. 시선이 미묘했다. 시선의 끝에는 원지혜가 있었다.
원지혜는 표정이 좀 굳은 채였다. 아무리 못 쳐줘도 자기랑 실력이 비슷한 정이삭을 내가 무리 없이 상대한 상황.
퇴물이라고 말한 거야 귓속말이라 내가 못 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아까 도발이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었다.
이젠 본인이 퇴물을 상대할 차례였다.
"교수님? 그 살살……"
"너는 한 수다. 기억하지?"
"음, 어, 예."
원지혜가 표정을 다잡는다. 무인다운 태도. 그래, 뭐 한 수쯤이야 어떻게든 운만 따라주면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안 되면 어때. 교수가 날 죽이기야 하겠어? 그런 표정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무인은 그래야지. 애가 그래, 자신감이 넘칠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안목 없이 자신감만으로 나대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교수의 역할이다.
적당히 하자.
다만.
"도 조교를 상대한 학생 중에서 본 교수와 겨뤄보고 싶은 학생이 있으면 껴도 좋다."
낄 여지는 줬다.
"갑니다!"
"음."
원지혜는 전형적인 창수였다.
긴 사거리를 기반으로 일방적으로 공격해 이득을 보려는 스타일. 거리 감각과 보법이 중요하다.
꽤 재능이 있긴 했다. 문제는 나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통통 튀는 발재간은 꽤 재치 있었다. 삼재공과 가문의 무공을 함께 익힌 모양이다. 나아갈 때는 쾌속했고 물러설 때는 안정적이었다.
공격의 위력이 부족했다. 창기 역시 밀도가 낮고 불안정했다. 절정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이것밖에 안 되나?"
나는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원지혜의 공격을 걷어냈다. 검기를 내뿜을 필요도 없었다. 저 정도 수준 낮은 검기는 완력과 각도, 그리고 목검이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기 주입만으로도 충분했다.
실력 파악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 시점부터는 팔에 힘을 더했다.
"꺅!"
나를 공격한 원지혜가 오히려 튕겨나갔다. 탄의 묘리로 강하게 튕겨낸 결과였다.
"그만?"
"좀만 더 해볼게요."
원지혜는 이를 악물고 계속 달려들었다. 달려들 때마다 본인이 날아가면서 말이다. 한 수만.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면서. 온몸은 이미 흙투성이였다.
멍청했다. 이미 안 되는 것을 알았을 텐데 말이다. 저건 그냥 오기였다.
"……."
하지만 나는 저런 오기를 사랑하는 편이다.
물론 나라면 좀 더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 봤겠지만. 그건 내가 가르치면 되는 거다.
오기와 승부욕이 없는 무인은 나아갈 수 없다. 그게 넘치면 객사할 수도 있지만 부족한 것보다는 낫다.
원지혜가 몇 번 더 날아갔을 때, 숨을 헐떡이면서도 다시 달려들 때, 다음 타격 순간에, 창과 목검 사이에 장검 하나가 끼어들었다.
"제가 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이신이었다.
***
이신이 끼어들고 원지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짜증이 났다. 뭔데. 니가 왜.
정신엔 열이 올랐지만 육신은 지쳤다. 몸이 더 이상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관절이 삐걱거렸다. 그만큼 저 교수를 상대하는 것은 힘이 들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이신이 실제로 원지혜보다 낫다는 점이었다. 아니, 낫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김산 교수는 정이삭이나 원지혜를 상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움직이는 속도부터 공격하는 간격까지 모두 달랐다.
'왜? 쟤하고 내가 뭐가 다른데.'
이신은 교수의 공격을 받으면서 점차 몰리고 있었다. 연무장 끝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교수는 끝없이 계속 내려쳤다. 심지어 그 공격의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원지혜의 그 생각은 곧 멎었다. 이신이 김산의 공격을 처음으로 받아쳐서 튕겨냈을 때.
멍한 귓가로 감탄하는 듯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래도 네가 절정이라고?"
이신의 길고 긴 장검에 검기가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검화였다. 검강이 되기 직전의 검기.
초절정의 증거.
같은 나이 스물.
원주원가의 보석, 원지혜는 절정의 초입이었다.
그리고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이신은 초절정.
원지혜는 커다란 벽을 마주하고 숨이 막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