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외전 : 공산주의의 황혼(1)
폴은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추락한 헬기에서 기어나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몇 발자국을 걸은 그는 멍하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너무나도 거대한 버섯구름.
그리고 그의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방사능 먼지들.
건물 하나가 핵폭발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는 몰랐다.
그저 걸었다.
몇 발자국이나 갈 수 있을지는 그도 모르지만, 방향도 모르고 그저 걸었다.
멍하니 버섯구름을 눈에 넣은 그는 자신이 한 놀이터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숙이자, 바닥에 나동그라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방사능 화상을 입고 죽어가고 있는 다른 헬기의 조종사였다.
저 멀리에서 희미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환청일까.
“커헉!”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지는 바람에 쓰러졌다.
충격은 적었다. 바닥에 쓰러진 조종사를 깔아뭉갠 것이었다.
“아프다.”
희미한,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였다.
조종사였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고, 말을 할 수 있었다.
“...... 하...... 하하.”
그리고 그들도 깨달았다.
“여긴 어디지?”
“모스크바 공설 체육관,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한 위치는 거기인데.....”
“하, 그래.”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어디서 뒈지는지는 알고 죽고 싶었거든......”
답이 없었다.
“미셸......”
딸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른 폴은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
로마, 유럽연방 회의장.
상임이사국 5개국의 특명전권대사가 전부 모인 긴급회의장은 침울했다.
유럽연방 대사가 씹어뱉듯 말했다.
“이제 어쩔 겁니까.”
미군 다수가 사망했다.
그것만이면 상관없다.
하지만 거기에 러시아인들 수백만도 사망했다.
“독수리 발톱 작전은 완전한 실패입니다. 모든 게 다 잿더미가 됐어요.”
“적십자를 통한 인도적 지원을......”
“핵사용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합니다.”
“대가를 대체 무슨 수단으로 치르게 한단 말이오? 폐허가 된 모스크바에 핵을 다시 쏴야 합니까? 아니면 러시아 공화국의 주요 도시나 군부대를 핵폭격할까요? 재도 못 남긴 자들의 시체를 꺼내 전범재판을 할까요? 지옥에 가서 그들의 영혼을 내놓으라고 할 겁니까?‘
“즉시 이 광기를 멈춰야 합니다. UN 결의안을 통과시킵시다. 안전보장이사회와 총회 동시통과 정도는 해야 합니다.”
“어떤 결의안입니까.”
“즉각적인 내전의 중단, 6개국의 분할과 UN 핵확산방지위원회의 핵사찰.”
“분할이면.”
“러시아 공화국, 아르항겔스크 공화국, 코사크 공화국, 카잔 공화국, 코미 공화국. 시베리아 연방. 이 여섯 세력 간의 현 상태에서의 종전을 UN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겁니다.”
“동의합니다.”
“본 연방 역시 동의합니다.”
5개국 중 3개국은 시원스럽게 동의했다.
’전쟁을 더 끌어서 욕밖에 먹을 게 없다.‘
’얻을 게 없어, 대량살상무기가 계속 사용되면 당장 안전보장이사회의 지위까지 위태로워진다.‘
침묵하는 국가는 둘.
미합중국, 그리고 고려연방이었다.
미합중국은 핵이 터지면서 인명피해를 내고 위신을 깎아먹은 당사자였고, 고려연방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관계로 실질적으로 건국 시점부터 주적으로 소련을 상정해온 국가.
당연히 신중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차피 모스크바가 날아가면서 연방은 존속할 구심점까지 잃어버린 상황, 일을 더 꼬이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이 상태에서 모든 것을 ’일시정지‘시키자는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물론, 그건 대전제일 뿐이었다.
세부적인 수습을 어떻게 할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크고도 많았다.
“키로스 사회주의 연방은 북아프리카의 사회주의 형제들을 연방에 받아들일 예정입니다. 북아프리카에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의 연방의 확장에 대해 타 상임이사국들이 동의한다면 키로스 사회주의 연방은 유럽연방의 제안에 찬성하겠습니다.”
