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외전 : 부활(1)
침묵과 공허 속에서, 나는 우주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무한한 별빛의 바다 속에서.
하지만 무한은 정녕 무한이 아니었고, 영겁이자 찰나인 그 순간이 지나버리자, 하나씩 점멸하며 사라졌다.
완전한 공허 속에 버려진 나는 여전히 부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허는 내게 속삭였다.
“더 나은 세상은 만드셨나요?”
“.......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과연 내가 만든 세계가 더 나은 세상인가?”
“저는 판단하지 않는답니다.”
그 목소리는 내게 답했다.
“판단은 당신 스스로가 하는 거죠.”
“아직 확신하기는 어렵다.”
나는 그렇게 답했다.
우주에 홀로 내버려진 듯한 공허함과 부유감 속에서, 나는 답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마쳤더라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결코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런가요.”
공허는 쿡쿡대듯 웃었다.
“나도 하나 묻지, 넌 누구지?”
“내일을 바라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죠. 인간의 어리석음을 알면서도, 그 어리석은 생명들이 별을 좀먹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생명을 위해 태어났기에,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그들의 바람을 받아주고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존재죠. 그게 저의 모든 것.”
“.........”
“당신과 만나기 위해, 지금 이 곳에 있기 위해 태어난 존재, 저는 그것을 위해 태어난 존재랍니다. 당신의 마음도, 생명도 빼앗지 않아요, 그저 들어주면 충분할 뿐.”
***
로스엔젤레스 협정(Los Angeles Accord, LAA)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정치-군사조직.
워싱턴-뉴욕-시에틀 연쇄핵테러 및 런던 공습 사태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대테러 협의체였던 이들은 최대 피해자인 미국의 임시수도 로스엔젤레스에서 협정을 맺었다.
협정의 가맹국은 미합중국, 알비온 연방, 앵글로노르드 연방, 스웨덴, 유럽연방, 스위스, 비잔티움 공화국, 히스파니아 공화국, 인도 연방, 고려연방, 인도네시아 연방, 필리핀, 그리고 중화연방 소속의 도시국가 전부가 있다.
전 세계에서 한가락하는 국가들 대부분이 참여했고, 상임이사국 중 다뉴브 연방을 제외한 전체 국가가 가맹했다.
국력에 따라 발언권은 당연히 차별화되었다.
예를 들어 협정의 의사결정기구는 항상 세 계층을 가지고 있었다.
미합중국, 유럽연방, 비잔티움 공화국, 히스파니아 공화국, 인도연방, 고려연방, 앵글로노르드 연방, 알비온으로 이루어진 8개의 이사국.
그리고 스웨덴, 스위스,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나머지 잡다한 국가들로 구성된 일반 가입국들.
마지막으로 중화연방 국가들이 전부 해당되는 소도시국가들.
이 도시국가들도 내부적으로 세 가지 분류를 따로 두고 있는 판이었다.
당연하지만 민족적으로 가장 머릿수가 많은 한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들이 가진 인구와 경제력 등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도 가입 자체는 받아주되 이들이 발언권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도록 타 국가들이 견제한 결과였고, 결국 실질적으로 조약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8개의 이사국이었다.
애초에 의장국을 정하는 투표권도 이사국에게만 있는 판이었다.
그게 불공평하다고 불만을 품더라도 로스엔젤레스 협정을 탈퇴하면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더 많기에, 거기에 더해 애초에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여도 나갈 때는 아닌 협정이기에 협정은 유지되고 있었다.
***
한때 베이징이라고 불렸던 이 도시는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감돌고 있었다.
초대형 화학테러로 유령도시가 된 베이징은 탄저균 테러로 비슷한 꼴이 난 난징, 흔적만이 남은 뉴욕, 워싱턴, 시애틀과 함께 테러와의 전쟁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1987년 제노바 회담에서 상임이사국들은 기존의 연방 체제, 1만 개 도시로 갈라놓은 체제가 복수심에 매몰되어 벌어진 비현실적인 분할 유지 시도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제노바에서 상임이사국들은 기존의 1만 개 도시를 통폐합해 160개 대도시로 통합하고, 해당 도시의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는 전부 무주지이자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으로 돌리는 데에 합의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전히 서방 국가에 대한 중국인들이 민족주의적 반감이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기에 이는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대도시 중 4개가 지도에서 사라졌다.
