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외전 : 마지막 이야기(3)
어떤 국가도 완전한 패권을 지녔노라 외칠 수 없는 세상이다.
신대륙은 수치상 가장 강력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도저히 자국 밖으로는 힘을 투사할 수 없었다.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한 고려연방의 경우,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을 통째로 손에 넣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인더스 연방, 그리고 인도차이나 연방과 대립하고 있었다.
오히려 대륙의 3대 세력인 인도차이나, 그리고 인더스 연방, 고려연방, 셋 중 국력은 가장 강하되 머릿수가 가장 적었던 탓에 인구증산정책에 사활을 거는 판이었다.
인더스 연방은 덩치만 컸지 여전히 인도차이나와는 그야말로 서로 심심하면 국지전을 벌이는 데다 국민 대부분이 빈민층이었다.
그나마 민주주의 원칙은 제법 지켜지고 있고 여러 차례 내각이 바뀌면서 최선을 다하면서 극빈국에서 개발 도상국 취급을 받는 수준까지는 어찌어찌 기어올랐지만, 문화대혁명의 후폭풍은 여전히 국가역량을 좀먹고 있었다.
부패사범을 모조리 공개처형해가면서 어떻게든 부패를 줄여보려고 자정을 시도하고, 뇌물은 준 자와 받은 자 모두 사형, 마약사건은 단순가담자도 사형 등등, 그야말로 엄벌주의를 내세워 외교적 마찰까지 감수하고 외국인들도 줄줄이 처형시켜 가면서 어떻게든 이 가난의 굴레를 끊어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지만, 아무튼 간에 개발도상국이지 강대국으로 취급받기는 어려웠다.
인도차이나 연방은 명백히 가장 상태가 안 좋았다. 당장 가상적국만 해도 제1적국인 인더스, 2번 적대국인 대 인도네시아 연맹, 그리고 필리핀과 고려연방과도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인접국 거의 전부와 적대한다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는데 국력은 고려연방은커녕 인더스보다도 떨어진다.
그나마 인도네시아와는 비슷비슷하지만, 그거 가지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연방과 필리핀은 한 줌밖에 안 되는 세력이니 제외하고, 시베리아 연방은 그야말로 간신히 유지되는 수준이었다.
일본 열도에서는 심심하면 독립운동이 터지고 있었다. 주로 독립해서 고려연방에 가맹하겠다는 독립운동이었다.
이유야 당연히 경제적 이유, 대부분의 생산물을 시베리아 연방의 유지를 위해 바치고, 시베리아 연방은 수도를 일본에 둔 것도 아니면서 자원과 생산물들만 삥을 뜯어대는 것이다.
그런데 독립을 하면 시베리아 연방의 침공을 버틸 재간이 없으니 고려연방 엉덩이 아래 숨어서 시베리아 연방이 포기하게 하겠다는 꿍꿍이였다.
당연하지만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는커녕 시위하는 군중들을 전차로 뭉개버리는 것의 반복이 벌어질 뿐이었다.
당장 시베리아에서 광업과 임업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경제력의 중심지인 일본이 떨어져 나가면 시베리아 정부는 눈이나 열심히 파먹고 살아야 할 판이었으니까.
산산조각난 유럽 러시아는 말할 가치가 없고, 페르시아는 혁명을 통해 독재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화를 달성해 ‘쓰레기통에서 꽃이 피었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급속한 서구화로 인한 세대갈등, 경제발전 문제, 심지어 독재 체제에 대한 향수까지 겹쳐져 이래저래 국내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그나마 페르시아는 성공사례였다.
동로마 공화국의 경우 건국 이후 벌써 4번째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국고는 텅텅 빈 지 오래고 정권싸움만 벌어지고, 툭하면 내각이 총사퇴하는 판이었다.
가장 상태가 좋은 건 유럽이었다.
