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외전 : 소비에트 내전(1)
“귀국의 의사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본국에게서 충분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의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꼭 영토여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국방이 불안하다면 고려연방과의 국경에서 300km까지의 인더스 영토를 비무장지대로 설정하겠습니다.”
“현재 인더스 연방은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어 배상금을 일시에 내기 어렵습니다. 원하신다면 10년에 걸쳐 배상금을 내되, 액수를 5배로 올릴 것이며 연체될 경우 이에 대한 이자도 지불하겠습니다.”
인더스 연방은 어떻게든 배상금으로 끝내기 위해 발악했지만, 이미 전 세계에서 ‘영토 좀 뜯기는 정도 가지고 적당히 버텨라’라는 식의 압박이 들어오고 있었다.
명백히 명분이 고려연방에 있기는 했지만, 공산권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계속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엔 상임이사국이 명분까지 쥔 상태에서 상대를 윽박질러 전쟁을 강제로 종결시킬 수도 없으니 쳐맞을 짓을 했고, 신나게 쳐맞은 인더스에게 영토랑 배상금을 상식적인 선에서 내주라고 압박하는 게 전쟁을 종결시키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인더스는 결국 굴복했다.
***
유럽연방, 파리.
중재를 이끈 유럽연방에서 맺어진 파리 조약은 전범의 처벌, 영토 할양과 배상금 지불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그 조약의 서명에 앞서 벌어진 오찬에서, 나폴레옹 6세는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주변국과의 전쟁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죠.”
할아버지가 오래 재위한 군주로써 신기록을 경신한 탓에 너무 나이가 든 상태에서 황제가 되어 역사상 최단 기간 재위했던 자신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나폴레옹 6세는 그렇게 말했다.
“프랑스 제국과 독일 제국, 저지대, 이탈리아는 반목했으나 지금은 하나가 되지 않았소?”
사실 아직이기는 했다.
보나파르트 왕조는 나폴레옹 7세가 될,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나이인 나폴레옹 6세의 장남과 갓 태어나다시피 한 오라녜나사우-보나파르트 가문의 장녀이자 네덜란드 공주이자 1순위 왕위계승자인 요한나를 맺어주어 유럽의 황제 작위에 정식으로 네덜란드 왕위를 통합하고자 했다.
독일이야 그럭저럭 합리적으로 통합되었다지만 네덜란드 왕실과 프랑스 황실은 사촌간이었고, 관계 설정이 애매한 감이 있었기에 아예 합쳐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경우 이탈리아의 명목상 국가원수인 교황위와 황실을 통합할 수는 없으니, 교황이 영구히 교황령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과거 네덜란드 왕실이 가졌던 지위를 대신해 네덜란드 왕위가 정식으로 통합된 상태에서 보나파르트 왕조가 단절될 경우 교황이 보나파르트 가문이 가졌던 유럽연방의 상징적 국가원수 직위를 넘겨받아 교황의 당연직에 포함해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통해 애매한 지위에 있었던 네덜란드 왕실과 교황청의 세속적 지위에 대해 합의함으로써 별다른 문제만 일어나지 않아도 수십 년 내에 유럽의 통합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태어난 지 10년도 되지 않아 평생의 반려자가 정해진 한 쌍의 어린아이들은 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당혹스럽기는 하겠지만 애초에 정략혼 아닌가.
하지만 그게 정해졌다는 사실만으로 유럽의 통합은 기정사실이었기에, 나폴레옹 6세는 유럽연방의 통합을 자축할 수 있었다.
자기 아들 대, 늦어도 손자 대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유럽은 완전히 통합될 테니까.
나누어지지도 분리되지도 않게 말이다.
오찬은 끝났고, 서명시간이 다가왔다.
어차피 합의는 다 끝나 있었으니, 서명만 하면 되는 상황.
양국 정부가 서명을 위해 자리를 잡았을 때,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황제 폐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
“소비에트 연방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소비에트 연방 내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조직되었다고 소련 국영 언론에서 포고되었고, 고르바초프가 건강상의 문제로 사임했다고 선언했습니다.”
“뭐?”
“아무래도, 인더스 연방의 패전이 예상보다 소비에트 연방에게 심각한 자극이 된 듯 합니다.”
“........... 현재 상황은? 고르바초프는 살아 있나?”
“알 수 없습니다. 현재 정보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재 여러 정황상 군부와 KGB가 손을 잡고 반역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고, 그 외의 정보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
“고르바초프 씨, 당신을 연금하겠소.”
“지금 자네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아는가? 이건 반역이야!”
“반역?”
콧방귀를 뀐 바클라노프 장군은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이건 반역이 아니오, 모든 걸 올바르게 돌려 놓는 일이지.”
“지금 뭐라고 했나?”
“혁명동지들이 반동들의 공격으로 몰락하는 동안,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핵무기 개발까지 포기하려 했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역 행위요.”
“말해보게, 그럼 연방에, 우리에게 다른 길이 남아 있었나?”
“그렇소, 남아 있소, 당신은 보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내가 그 방법을 고민해보지 않은 줄 아는가?”
“적어도 우리는 당신보다는 더 과감할 수 있소. 우리는 당신같은 겁쟁이가 아니니까.”
쿠데타 지도층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서기장 동지, 역사가 우리를 변호할 것이오.”
“나는 반대로 장담하지, 우리의 후손들이 자네들의 어리석음을 심판할 걸세.”
***
소련 해군 전함 소비예츠키 러시아(소비에트 러시아). 큐슈.
16인치 3연장 3기, 6인치 3연장 부포 8기를 탑재한 소비예츠키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의 잔 다르크와 소비예츠키 소유즈의 동귀어진 이후 건조된, 세계 최후의 전함이라 불릴 만한 전함이었다.