베이징과 난징에 전례없는 규모의 화학테러와 탄저균 테러가, 그리고 우한에서는 원자력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앞선 두 개의 도시는 거주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뒤 거주 불가능 판정을 받아 인근 지역에 흡수되었고, 우한과 영향권에 들어간 충칭에서는 거주민들 전부가 국제연맹이 마련한 임시 거주지인 인도네시아로 강제로 떠나야 했다.
그래서 현존하는 도시는 156개. 그나마도 남미, 아프리카 등으로 이민하는 인구가 많아 인구수가 되려 줄어드는 경우도 있었다.
유럽연방을 비롯해 2차 세계대전 연합국은 1963년 싱가포르 화교 폭동 사건을 계기로 1967년에 로잔 조약을 체결, 1968년 이전에 해당국의 국적을 취득한 경우까지는 묵인하되 그 이후로는 적국조항의 적용을 받는 국가로부터의 이민 행위를 무기한 불허하는 협약을 발효했다. 그러나 64년 소비에트 연방은 적국조항의 적용을 받지 않기로 의결된 관계로 실질적으로는 중국만을 겨냥한 조치였다.
이 조치의 예외는 해당국 남성과 결혼한 적국조항 적용국 국적의 여성뿐이었다. 그나마도 이혼할 경우 국적이 박탈된다.
전 세계 각국이 싱가포르 화교 폭동 사건을 계기로 중국인들이 인구와 출산율을 무기로 자국 내에 쳐들어온 뒤 독립하겠다고 날뛰거나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을 악용해 국가 정체성을 갈아치우려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 것이었다.
이 조치에 동참하지 않은 국가는 아프리카와 남미 국가들 뿐이었고, 이런 지옥에서 탈출하고자 한 중국인들은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남미가 미합중국 핵 연쇄테러 사건으로 인해 테러와의 전쟁의 폭풍의 눈이 되자 대부분은 남미보다는 아프리카로 발길을 돌렸고, 이로 인한 인구 유출은 중국 내의 출산율이 결코 낮은 편이 아님에도 전체 인구를 감소시킬 지경이었다.
아무튼, 단 한 가지는 명확했다.
현재 베이징에 들어가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었다.
사실 사전 지정된 도시의 범위 밖을 벗어나서 거주하는 것 역시 명백히 불법이었기에, 이들을 색출하는 것도 평화유지군의 임무였지만, 오염된 도시는 더 심했다.
토양과 공기가 오염되어 있고, 차라리 들어가서 죽어버리면 다행이지만 죽지 않고 나와서 적절한 조치 없이 돌아다니며 오염을 확산시키는 게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로스엔젤레스 조약은 비정규 조직인 순찰대를 정기적으로 편성해 난민들을 체포하고는 했다. 그들을 위해서, 그리고 공익을 위해서였다.
“여기는 해치백 1-2, 1-3 응답하라.”
“여기는 1-3, 무슨 일인가?”
“감지기에 뭐가 잡힌다. 북서쪽 16km, 그쪽 기준으로 정북쪽 12km다.”
“잠시 기다려라....... 음, 적외선 센서로 해당 지역을 스캔했지만 아무것도..... 잠깐.”
통신이 잠시 끊기더니, 무전이 다시 왔다.
“여기는 해치백 1-3에서 전 통사에게, 적외선 차폐 장비를 갖춘 것으로 추측되는 존재가 0786230 지점에 있다. 숫자, 전투능력 전부 불명이다. 대보병용 레이더를 이용해 확인했다.”
“여기는 옵티카 4, 우리가 제일 가까이 있다, 도보로 수색을 진행하겠다.”
M8A4 소총을 꺼내든 유럽연방군 병사들이 빠르게 차량에서 뛰어내려 대열을 갖췄다.
“3미터 간격 유지해, 수색 패턴 에코 찰리.”
레이저 조준기를 켠 병사들은 부피감마저 느껴지는 안개를 뚫고 전진했다.
“여기는 해치백 엑츄얼, 우리가 지원하겠다. 현재 차량에서 하차한 후 박격포대 전개 중.”