“인더스 연방에서의 분리독립 여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더스 전 지역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인도 연방과 인도차이나 연방으로의 분리 안을 표결에 붙인다는 전제 하에 고려연방은 이에 동의하겠습니다.”
레닌주의는 실패했다.
명백히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몰락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닌, 트로츠키-이슬람주의를 택한 키로스 사회주의 연방 역시 간신히,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처지.
이미 이번 사태를 계기로 조금씩 민낮이 드러난 키로스의 실태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전과 외국의 침략을 제외한 모든 문제는 다 일어나고 있었다.
파탄난 경제, 자격 미달인 지도자. 국민 대다수에 대한 심각한 감시와 탄압, 만연한 부패.
경제노선의 총체적 실패, 병영국가화의 폐혜, 특권층의 부패, 바닥난 국고, 자연재해까지.
문자 그대로 중심이 되는 공산당 중앙위원회만 붕괴되고 핵무기만 사라진다면 멸망은 순식간일 지경까지 된 것이다.
다르게 말해 전략핵사령부가 제압되고, 당 중앙위원회 위원 40여 명만 확실하게 제거한다면 국가를 충분히 공중분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 서방 정보국들의 결론이었다.
속칭 무함마드-트로츠키주의, 이슬람 공산주의는 이미 모든 이들에게 이념으로써의, 사상으로써의 매력도, 종교로써의 매력도 소진된 지 오래였다.
바로 그 이념 아래 수십 년간 착취당하다 보면 좋든 싫든 서방을 동경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방 정보국들은 도리어 이 정권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상임이사국의 일좌가 비는 것 따위는 상관없다.
진정한 문제는 핵무기다.
물론 키로스는 제대로 된 핵 투사수단이 없다. 기껏해야 폭격기 정도.
하지만, 붕괴 후의 혼란 속에서 핵무기가 한 발이라도 유출되면 대재앙이 될 것이기에, 밀실회의를 거친 4개국, 고려, 미국, 유럽연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키로스의 마지막 숨은 붙여 놓아야 한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인간이 의견이 일치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핵무기의 유출 따위에 관심 없이, 키로스의 부패하고 타락한 수뇌부를 저주하는 이들은 어디에든 있었기에.
***
키로스의 반정부세력은 크게 셋이다.
먼저, 기독교계 중심의 반정부세력, 오랫동안 키로스의 골칫덩어리로 군림해 온 자들로, 발칸 방면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작정하고 그들을 숨겨주는 탓에 그들을 다 죽이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다.
당연하지만 진짜 다 죽이려고 했다가는 반드시 내전이 날 테니, 유화책을 써 가면서 간신히 유지해왔다.
그리고 두 번째, 개혁파였다.
젊은 학생들이 주축이 된 개혁파는 문자 그대로 서구 중심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는 주의였다.
20세기의 메이지 유신이라고 할 만한 이들의 판단은 단순했다.
단지 기술만을 베껴와서는 안 된다.
종교, 문화, 모든 걸 버리고, 모든 걸 뒤바꾸어 유럽과 미국과 같은 서방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 몰락한다는 주장이었다.
어설프게 종교와 구태와 새로운 방식을 결합하려 했던 자신들과 이스라엘, 인더스 연방은 비참하게 몰락했고, 서구식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갈아치운 고려는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겉껍데기만 서구화되었던 중국은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가 패배해 비참하게 몰락했고, 타타르의 멍에를 끝내 벗어던지지 못한 러시아는 소련이 되었다가 여러 개로 쪼개지면서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자신들의 모든 것은 구태의연한 것이고, 정체고, 구식이며, 하루빨리 내다버려야 하는 것.
서양의 문명, 기독교문명, 물질문명, 기계문명은 하루빨리 흡수해 체화시켜야 하는 것.
손에만 기술이 들려 있고 사고방식이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 효과가 없으니, 서구에 개혁개방을 한 뒤 그걸 기초로 나라를 재건하자는 주장이엇다.
