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0. 서(Prologue) >
현대 무림의 시작은 정확히 언제인가.
그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많은 무림사학자는 1945년을 그 기점으로 꼽는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 19,000m 경.
일본제국 육군의 기파 레이더를 피해 히로시마로 진입한 미합중국 소속의 초고도 수송기가 물체 하나를 투하했다.
─투하 직후 10초 경과.
일본제국 육군은 미합중국의 침입을 감지하고 미확인 낙하 물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일본제국 사령부는 즉각 그 물체가 폭탄 계열이라고 판단, 직후 히로시마 근처에 있던 고수들을 투하 예측 지점으로 파견했다.
─투하 이후 60초.
마침 히로시마시에 있던 일본제국의 화경 고수, '염제(炎帝)' 시노부 준이치로가 폭탄 투하 지점에 도달하여 피해 최소화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염제는 화공의 대가인바, 폭발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에 적합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투하 이후 약 100초.
미합중국의 투하체가 염제의 시야에 들어왔다.
상공 19000m에서부터 떨어지고 있는 것이 꿈틀거렸다.
인간이었다.
인간은 염제와 눈이 마주친 직후 품에서 뭔가를 꺼내 복용했다.
그로부터 2초.
염제는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이런…… 미친……."
시노부 준이치로는 제자리에서 굳은 채 침음을 터트렸다.
코앞에서 천적을 맞이한 초식동물처럼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상대와의 격차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인간.
미합중국의 최고수. 칠현경의 일원.
소공자(The little boy).
크리스 레인하트.
시노부 준이치로와 눈이 마주친 순간조차, 크리스 레인하트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삼킨 물건을 소화할 뿐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이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나, 후에는 '핵폭단'이라고 불리며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질 물건이었다.
직후.
현경(玄境)에 도달한 비대칭병기의 기파가 폭발적으로 증폭한다.
초인(超人)의 경지에 도달한 염제마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파괴적인 경파였다.
소공자는 잠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후 허리에서 검을 뽑는다.
검기를 뽑아낸다.
평범한 절정 무인도 뽑아낼 만한 밀도 낮은 검기.
그러나.
그 길이가 물경 1,800m, 너비가 20m에 달한다면 다른 이야기였다.
크리스 레인하트가 공중에서 휘두르기 시작한 첫 검격은 착지 시점과 거의 동시에 땅에 도달했다.
검격의 시작 첫 1초가 지나기 전에 화경의 경지에 오른 염제의 육신이 소멸했고.
검이 끝까지 휘둘러진, 소공자의 발끝이 일본제국의 영토에 닿은 그 순간.
도시가 반파됐다.
이후 현경의 고수가 착지의 반동을 줄이기 위해 시전한 발경의 여파가 반쯤 무너진 건물과 그 지반을 다시 무너트리기 시작했고, 그 경력 파동에서 발해진 열기가 사람과 물건과 시체와 건물을 불태웠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동선서소(東仙西小) 중 서소로 불리며 만인의 존경을 받던 소공자 크리스 레인하트는 도시 하나를 파괴하고,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해 십사만 사천 명을 학살해,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개인으로 역사에 남았다.
***
"그래서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뭘까."
"……."
학생들은 조용했다.
첫 수업이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럴 수 있는데. 나한테는 그러면 안 돼.
나는 내 말이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않는다.
학생들을 살피다 한 명을 지목했다.
"과대?"
"예? 저요? 어, 음, 어……. 현경한테는 깝치지 말자?"
"……."
"죄송합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낱 개인에게 감당 못할 무력을 쥐여줄 수 있는 핵폭단의 위험성에 관해 얘기할 것 같군."
과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했는데도.
과대의 의견에는 나도 동의하는 편이다.
현경한테는 안 깝치는 게 좋다. 내가 다 깝쳐보고 하는 말이니 믿어도 된다.
아무튼 수업이 끝날 시간이 되었으니 나는 손뼉을 쳐 주의를 환기했다.
짝짝.
"재밌는 답변이긴 했다. 오늘 무림사학 강의는 여기까지. 다음 수업은 연무장에서 할 것이다. 각자 무구를 챙겨 13시 30분까지 집합하도록."
"감사합니다!"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 모습들을 보았다.
대한민국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라지만 대부분은 풋내기 햇병아리들이었다.
'고수'가 될 가능성이 있는 후기지수들은 기껏 해봐야 한 손에 꼽을 정도.
"고생하셨어요, 교수님!"
"그래, 하나, 너도 고생했다."
조교가 다가오며 간식을 건넸다.
카카오벽곡밸런스바였다.
나는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내가 요즘 점심 대용으로 자주 챙겨 먹는 물건이다.
초코맛이라고 적혀는 있는데 그렇다고 막 달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먹기 간편한데다 열량과 포만감을 모두 챙길 수 있어 애용하고 있다.
"어때요? 사형. 괜찮은 애들 좀 보여요?"
"사형이 아니라 교수님."
"아, 맞다. 교수님."
핀잔을 주며 멀어져가는 햇병아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유독 눈에 띄는 몇이 있긴 했다.
