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외전 : 부활(3)
우리는, 너희를, 증오한다.
그들이 들어온 말이었다.
‘너희들은 근본적으로 글러먹은 족속들이다.’
‘너희 민족은 수많은 이들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학살을 저지르고, 남을 깔아뭉개려고만 하고 공존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덩치를 무기삼아 모든 것을 뭉개고 파괴했다.’
‘너희들은 결코 고개를 들고 살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해자다.’
‘사과해라.’
‘어딜 네놈의 족속들이 감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나!’
‘네놈들에게 고통받은 수많은 이들의 원혼이 네놈들이 살아 있는 한 저승에서도 편히 쉬지 못할 거다.’
‘네놈들은 결코 우월하지 못하다. 저열한 씨들 같으니라고.’
‘씨앗부터 글러먹은 놈들, 그 전쟁 때 모조리 죽여버렸어야 했다.’
계속해서 그런 말을 들어왔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왜 자신들의 잘못인가.
그들이 원해서 그 민족으로 태어났는가?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우리 민족을, 우리의 꽌시를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그러나, 살아갈수록 명확해졌다.
그들은 이유 없는 혐오를 받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들은 잘못한 게 없었다.
침략자라고? 너희들은 언제 침략자가 아니었는가?
우리의 죄라고는 단 하나다.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
우리는 승리자가 아니기에 이런 오욕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니, 승리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저들은 승리의 길을 모조리 막았다.
우리가 원한 건 우리에게 씌워진 멍에를 벗겨주는 것이지만, 저들은 우리의 합리적인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우리의 목소리를 다른 수단으로 세상에 알리려고 하자, 그들은 우리를 이렇게 불렀다.
테러리스트.
범죄자.
우리와 협상하는 것은 불의이고, 피해를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를 때려죽이는 것은 용기가 되었다.
우리는 죽어나가는 악역들이었다.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냉엄한 현실자각의 뒤에는 분노가 찾아왔다.
우리의 피가 언제부터 네놈들의 피보다 싸구려였는가.
그렇다면 그 비싼 네놈들의 피를 흘려주마.
이 부조리한 세상에 복수하고 말겠다.
그리하여 그들이 태어났다.
***
- 여기는 이아손 54, 아가사 응답하라.
- 여기는 아가사, 이아손 54, 현재 이 공역 전역에 기상 문제로 인해 비행금지 명령이 내려진 상태다, 거기서 뭘 하는 건가?
- 이아손 54에서 아가사에게, 알파 우선 상황이다. 즉시 착륙허가를 내 달라.
- 이아손 54, 여기는 아가사, 귀소의 요청은 불가능하다.
- 빌어먹을, 아가사, 여기는 이아손 54, 현재 알파 상황이다. 당장 최우선 착륙 허가를........
- 현재 비행장이 침수되었다. 알파 상황이 아니라 그 이상의 비상상황이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현재 우리도 관제탑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상태다.
- 그럼 대체 착륙시설을 찾아달라.
이아손 54는 상당히 대형 VTOL 항공기였다.
알파 우선 요청은 항공기 자체의 비상상황은 아니지만, 상당히 중요한 상황일 때 발령되는 코드로, 로스엔젤레스 조약기구의 코드다.
게다가 인식되는 신호 역시 로스엔젤레스 조약기구 직속의 항공기의 신호니, 어디든간에 착륙유도를 해야 했다.
그리고 공항이 침수된 상황에서는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 이아손 54, 대체 착륙시설을 찾았다. 르 메르디앙 호텔의 옥상 착륙장이 귀 항공기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갖추고 있다.
- 알겠다, 아가사, 해당 시설의 통신주파수는?
- 135.60으로 르 메르디앙 호텔 내에 있는 착륙관제센터와 교신하라.
- 고맙다, 아가사, 이아손 54 캔슬 IFR.
***
수직이착륙기가 역추진하며 착륙 속도를 늦추고, 잠시 뒤 사뿐하게 헬리패드에 내려앉았다.
일반적인 헬기보다는 한참 큰 크기였기에 일반적인 헬리패드에는 착륙하지 못할 판이었던 항공기는 간신히 헬리패드가 수용할 수 있는 크기 내였다.
누군가가 마중나오지는 않았다. 사실 책임 있는 누군가와 만나기에는 상당히 급한 만남이기도 했다.
후방 램프가 열리고, 사람들이 내렸다.
나 역시 그들과 한데 섞여 내렸다.
“빌어먹을, 이래서는 작전은커녕 밑에 내려가는 것도 어렵겠군. 코부스는 사용 가능한가?”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대원들도 이 정도 악천후에서 운용하는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도시에 들어왔으니 반은 됐다. 우선 당국의 최신 정보부터 공유받는 게 낫겠군, 위성 통신은 되겠지?”
“아직 위성통신은 멀쩡합니다. 유선 통신은 간혹 끊깁니다만.”
“치안당국과 위성통신 연결해,”
***
“부장,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 정보가 얼마나 신뢰성이 있든, 지금 이 폭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 혹은 어디 숨겨져 있을지 모를 폭탄을 찾아 저지대를 뒤져야 한단 말입니까?”
“벌써 폭탄을 장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해당 테러 수단의 정체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명백한 것은 이것이 모종의 대량살상무기라는 것입니다, 핵무기가 아닌 이상 화학무기의 경우 우천시에는 효과가 반감되며, 생물병기의 경우도 이런 폭풍 속에서는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거입니다. 수인성 전염병을 사용하려는 시도가 아닌 이상 말입니다.”
