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 5. 삼천포 달밤(Samcheonpo moonlit night) >
5. 삼천포 달밤(Samcheonpo moonlit night)
달이 밝은 날이었다.
초절정이 둘, 절정이 넷.
초절정 한 명은 빈 손이었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똑같은 검을 들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렸고,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검. 당문제철의 클래식. DK-47이었다. 아무 수식없이 당가검이라고 하면 보통 저 검을 의미한다.
적당한 길이와 무게감, 훌륭한 내구성을 갖춘 만큼 검수라면 한 번쯤은 사용해보기를 권장하는 검이다.
오늘 밤에 못된 짓을 하고 싶은 무인에게는 꼭 필요한 준비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소싯적에는 좀 써봤다.
오밤중에 수상쩍은 행색으로 당가검을 챙겨왔다는 점에서 저들의 의도가 심히 불순해보였다.
다만 이 경우 주의가 집중되는 것은 오히려 빈 손인 한 명이었다. 권사일까? 배후가 당가의 다른 혈족이라면 실력 있는 암수일 수도 있다.
저들은 사방에서 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도하나는 히죽거리며 당초아를 데리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당초아는 거의 정신을 잃은 것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명색이 당가 직계라는 양반이 독주 칵테일 좀 마셨다고 저래도 되나? 저 양반이 얘들한테 사주하고 모른 척 하는 거 아니야? 실력 테스트인가?
하여튼 당초아도 수상한 인간이었다.
다시 상황으로 돌아와서.
초절정이 화경을 상대할 수 있는가?
그건 오래 전부터 많은 무학자들의 고민거리였다.
숫자가 많다면 가능한가? 수적 우위로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아야 하는가? 진법을 짜서 상대한다면?
결론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아주 힘들다는 것이었다.
환골탈태를 거친 무겁고 빠르고 강건한 신체.
기 신경계(氣 神經系, Ki nervous system) 형성에 따른 초월적인 반응 속도.
대가의 경지에 오른 무공 이해도.
수준 높은 전투 경험.
그러한 점들도 화경의 무인이 하수에게 우위를 차지하게 만드는 요소이긴 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화경과 초절정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강기(罡氣)다.
강기로 형성되지 못한 기운은 어떤 상황에도 강기를 침범할 수 없다.
따라서 화경의 무인에게 강기를 사용할 여력이 있는 이상, 그 이하 무인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는 무의미하다.
그것이 과학이 발전한 현대에 들어서도 화경의 무인을 비대칭 전력으로 만드는 가장 큰 요소다.
문제는 강기는 내공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다는 점에 있다.
화경은 문파의 간판이다.
지원을 받아 든든한 영약도 자주 먹고, 문파가 보유한 상승 심법으로 오랜 기간 수련하고 나면 두 갑자 분량의 내공을 형성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 보통의 화경마저 강기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하지는 못한다.
내력을 다 소모하고 나면?
강기를 사용할 수 없는 화경은 숫자로 찍어누를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럼 내 경우엔 어떨까?
내 단전에는 세 갑자가 넘는 내공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은 반의 반의 반 갑자 수준.
검강을 꺼내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유지할 수가 없다.
반쪽짜리 화경. 그 말이 맞긴 하다.
실제로 만약 내 내공이 묶인 직후 상태에서 지금 상황을 마주했다면 나는 저들에게 당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8여년 동안 나는 부족한 내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구른 결과 해법을 찾아낸 상태다.
"주화입마에 걸려 내공을 잃었다지?"
"비슷해."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딱히 비밀은 아니었다. 고무림 블랙에 접근할 만한 위인들은 진작부터 대충 알고 있었을 거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스무살부터 내 이름이 세계에 알려진 만큼, 내가 은거한 이후 행적에 대한 찌라시들이 많이 돌았으니까.
은거 직후엔 소걸 놈이 내가 죽었다는 헛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온 적도 있다.
죽었다, 주화입마에 걸렸다, 광인이 되었다, 마교에 귀의했다, 오늘부터 화산마검이다, 어쨌다 저쨌다.
대체로 내가 정상은 아니라는 소문이었고 실제로도 정상이 아니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 같은 하수들한테 쫄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이놈……!"
"얼른 들어와라. 빨리 치우자. 기숙사 통금 있는데 늦겠다."
"죽여버린다!"
"집중해서 한꺼번에 친다.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검강을 한 번은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말 잘 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천천히 해. 사실 통금은 학생들만 있다. 나는 여유로워. "
발끈한 초절정을 다른 초절정이 말렸다. 빈 손인 자였다.
저놈이 머리인가? 일단 확인해두고.
"근데 술을 마셔서 그런지 잠이 오긴 한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그 말을 기점으로 여섯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것을 보면 암기는 아닌가? 확신할 수는 없다.
"검강을 한 번은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
내공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난 먼저 검술 자체를 갈고 닦았다. 원래도 대가의 경지에 있었던 검술은 깊이를 한없이 더해 현묘한 수준에 이르렀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현경을 제외하면 순수 검술로는 맞수가 없지 않을까?
나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는 동시에 아무런 기가 담기지 않은 검으로 절정 녀석의 검 하나를 흘려내 두 명과 꼬이게 만들었다. 이화접목의 한 수. 완력과 무게 배분만으로 만들어낸 성과였다.