그리고, 개혁파이기는 하되 이들과 완전히 정반대되는 의사를 표현하는 자들이 있었다.
다름아닌 복고파 공산주의자였다.
“레닌은 틀렸다, 트로츠키도 틀렸다. 애초에 우리는 방향을 잘못 잡았다!”
“마르크스 선생의 가르침을 저들이 왜곡했다. 진정한 공산주의가 손상되었으니 도대체 무슨 수로 세계혁명을 달성했겠는가?”
“지금까지의 모든 공산국가는 이단이었다! 정통 공산주의를 통해 진정한 혁명을 완수하자!”
의외로 이들은 동조자가 많았다.
민간에서부터 당 간부들까지도 은근히 퍼져있었고, 마르크스 서적을 탐독하는 건 공산국가에서는 당연한 일이었기에 이들을 딱히 재재할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삼은 국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탐구하고 자본론을 읽었다는 이유로 체포한다? 그런 코미디가 어디 있는가. 이슬람을 국교로 한 국가에서 코란을 공부했다고 잡아가는 꼴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와 지금의 연방과의 괴리감을 강렬하게 느낀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국가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심각하게 변형되었으니까.
그리고, 당조차도 알지 못했지만, 진정 연방을 전복시킬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 세 번째 부류였다.
***
국제연맹 공공보건서비스기구-적십자 캠프. 키로스 연방.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증기에 방제약을 섞은 가스가 뿜어지고, 불도저들이 우르릉 소리를 내면서 땅을 뒤엎었다.
국제연맹이 비정치적으로 결정한 몇 안 되는 사안 가운데 하나.
모기의 멸절작전을 진행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대작전의 일환이었다.
사람들은 모기를 피 빠는 곤충, 물리면 가려움, 앵앵거림 정도로 이미지화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모기는 21세기 기준으로 1년에 75만 명을 죽인다.
인간이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다지만, 그렇게 죽여봤자 1년에 47만 명이다.
설령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모기가 인간을 죽이는 수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보다 더 많다는 것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말라리아, 황열병, 뎅기열, 일본뇌염, 지카 바이러스 등등.
이러한 온갖 종류의 바이러스를 옮기고 다니는 모기를 지구상에서 박멸하고, 모기과에 속하는 생명체를 지구상에 단 한 개체도 살려두지 않게 만든다는 결의안은 국제연맹을 통과했다.
아무튼 간에 사람을 살리는 일이지 않는가.
하지만 한계가 있다.
고인물을 제거하고, 서식지를 파괴하는 정도로는 모기를 완전히 방제할 수 없다.
유전자 조작된 모기를 풀어 모기가 장구벌레 시기에 몰살당하게 만들거나, 막대한 양의 약물을 현지인들에게 배급해나갔다.
도시 등에서나 통하는 방법이지만 특수한 약물을 사람들이 복용하면 인간은 멀쩡하지만 그 피를 빤 모기에게는 독약으로 작용해 죽게 만들어 인근 지역의 모기의 씨를 말리기도 하고, 포위 방제와 봉쇄전략까지 동원해 가면서 모기들을 박멸해 나갔고, 현재 국제연맹과 적십자에서는 대략 99.995%의 모기 개체가 박멸되었다고 보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못 찾은 놈들이 있을 수도 있고, 곤충이라는 특성상 방제를 소홀히 하면 늘어나는 건 순식간이니까.
하지만 산술적으로 현재까지의 진행을 보았을 때, 자연이 얼마나 파괴되든 모기를 멸종시키고 본다는 식으로 무차별적으로 밀어붙인 결과 별 문제가 없다면 밀레니엄 이전에 모기를 역사 속의 한 페이지로 밀어넣을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고는 있는 상태였다.
아무튼, 전 지구상, 심지어 남극과 북극에서도 이런 방제 프로젝트는 진행되고 있었기에 이들 직원들은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악용되기도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