유럽연방군의 FAB03 소총에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헝가리 기술자가 개발했다고 알려진 M90 불펍 소총으로 무장한 101공수사단 예하 ‘해치백’ 팀은 즉시 81mm 박격포를 전개했다.
보통 난민들을 정리할 때도 가끔 총을 쏠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난민들이 문제가 되는 건 그들이 간혹 소총이나 화염병 등으로 저항하는 게 문제고, 지금은 정확한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적외선 위장막을 갖춘 전력이 잠입해 있는 것이다.
적외선 위장막은 어지간한 군벌들은 손에 넣지도 못한다. 비싸기도 비싸거니와 관리도 어렵고, 무엇보다 판매 자체가 되지도 않는 품목이다.
그런 물건이 ‘우연히’ 여기서 굴러다닐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물건을 가진 자들이 일반적인 화력만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더더욱 떨어졌다.
“LAAF(Los Angeles Accord Force : 로스엔젤레스 협정군)다! 손 들어!”
“저항하면 발포한다! 손 들고 나.........”
-타타타타타타타타타!
자동화기 총성이 울리고, 폭음이 들렸다.
“빌어먹을! 수류탄을 가지고 있다!”
“해치백! 즉시 지원 바란다! 적 좌표 변동 없음! 화력지원 임무! 데인저 클로즈!”
“귀소의 위치와 너무 가깝다!”
“지금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냐! 쏴!”
“알겠다. 발포하겠다!”
잠시 뒤, 포성이 울려퍼졌다.
***
“101사단과 12여단 병력이 미확인 세력과 교전했습니다.”
“피해도 제법 컸습니다. 이게 단지 난민들의 장비 수준이 강화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세력이든지 간에 문제가 심각합니다.”
“난민들에게 첨단 무기를 공급하는 별도의 세력이 존재하든가, 아니면 누군가가 국제연맹 협약을 어겼다는 의미지.”
어느 쪽이든 간에 심각한 외교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난민들이 중화기와 위장장비를 손에 넣었다면 이는 국제연맹의 무기거래협약에 대한 위반행위이며, 다른 세력이 베이징을 돌아다녔다면 이는 곧 국제연맹 위임통치력에 미허가 군사세력이 불법침입을 감행했다는 의미.
둘 다 국제연맹이 뒤집어지고도 남는 문제다.
“설마 난민들이 자체적으로 그 정도 무장을 제작해서 보유했다고 하지는 않겠지.”
백 번 양보해서 자동화기와 탄약 조달쯤은 어떻게 된다고 하자.
하지만 도대체 장갑차를 가져온다는 말인가.
“유럽연합 정부는 일을 크게 키우기를 원하지 않는답니다.”
“왜?”
“....... 이건 기밀 사항입니다만, 알아두십시오. 현재 나폴레옹 6세 전하께서 위독하다는 미확인 정보가 있습니다”
“........ 어느 정도인가.”
“사흘을 넘기기 어려우시라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입헌군주라고 한들, 초강대국의 군주의 죽음은 그만한 충격을 동반한다.
“내각이 얼마 전 불신임되었는데 지금 황제가 교체된다는 건 큰 악재입니다. 가뜩이나 나폴레옹 6세 폐하 이후로 보나파르트 왕조가 손이 급격하게 귀해진 판인데.......”
황태자는 외아들이고, 그 황태자도 40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아직 어린 늦둥이 딸 하나만 겨우 낳은 판이었다. 게다가 황태자비는 첫 자시글 낳았을 때 나이가 너무 많아서 새로운 자식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혼을 하고 새 아내를 들인다면야 가능할지 모르지만, 애초에 이혼이 불가능하다.
가장 큰 문제는 황태자비의 가문이었다.
오라녜나사우 가문.
네덜란드 대공가의 현 가주이자 네덜란드가 독립해 있었다면 여왕이 되었을 이.
정통성 강화 및 공화주의 세력의 약화를 위해 네덜란드의 전 왕가와 피를 섞어 동군연합을 결성하려 했던 보나파르트 왕조의 입장에서는 둘 사이의 자식을 제외한 차차기 왕위계승자를 고려하기 어렵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