"큭."
"뭐하는 거냐!"
직후 몸을 돌리면서 발목을 후려차 다른 절정 하나를 쓰러트렸다.
"억."
이들에겐 힘쓸 것도 없다.
남은 것은 초절정 둘.
열이 뻗칠대로 뻗쳤는지 초절정 하나는 검기를 한껏 피어올리고 있다. 한껏 이지러지는 게 검화(劍火)의 수준에 가깝다. 노력하면 나중에는 화경에 오를지도 모르겠다. 계속 정진하도록.
다른 하나는 아직까지도 출수하지 않고 있다. 끝까지 수법을 감추려는 모양이었다.
일단 다른 쪽부터 처리하자.
나는 검화를 피워올린 초절정을 상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아무런 기도 담지 않은 채.
그리고 검화와 검이 통째로 베였다.
"……뭐?"
검이 잘리자 당황한 초절정의 배를 그대로 걷어차 기혈을 진탕시켰다. 점혈의 묘리를 섞은 각법이었다. 당분간이라도 내공 없는 설움을 느껴봐라.
다른 초절정 하나는 그 광경을 보는 즉시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좋게 보면 신중한 거고, 나쁘게 보면 겁쟁이고. 다만 상대가 나인 만큼 똑똑한 판단이군.
"……어떻게 한 거지?"
"몰라도 돼."
알아도 못할 거고.
내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번째. 기껏 7년분인 내공을 두 갑자처럼 쓰는 법. 한 줌밖에 없는 내공으로 전투 내내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법.
일단 강기는 최대한 가늘고 짧고 얇게 사용한다.
그리고 타격 순간에만 강기를 뽑아내 사용하면 된다.
타격 지점에서 0.2초 정도 강기를 유지한다. 그때 소모되는 분량의 내공은 운기 없이도 10초면 회복된다.
어렵다.
나도 처음 발상부터 실제 사용까지 아주 많은 연습을 했고, 다시 그걸 체화하는데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다.
뱃속에 내공을 두 갑자씩 품고 다니는 다른 화경은 어려움을 감수하고 배울 필요가 딱히 없는 테크닉이다. 그 시간에 내공 총량을 늘리고 화력을 키우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해야만 했다.
아무튼 검강을 한 번 정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저치의 말은 틀렸다.
똑같이 강기를 사용하는 화경 무인이 아니라 하수를 상대라면.
나는 상황과 운용에 따라 검강을 만 번도 쓸 수 있다.
***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숨겨진 한 수가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저기 벌벌 떨고 있는 이사장 님 비서도 하겠다. 초절정 경지가 부끄럽구나."
"……전력을 다 하마."
무슨 일대일생의 숙적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중얼거리는 꼴이 우스웠다.
아니, 고기에 반주하던 사람들한테 쳐들어와놓고 뭐 그렇게 진중하대.
"간다!"
초절정은 다시 달려들었다. 그새 상태를 정비한 절정 셋과 함께였다. 하나는 발목이 부러졌는지 초절정 검수 옆에 누워있었다.
근데 그렇게 당하고 또 달려드는 건 뭘까? 학습 능력이 없나? 이런 놈들이 학생이라면 교수 생활이 좀 고달플 것 같다. 그래도 절정, 초절정이면 무공 지능이 나쁜 편은 아닐 것인데……. 역시 지능과 무공 지능은 별개다.
나는 검으로 절정들은 대충 걷어내고 초절정에게 집중했다. 절정들은 차에 치인 고라니마냥 튕겨나갔다.
초절정은 홀로 가까이 와서야 자세를 잡았다. 오호라. 제대로 익힌 삼재종합공이었다. 그 중에서도 검보다 공수(空手) 쪽에 치중한 모양이다.
삼재종합공이 뛰어난 무공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상호간에 초식을 파악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에 결정 순간까지 최대한 숨기는 것은 괜찮은 판단이다.
나는 정교수가 된 기념으로 한 수 가르쳐 주기로 했다. 교육자 체질인 것 같기도 했다.
"뭐?"
초절정이 가까이 근접했을 때 나는 검을 하늘 위로 던졌다. 그리고 똑같이 박투로 응수했다.
초절정의 삼재권. 강력한 권기를 머금고 사선 방향에서 휘둘러온다. 맹호비산(猛虎飛山)이었다. 나도 똑같이 휘둘렀다. 내가 더 빨랐다. 피하면서 상대의 턱을 갈겼다.
"큭."
뇌진탕이 왔는지 동공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초절정은 내 발등을 밟으려 들었다. 삼재각 암압(巖壓)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피한 다음 내 발이 있던 위치에 놓인 초절정의 발등을 찍었다.
"꺽."
그리고 하늘에서 때마침 내려온 검을 잡고 손잡이 끝으로 머리를 찍었다.
콱!
초절정은 그대로 기절했다. 나는 초절정 둘에게 다시 한번 점혈을 한 이후 도하나를 불러 나머지를 제압하게 시켰다.
삼재종합공.
활용성 높고 좋은 무공이다.
당연히 나도 익혔다.
그것도 그냥 익힌 수준이 아니라 삼재 재단에서 인정한 1급 삼재 대가(1st grade sancai master)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