다뉴브 연방은 거의 존재감이 반쯤 사라진 지 오래였다. 국내 안정에만 주력할 뿐, 뭔가 패권을 추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적도 없이 그냥 유럽연방과 체결한 무역협정을 통해 국내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 이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유럽 국가들,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왕국 등도 국정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툭하면 내각이 엎어지고, 의회가 해산되고, 탄핵안이 소추되고, 내각이 총사퇴하고, 불신임안이 제출되고,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파업이 일어나고.
누군가는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상징이라고 했지만,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가장 패권에 가까운 국가라는 평을 받는 유럽연방의 경우도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다.
우선,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여전히 분리독립 운동이 활발했다.
광범위한 자치권 부여 등으로 타협을 시도하기도 하고, 강경 진압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진압을 위해 여러 시도를 했지만 한동안 사라지지 않던 분리주의 세력들은 한때 황실 인사를 암살하기도 하는 등 연방의 심각한 암덩어리였다.
그 중에서 분리주의 세력의 대표나 다름없던 붉은 여단은 폭탄 테러 위협을 공항에 가했다가 당황한 공항 측에서 접근하던 모든 비행기를 좁아터진 소형 공항에 강제착륙시키는 사태를 야기했다.
정작 공항 인근에서 터진 폭탄은 어떤 인명 피해도 내지 않고 사소한 시설 손상만으로는 끝났지만, 그 결과 이륙지연과 빡빡한 사내규정을 비롯한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얽혀 대형 항공기 두 대가 지상에서 추돌하고 다른 두 대의 여객기까지 폭발에 휘말리는 사상 초유의 항공 참사가 벌어지자 여론이 급격하게 싸늘해졌고, 붉은 여단은 이 나비효과에 경악해 다급히 언론에 성명을 발표했지만 악화된 여론을 견디지 못하고 해산하면서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조직이 궤멸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군소 조직들은 여전히 활동하면서 연방 정부의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와중이었다.
뭐 그런 사소한 분리주의 정도야 큰 국가에는 흔한 일이기는 했지만,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거리감을 단숨에 좁혀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연방의 자치 속령으로 존재하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과거 프랑스의 태평양 식민지들에서도 분리주의 운동 세력 하나쯤 없는 곳이 없을 지경이었으니, 연방의 가장 큰 문제는 분리주의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폴레옹 7세의 즉위로 인해 독일, 네덜란드의 분리주의는 크게 사그라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지만, 이탈리아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해답을 쉽사리 내놓기 어려웠다.
독일도 조금 나라가 흔들거리기는 했다.
짧기로 유명한 나폴레옹 5세의 재위기간 중에 헤르만 괴링이 사고사한 것이었다.
그 경위도 황당했는데, 극동 주둔 연방군 소속 독일 해군 소속 2만톤급 경(?)순양함(독일군은 일단 경순양함으로 분류했었다) 엠덴을 기함으로 한 소함대가 어떤 경위로 인해 함대에 전파되어 있던 괴링 대통령의 방문 소식을 듣지 못했고, 본인 습관대로 직접 항공기를 조종해 다가오던 괴링의 항공기를 불과 하루 전에도 벌어졌던 소비에트 연방과의 국지전에 이은 또 다른 군사도발행위로 판단하고 주포로 장착된 15cm 양용포 3연장 포탑 6기를 일제히 쏴버린 것이었다.
당장 수 일 전 소련군과 극동 주둔 유럽연방군 간에 실탄까지 사용한 국지전이 벌어진 상황이라 소련이 설욕전을 시도한다고 판단할 여지가 충분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 VT신관을 장착한 150mm 포탄 18발의 포화를 뒤집어쓴 연락기는 추락했고, 헤르만 괴링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로 인해 독일 내에서는 당장 얼마 전에 교전이 벌어진 위험지대로 대통령이 직접 연락기를 몰고 가는 일정이 말이 되느냐면서 이는 암살이라는 주장까지 나왔었고, 보좌관과 측근들이 모두 일정 강행을 만류했으나 병사들에게 신뢰를 잃지 않겠다는 괴링 본인의 의지로 강행했다는 정식 발표가 나오고도 논란이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괴링 암살의 배후라는 주장이 나온 프랑스 제국은 유럽연방 수상에 독일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앉히고, 대형사고를 친 엠덴과 전문을 ‘어째서인지’ 엠덴을 기함으로 하는 순양함전대에 발신하지 않은 이탈리아 해군 출신인 극동함대 기함 16인치급 항공전함 로마의 함장과 제독, 통신장교들을 소환해 4국 합동 군법재판에 회부함으로써 독일의 불만을 가라앉혀야 했을 만큼 상당히 심각했던 논란이었다.