이후 연방 해군 총기함으로써 취역해 10여 년 간 연방군의 기함으로 존재해왔다.
소비예츠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이 가진 러시아로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전함은, 지금 해상에서 10척의 군함과 대치를 벌이고 있었다.
“전 러시아 함대에 알린다. 본인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겸 연방 부총리다.”
“현재 귀 함대는 모스크바에 있는 쿠데타군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동지께서는 무사하시나, 연금되어 계신다. 연방 국방부 제1부위원장 올레크 바클라노프가 서기장 동지를 감금했으며,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역시 그들과 한패이며,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금 귀관들의 곁에 있을지도 모르지.”
“그 이유 여하에 막론하고, 우리는 이 비합법적인 쿠데타와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주의를 막지 못한다.”
“전 연방의 해군 장병들이여, 반헌법적인 쿠데타를 일으킨 저들의 결정에 불복하라. 그리고.....”
순간, 지직거리면서 통신이 끊어졌다.
강력한 ECM 전파가 옐친의 연설을 틀어막고, 다른 주파수로 통신이 들어왔다.
전 러시아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기함의 통신 설비를 총동원해 증폭시키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함대 주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출력이었다.
물론 주파수가 달랐기 때문에, 긴급 출동한 함선들과 항공기들은 다 들을 수 있었다.
긴급 출동한 공군의 MIG-MFI 스텔스 전투기들도 대함미사일 사거리 내에서 공격을 하지 못하고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는 기함 모스크바다. 옐친 대통령을 적으로 규정한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명령은 지엄하다, 그를 사살하라.”
“하지만 제독님.”
“이건 명령이다. 소비예츠키 러시아를 격침하라! 보리스 옐친은 반역자다. 반역자에게 그 죄에 걸맞는 최후를 안겨 줘라!”
모스크바함에 탑승한 제독은 구국을 위해 쿠데타군에 동조했고, 당연히 옐친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이 통신은 소비에트 연방 전역으로 송출되고 있었고, 현지의 담당자들이 급하게 검열했다고 하더라도 일부 통신이 뚫리는 걸 면할 수는 없다.
거기에 더하자면, 서방 역시 소비에트 연방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현재 어떻게든 쿠데타군과 서방 정부가 외교 라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쿠데타군이 사실상 쿠데타에 성공했다는 착시 현상에서 비롯된 것.
계엄령과 시위로 인해 대부분의 휴민트들이 잡혀가지 않았다고 해도 보고를 올릴 수가 없었다. 사실 핵심적인 정보를 전달할 만한 지위에 있는 자들은 서방의 스파이가 되었든 아니든 간에 전부 옴싹달싹 못하고 있는 판이니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대사관 역시 봉쇄된 상태로 교민 보호에나 총력을 기울이고 방송에만 귀를 기울여야 하는 형편이니, 위성정찰이나 도청, 공식 발표 외에는 제대로 된 정보를 습득할 수단이 서방은 거의 없을 것이다.
폭동에 연방 전체로 번지는 것만은 막기 위해서 군부가 통신망을 대부분 차단해버리기도 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옐친이 떠들게 놔둘 경우 아직 고르바초프가 연금되어 있을 뿐 직무 수행이 가능한 건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군부도 완전 장악은 실패, 연방 시민들 역시 결코 쿠데타 세력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서방 세계에도 알려질 터.
그렇게 될 경우, 위원회는 몰락하거나.... 못해도 더 큰 수준의 양보를 해야 할 게 뻔했다.
그 양보는, 곧 국익의 손실에 직결되는 사안이다.
저 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들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 연방의 미래를 팔아넘길 수 있을지 모르나, 그들은 아니었다.
설령 러시아인들에게 인기가 제법 있는 편인 옐친을 죽이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될지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애국자라고 그 누구보다도 확신하고 있었기에.
국가를 사랑한다는 자들이, 자신의 안위를 어떻게 국익보다 우선에 둘 수 있겠는가.
이렇게 위험한 일에 손을 담근 것 역시, 그들 스스로의 생각에는 한 점의 권력욕도 없이, 오롯이 애국심만으로, 연방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과 지위쯤은 초개처럼 던져버리겠다는 각오로 뛰어든 것이었는데, 후폭풍이 우려된다고 해서 나라를 말아먹는 방송이 전 세계로 송출되게 놔둬서는 안 되었다.
위원회의 요구는 생포였지만, 전함을 나포할 자신도 없고, 항복을 받아낼 자신도 없었고, 옐친이 그 요사스러운 주둥이를 뭐라고 털지 모른다.
그러니 죽여야 했다.
잠시 뒤, 모스크바 함의 수직발사관에서 1톤 탄두를 단 네 발의 대함미사일 마하 4의 속도로 뿜어져 나갔다.
변변한 미사일 방어 체계를 보유하지 못하고, 덩치도 큼지막한 소비예츠키 러시아는 수동식 대공포를 쏘아댔지만, 미사일일들은 옅은 탄막을 무리없이 날아갔다.
그나마 오랜 경제위기로 인한 관리 부실 탓에 미사일은 제대로 된 성능을 내지 못했고, 두 발의 미사일은 유도장치 손상으로 인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거나 물 속에 쳐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두 발의 미사일은 소비예츠키 러시아에 적중했고, 이내 소비예츠키 러시아는 탄약고가 유폭되어 버섯구름을 일으키며 굉침했다.
생존자는 소비예츠키 러시아에 탑승하고 있던 사관생도 한 사람과 참모 보직에 있던 중령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무했다.
소련 내전의 첫 번째 피가 흐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