화면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한, 설령 핵무기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면 슈퍼태풍이 다 지나간 뒤에 진행하는 게 옳습니다. 그러니 지금 테러리스트들은 무기를 아직 준비하지 않았고, 이들을 설치하고 사용하기 전에 제압하는 것이 옳습니다.”
“좋습니다, 그 말이 다 맞아요, 그런데 이 정보.... 화교들의 도움을 받는 중국계 테러조직, 뭐, 좋습니다. 고려연방에선 그런 방식이 통하겠죠, 그런데 부장, 지금 싱가포르 주에 살고 있는 화교가 몇 명인 줄은 아십니까?”
“그건 테러리스트의 체포에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테러리스트들은 자국민의 살상도 그리 신경쓰는 편이 아니고, 싱가포르에 화교 인구가 많다는 것은 싱가포르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을 거라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유사한 사례는 이미 통계적으로도....”
“지금 내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부장, 그.... 부장은 한족이 아니죠? 아니, 실언했군요, 한족이 아니죠, 그러면 혹시 화교들과 긴 대화를 나눠보신 적은 있습니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는 테러리스트들을 사살하거나 체포하러 왔습니다. 협상하러 온 게 아닙니다.”
“중요합니다. 부장. 저들에게는 그, 꽌시라는 게 있어요.”
“........ 들어는 본 것 같군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부장이 준 테러범들이 활동할 수 있는 건, 화교 세력 내에 꽌시를 그만큼 구축해두었기 때문입니다.”
“꽌시가 되었든 뭐든 간에 법은 법입니다. 공공의 안전은 안전이고요.”
“신펑요우, 혹은 하오펑요우 단계의 꽌시를 구축했다면 이 정도 지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오펑요우, 혹은 슝띠 수준의 관계를 맺은 이들이 많다는 의미죠, 즉 테러를 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손을 써서 대피시킬 테고,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에 맞추어.....”
“국장님, 국장님은 현재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고 있습니다. 저들은 그런 꽌시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신념형, 신념형 테러리스트입니다. 적색테러를 벌이는 공산당 같은 놈들이란 말입니다. 저들은 그게 대의에 걸맞는다고 생각하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에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살폭탄테러범의 그것과 같은 행동이란 말입니다. 저들은 그게 성공 가능성을 더 높인다면 주변인들을 피하게 하기는커녕 자기들도 피하지 않고 같이 죽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만, 그건 결국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 벌어지리라고 추측하는 일 아닙니까, 일단 화교들은 자기 공동체 내에 숨어 있는 자들을 최대한 보호하려 할 겁니다. 부장의 말대로 저들이 삼합회 같은 범죄조직 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그들은 우리 공권력이 움직이기 전에 미리 알고 도망치거나, 강제 집행을 하려고 해도 화교 전부가 나와서 막을 겁니다.”
“기습적으로 집행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실행 전 준비 단계에서 전부 새나갈 겁니다. 치안국 내에는 꽌시가 없을 리가 없잖습니까.”
“젠장, 그 뇌물 부패사범들에 대한 자정 능력이 인도네시아에서는 없는 겁니까?”
“부장. 화교들은 그들이 말하는 ‘인정’을 받지 않는 모든 상대를 적으로 간주해요, 그렇게 되면 싱가포르 주의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교들의 협조를 어떤 경우에도 받을 수 없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내려 합니다. 치안국을 그런 인물로만 꾸리면 문자 그대로 고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 기관이 대체 왜 그걸 못 한단 겁니까! 치안국의 간부와 실행요원들을 전부 외지인 출신으로 배치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선 화교의 협조가 없으면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단 말이오! 저들이 우리를 협력 대상이 아니라 적으로 간주하게 둘 수는 없소! 오히려 그렇게 해야만 치안국의 본분을 다할 수가 있........”
“미쳐버리겠군. 당신도 받아먹은 거군? 공직자, 그것도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직자가 되어서 화교 집단의 뇌물수수 행위를 그렇게 옹호하다니.”
부장은 국장보다 계급상으로는 낮지만, 나는 상부 직속 인물이다.
내가 보고서를 뭐라고 적어올리느냐에 따라 상부의 판단이 달라진다는 거다.
대번 국장의 안색이 바뀌었다.
“부장,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됐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이 상황에 대응할 테니 평소대로 움직이십시오. 이상입니다.”
나는 PDA의 홀로그램 화면을 꺼 버렸다.
“부장님.”
“싱가포르 치안국의 지원은 불가능하다, 아니, 차라리 적으로 간주해, 경찰이나 군이 방해하면 가급적 조용히 처리하되, 발포해도 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간략한 보고서를 자카르타로 전송하겠다, 싱가포르 치안국은 삼합회와 결탁, 뇌물 수수가 의심되며 심각하게 부패한 상태, 명백히 삼합회를 옹호하고 작전 수행을 저지하고자 하는 행동이 포착됨, 국장 이하 전 간부와 요원들은 신뢰 불가능, 싱가포르에 이해 관계가 없는, 배치된 지 1년이 지나지 않은 외지 출신 인사들이 아닌 이상 절대로 신뢰하지 말 것.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하면 공직자라는 작자들이 대놓고 범죄조직을 옹호할 수가 있지?”
“그러니 천년만년 후진국이지요.”
“그래도 싱가포르는 좀 잘 산다고 들었는데.”
“그게 다 저 카지노들 때문 아닙니까.”
“저것도 분명히 범죄조직이 연관되어 있겠지, 도박장 이권과 범죄조직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으니, 우리가 개입할 사안은 아니다만, 저것들도 다 쓸어버려야 하는데 말이지.”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주의하도록, 동료가 아닌 싱가포르 내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잠재적 적으로 간주한다. 이해했나?”
“예! 알겠습니다!”
역시, 난 현장을 뛰는 게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