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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5화 (5/120)

< 5 : 4. 고무림(Gomurim) >

4. 고무림(Gomurim)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1학기 개강까지 3일가량이 남은 상태.

그동안 나는 학생들을 가르칠 커리큘럼을 준비하고, 도하나의 수련도 도와주고, 나 스스로의 무공도 갈고닦았다.

수업 준비는 거의 끝냈고 도하나의 도법도 좀 더 무거워졌지만 정작 나는 딱히 얻은 것이 없었다.

무공 수련이란 그런 것이다. 하루하루는 얻는 것이 없음에도 끊임없이 연습하고 반복하는 것. 그러다 어느날 뒤를 돌아보면 예전보다 나아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조바심을 느끼지 않았다. 조바심을 느끼기엔 이미 너무 오래 걸어왔고 갈 길은 멀었다.

그런 하루를 반복하며 삼주일을 보냈다. 대부분의 시간은 연무장에서 보냈지만 휴식을 취하거나 몸으로 때울 게 없을 때는 교수 연구실에 있었다.

과연 세계삼대무학원. 연무장과 연구실 모두 규모도 크고 설비도 좋았다. 연무장에 설치된 전음 재밍 장치(Telepathy jammer)를 보고는 살짝 놀랄 정도였다.

뭐냐고…. 무슨 군 시설이냐고….

낮 수련을 끝낸 이후엔 연구실에서 수업 교재로 쓸 무서를 정리하며 커피를 마셨다. 도하나가 제가 하겠다고 신나서 타준 커피였는데 몹시 썼다.

다음부터는 그냥 내가 해야지. 이걸 마실 바에 그냥 독약이라도 삼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 왔군."

"네? 뭐가요?"

글쎄. 독약?

곧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

획획.

도하나는 나와 문짝을 몇 번 번갈아 쳐다보더니 문을 향해 도도도 달려갔다. 문 너머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도하나의 얼굴이 활짝 폈다.

"이쁜 언니!"

"안녕, 하나야! 안녕하세요, 대협! 요구르트 사세요!"

인사치고는 아주 이상한 멘트와 함께 요구르트 아가씨가 찾아왔다.

***

"그거 얼른 줘봐요."

"네넹."

당초아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내 의지로 요구르트를 받았다. 그만큼 입맛이 썼다. 당가에게 음료를 달라고 하다니.

당가놈들은 아메리카노에 독을 더블샷해서 먹는다는 괴소문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한들 도하나의 커피보다는 맛있을 것 같다.

당초아는 계약서 몇 장과 함께 요구르트를 내밀었다. 요구르트는 유통기한이 일주일쯤 남은 게 어째 그럴싸했다. 나는 요구르트 한 병을 바로 따서 원샷했다. 달다. 살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한 병씩 마시다간 언젠가 여기 독을 넣어둬도 무심코 마시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독살 사건의 최대 기여자는 도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확정 계약서예요. 임금은 저번에 얘기한대로 수신호위 계약과 교수 계약을 묶어서 지급할 거고, 도 소저에게도 조교수에 해당하는 임금을 지급할 거예요."

"오예."

이미 들켰는데 저 노란 유니폼은 왜 계속 입고 다니는 걸까. 첫 만남 이후로 당초아를 몇 번이나 봤지만 다른 옷을 입은 걸 본 적이 없다.

아니, 그보다 왜 맨날 진짜 요구르트를 들고 다니는 건데?

"계약 기간은 최대 2년. 만약 기간 안에 교수진이 정상화되면 그 이후에는 상호 합의하에 계약을 종료할 수 있는 조항을 넣었어요."

당초아는 이것저것 차근차근 설명했지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돈은 내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화경이 돈에 구애 받을 리가 없다. 물론 지금 나는 내공이 금제된 반쪽자리지만.

"그리고 그 물건에 대해서는 이면 계약으로 진행할 거에요."

"고무림(Gomurim)으로?"

"그게 깔끔하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죠."

고무림은 제갈 그룹의 통신회사 ZT&T에서 운영하는 전세계 최대 규모의 무림 커뮤니티 웹사이트다. 각국에 지사를 두고 다양한 언어로 서비스되는데 제갈놈들 성격을 생각하면 어떤 음흉한 의도가 뒤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게 바로 고무림 블랙(Gomurim black)이다. 여기는 한마디로 제갈 그룹이 물건을 책임지는 VIP용 암시장이다.

천급 낭인과 화경급 무인, 장물, 신병이기, 영물, 영단, 비급. 무림공적이 될 만한 사안이 아니라면 누구든 고용할 수 있고 무엇이든 거래할 수 있다.

물론 책임지는 건 거래까지일 뿐, 그 이상의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렇다.

교수 생활 실컷 했는데 당초아가 물건을 안 주겠다고 뻐팅기거나, 반대로 내가 물건만 선금으로 받고 일을 안하거나 하면, 뒤통수 맞은 쪽은 곤란할 것이다.

세상엔 믿을 만한 중재인이 필요한 일이 많고 계약에 무력이라는 불안 요소가 끼어있는 무림에선 더더욱 그렇다. 제갈 그룹은 그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떼돈을 벌기 시작했다. 역시 똑똑한 놈들이다.

당초아는 태블릿을 꺼내들었다.

"이것까지 오늘 바로 처리하시죠. 물건에 관해서는 이미 고무림 측에 공탁한 상태예요. 이건 내용 증명이구요."

"좋아요. 메신저로 계약 주소 보내주세요."

"보냈어요."