"넷 정도. 그럭저럭 괜찮은 물건이 있긴 하군."
"전 잘 모르겠어요. 다 제가 이길 것 같은데."
"그건 하나, 네가 특별한 거고."
"그래요?"
문파의 사매이자 이곳까지 나를 조교로 따라온 도하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하긴, 연배로 치면 저기 있는 아이들이나 도하나나 비슷했다.
그러나 비슷한 약관의 나이라 한들 기껏해야 절정에 가까스로 진입한 학생들과 달리 도하나의 무위는 초절정에 도달해있다.
그것은 재능의 차이도 있었지만, 살아온 과정의 차이도 있었다.
학생들이 온실 속에서 커온 꽃이라면, 도하나는 사막에서 핀 꽃이었다.
마침 좋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비무대련은 네가 해주는 걸로 하자."
"예? 제가요?"
"그래. 비슷한 또래에게 맞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다."
"음, 잘못해서 다치게 하면 어떡해요?"
"쟤들 크게 다치면 너도 크게 혼나는 거야."
"힝."
도하나가 애교 섞인 엄살을 피웠으나 나는 그냥 무시했다. 수준 차이가 얼만데.
에휴.
나는 먼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팔자에도 없던 대학교수 생활이라니.
그것도 아직 최대 2년이나 남아있었다.
***
무공깨나 익힌 요구르트 아줌마가 국제 마피아 소속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생각해봐라.
언제 어디를 다녀도 의심받지 않는 유니폼이 있는데 마피아가 굳이 그 복장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지.
회사 안, 대로변, 밤거리, 지하철.
새벽. 아침. 낮. 저녁. 밤.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 있건 요구르트 아줌마를 경계하는 사람은 없다.
거기다 냉장 기능이 포함된 커다란 전동 카트를 들고 다닐 수 있는 당위성이 있는 직업이다.
그 안에 변비 해결 특화 요구르트가 들었는지, 독극물이 들었는지, 마약 혹은 날카로운 냉병기가 들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국제 마피아가 한국에서 부업으로 삼고 싶은 직업 1위가 요구르트 아줌마라는 통계도 있다. 아마도.
그러니까 저 사람은 매우 수상한 사람이었다.
나와 도하나가 사천특별시에 도달해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앞에 요구르트 아줌마가 서 있었다.
아니, 요구르트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젊었다. 거기다 이뻤다.
더 수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주의를 집중했다. 제대로 보았다.
자세는 곧았고, 손끝을 거칠었으나 손바닥은 매끄러웠다. 눈빛은 맑고 깊었다. 정종(正宗).
동시에 후각에 기를 집중했다.
인삼, 계피, 감초, 박하, 특별한 물건은 아니었으나 요구르트 카트에서 날 냄새는 아니었다.
거기에 은병구와 월화수목의 향기가 났다. 극독의 재료. 사천당가의 특산품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런 고급 재료를 쓴다면 가문의 후기지수일 확률이 높았다.
사천특별시에서 당문의 후기지수를 마주치는 것이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런 복장을 하고서 마피아가 아니었던 게 조금 신선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굳이 이 장소, 이 시간에 당가의 자제를 만나는 것이 우연일 리는 없었다..
"사형! 저 언니 봐요! 엄청나게 이뻐요!"
내 옆에 있는 멍청한 사제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도하나 이마에 딱밤을 한 대 갈기고 말했다.
"후각에 집중해라."
"집중!"
"뭔 냄새가 나냐?"
"인삼. 박하. 월계수 잎. 사프란. 계피. 감초! 그리고 은병구랑 월화수목!"
"뭐냐?"
"당문요!"
"예?"
발랄하게 소리치는 도하나의 모습에 요구르트 아가씨가 오히려 당황했다.
하긴 저렇게 눈치가 빠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눈치 없는 행동을 보기도 쉽지 않다.
"의뢰주 측 맞소?"
"그……. 어떻게, 음, 아니지, 음."
잠깐 당황하던 요구르트 아가씨는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김산 님이시죠? 반갑습니다. 당문의 당초아입니다."
의뢰주. 그것도 부하가 아니라 당사자였다.
이런 곳에서 기다릴 줄은 몰랐는데.
사천무공대학의 어린 이사장.
당문의 직계 , 사천당가 본문의 장녀. 이제는 이름뿐인 직계이긴 하다만.
독접(毒蝶). 당초아.
젊은 것은 알고 있었으나 예상보다 더 어렸다.
"반갑소. 화산 무무문의 김산이오. 옆에는 사제인 도하나."
"반가워요, 언니! 도하나입니다!"
"아하하, 반갑습니다. 잠깐 장난을 쳐볼까 했는데 바로 걸려버렸네요."
당초아는 눈을 마주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초승달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 뭐, 요구르트나 하나 드릴까요?"
진짜 들어있긴 했던 모양이다.
당가가 주는 요구르트라. 먹어도 되나?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첫 만남부터 의뢰주한테 밉보일 필요는 없지.
후기지수의 독 따위가 치명적이지도 않을 거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