물론 단순 사고로 결론나 엠덴의 함장에게 교전수칙 미준수로 징계를, 통신문을 누락한 로마의 통신장교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가 나폴레옹 6세의 즉위를 명분으로 전원 사면했지만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단골로 주장되는 음모론의 소재가 되었다.
주로 암살의 배후로는 나폴레옹 5세가 거론되나 군부에 영향력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나폴레옹 6세, 혹은 당시 독일이 프랑스에 숙이고 들어간 것이 프랑스의 핵무기와 군사력 때문도 있었지만, 괴링이 나폴레옹 4세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이미 죽은 나폴레옹 4세가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 자식에게는 충성하지 않아 연방을 두 쪽낼 위험이 있는 잠재적 위협인 괴링도 보내버리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다는 음모론이 떠돌았으나, 모두 해명할 가치도 없는 쉰 떡밥인 음모론 취급을 받고 있다.
소수 주장으로는 애초에 괴링의 반대파들이 만든 나라인 맨 공국 배후설, 그리고 다뉴브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복원될 때 바이에른의 합병에 대한 보상으로 바이에른 왕가인 비텔스바흐 가문에 제국을 넘기고 그 제국의 원래 주인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위스 산골짝에 던져버렸기에 이에 대해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이 높은 스위스의 합스부르크 왕조의 배후설도 있었지만 점차 흐지부지되어 잊혀졌다.
한편 히스파니아 공화국은 그야마로 개판이 따로 없었다.
복벽파는 여전히 히스파니아 왕국을 포기하지 못했고, 포르투갈 독립주의자를 비롯해 수많은 분리주의자들이 히스파니아를 갈가리 찢어먹기 위해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 중 적잖은 수는 선을 넘은 혁명가 수준이 아니라 아예 범죄조직 수준으로 추락하기도 했지만, 또 어떤 세력은 아직 대화로 풀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며 평화적인 투쟁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어느 쪽이든 히스파니아의 앞날에 불안 요소를 깔아주고 있는 존재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칫하다가는 멀쩡한 나라가 공중분해될 판국이었으니 오죽한가.
비슷한 상황으로 스위스 왕국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로 보장받은 스위스는 당연히 옛 주인님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유럽연방의 군사력과 압력에 의해 몇몇 봉기가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입헌군주정을 약속하고 대부분의 권력을 내려놓는 선에서 타협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민의 40% 정도가 왕정을 불호하고 있었다.
스웨덴은 그냥 문자 그대로 별 일이 없이 조용했고, 앵글로노르드 연방은 본인들조차도 원하지 않았는데 FDR이 ‘북부에서 유럽연방을 견제할 강국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만들어낸 인조 국가였기에 이래저래 국내외적으로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알비온 연방은 군사정권이 시민혁명으로 무너진 이후 과거의 압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아일랜드인들보다 더 수가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보복할 거라는 우려 때문에라도 어거지로라도 존속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그랬으니까.
한편, 맨 공국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사망 이후 공작 없는 공국으로, 섭정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가 유럽연방에서 관세 혜택과 경제지원을 받기 위해 보나파르트 왕조에 대공위를 받아달라고 요청한 상태였고, 황실에서는 이에 대해 뭐라 답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내전이 벌어졌다.
박힌 돌인 현지인들과, 굴러온 돌인 중국인들 간의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