나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독접 님의 청약]

[낙약의 남은 유효 기간 02:59]

[독접(甲)과 바스타드(乙)간의 계약]

[갑과 을 간의 교수 선임 계약(사진)을 기반으로 한다.]

[위 교수 선임 계약 종료시 갑은 을에게 검룡패(사진)을 지급한다.]

나는 사진을 확인했다. 맞다. 스승님의 유품. 일곱으로 조각난 패의 한 부위.

사람들은 모르지만 이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귀중한 물건이다. 낭인으로서의 내 몸값을 고려하더라도 2년이면, 아주 싸게 먹히는 것이다.

나는 바로 몇 가지 인증 절차를 거치고 계약을 승낙했다.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당초아는 한 건 해결했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하고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진중한 말투로.

"사천무공대학 정교수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다시 한번 반갑습니다. 이사장 님."

당초아와 악수를 했다. 한숨 돌린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패가 손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거의 되찾은 것과 다름없다. 실마리도 못 잡은 다른 패 조각들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개강을 하고는 좀처럼 보기 힘들 거예요. 교수님도 바쁘실 거고 저도 일이 있으니까요."

"그렇겠죠?"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첫 학기에 당장 15학점을 혼자 맡아야 한다. 몇몇 비무대련이야 도하나에게 짬 때린다고 해도 내가 맡아야 할 분량도 장난 아니다.

무공을 가르치는 것 자체는 꽤 익숙한 편이지만 준비할 것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무림사학이나 이론적인 측면도 분명 어느 정도는 강의를 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

"오예!"

나는 등짝에 거대한 도를 맨 단발 머리 아가씨와 노란색 요구르트 판매원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를 옆에 두고 고기를 굽는 광경을 상상해보았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나로서도 쉬이 감당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가자!"

"가즈아!"

말리기 어려운 분위기라는 게 더 지독했다.

***

다행히도 대학가에서 그런 광경을 보게 되는 일은 없었다. 당초아는 교내 공원 한켠에 바베큐 장비와 음식들을 준비해두었다.

"이래도 되는 거예요?"

"뭐 어때요? 내가 이사장인데."

그래. 사립대학 이사장이 자기 땅에서 고기 좀 굽겠다는데 말릴 사람은 없겠지.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고기와 술을 먹었다.

"우리 김 교수님…… 내가 믿는 거 알죠……? 나 좀 살려줘……. 내가 아주 그냥 울 교수님 믿어……!"

당초아는 독주가(毒酒家)였다. 농담이 아니라 소주에 진짜 독을 타서 먹었다. 원래 당문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식으로 면역력을 기른다고 했다. 이젠 굳이 안 해도 되는 수준이지만 그냥 마시면 밍밍해서 넣는다고.

치명적인 독은 아니라지만 당초아쯤 되는 무인이 소주 몇 병에 혀가 꼬부라진 걸 보아하니 그리 권장할 만한 건강 식품은 아닌 것 같다.

"헤헤헤, 사형."

문제는 옆에서 도하나도 한번 따라해보겠답시고 마신 후 헤롱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독에 대한 면역력이야 만만치 않은 아이지만 오히려 치명적인 독이 아니라서 도하나에게 더 잘 먹힌 듯했다.

재미없는 상황이었다.

"제가 할까요?"

나는 그 말에 솔깃해져서 도하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런데 눈도 살짝 풀리고 몸 균형도 미세하게 어긋났고 얼굴까지 새빨간 것이 영 못 써먹게 생겼다. 저 상태로 나섰다가는 사람 여럿 죽일 것이다.

"내가 해야지. 이사장 님 잘 지키고."

"히히, 알아썽."

"알아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당초아가 정신이 풀린 시점 즈음부터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숫자는 정확히 여섯. 처음에는 멀리 있어서 수준 파악이 어려웠으나 가까이 다가왔을 때 다시 느끼기로는 절정에서 초절정 초입쯤으로 보였다.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위 아래 올 블랙에 복면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지나가던 시민이나 학생일 확률은 거의 없어보인다.

그런 거겠지. 사천당가라는 거대 세가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 권력을 위해 죽고 죽이는 비열한 골육상잔.

"동작 그만. 이사장 님에게 손댈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그 여자를 데리고 떠나라. 지금 간다면 잡지 않겠다."

나는 순간 뒤통수를 봉강(棒罡)으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눈을 부릅떴다.

놀랍게도 복면인들은 당초아를 챙기고 있는 도하나를 향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분위기를 잡는다. 큰 일이라도 낼 것처럼.

그럼 뭐야.

난가?

나야?

니들 목적이 나라고?

절정 넷, 초절정 둘로 나를 담그겠다고?

당초아 옆에 누가 있는지 모르고 온 게 아니라 나라는 걸 알고 제거하러 왔다고?

에이, 진짜? 설마.

"애들아, 그렇게 말해놓고 이사장 님을 노릴 생각이지?"

"몸 성히 돌아갈 생각은 마라. 반쪽짜리 주제에 화경이랍시고 설친 대가를 치러야지."

"허허."

정말 우습게 보였나보구나.

화경이, 내가, 김산이.

"허허허, 미치겠네."

어이가 없고 화가 난다. 순간 살심이 치솟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누군가를 함부로 죽이면 안 되는 사람이다. 물론 누군가를 함부로 죽여도 되는 사람 같은 건 없지만 나는 더더욱 그렇다. 죽여야 할 때는 죽일 것이고 이전에도 죽여왔지만, 단지 죽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살인은 필요에 의해야 한다.

그걸 지켜야 내 목숨이 의미가 있다.

하지만.

깝치는 놈들을 좀 아프고 세게 때리는 것은 스승님도 용서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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