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동지(4)
세상은 변하고 있고,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혁명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 시체 위에 힌두스탄이 세워졌다.
그러나 힌두스탄도 얼마 가지 못했다. 단 3년 만에 대대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이 일어나 인더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졌던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의 영토에, 비슷한 시기 공산 혁명이 일어난 인도네시아까지 통합한 인더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처절한 내부적 숙청을 벌였다.
혁명무죄 조반유리를 외친 인더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는 어마어마한 대혼란이 밀어닥쳤다.
한편, 러시아 공화국에서는 트로츠키가 죽었다.
트로츠키가 사망하자 러시아 공화국은 키로스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국호를 변경했으나, 트로츠키의 유지는 계속해서 이어져가면서 종교색보다는 사상으로써의 전환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념을 둔 내전과 전쟁이 쉴 새 없이 벌어졌고, 여러 신생국들은 혼란에 빠졌다.
남미에서 미국은 반미의 기치를 든 수많은 이들과 맞서야 했고, 미군은 명백히 적대적인 국민들과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다.
알비온 연방에서는 민주 혁명이 일어났다. 이를 공산화의 전조로 판단한 유럽연방과 미군이 긴급 출동해 해상봉쇄를 실시하는 해프닝이 있었으나,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공산화는 결과적으로 일어나지 않았고, 미군과 유럽연방군이 철수하면서 사태는 원만하게 수습되었다.
그 사이에 경사도 있었다.
내가 증조할아버지가 되었다.
내 손주는 내게 증손녀를 낳아주었고,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내 입가에는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 반대로, 만남이 있었으니 해어짐도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황후가 사망했다.
노환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거울을 볼 때마다 내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다.
늙고 쪼그라든 노인, 머리는 반백이 되어 있고, 목소리는 마르고 갈라져나온다.
지병을 가지고 있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갈수록 거칠어지는 손과 늘어가는 주름을 볼 때마다 내 죽음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돌아가게 될까? 아니면 사후세계로 가는 걸까.
난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왜인지 오늘은 내 죽음 뒤의 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 아들놈을 불러다가 그에 대해 이야기하자, 샤를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버지가 이제 와서 왕위를 물려주신다고 해도, 늦었습니다.”
“뭐?”
“제 나이가 몇 살입니까. 제가 즉위해 봤자 몇 년 못 갈 겁니다.”
“그러면 호사가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바로 필리프 녀석에게 왕관을 넘기라는 거냐?”
“뭐, 제가 이제 와서 황제가 된다고 해도 그리 오래 자리에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거죠, 그런 김에 저도 기록 하나 도전해봐야겠습니다.”
“무슨 기록이냐?”
“역사상 가장 나이 많은 황태자? 아니면 가장 늦게 제위를 물려받은 황제?”
그 녀석의 말뜻에, 나는 실소했다.
한 마디로 죽지 말라는 소리였다.
더 오래 살라고.
그래서 오랫동안 제위를 지키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제가 어디서 들었는데, 사람은 마음이 풀어져 버리면 빨리 늙는답니다. 양위하시면 아버지는 정말 할 거 없으시잖습니까.”
대부분의 실무는 저놈이 처리하고는 있다지만, 그래도 황제가 직접 움직여야만 하는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특히 공식 행사 같은 거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 오래오래 자리를 지키고 계십시오, 가급적 꽤 오랫동안 깨지지 않을 기록을 가졌으면 좋겠군요.”
“넌 황태자로 살다 죽을 거냐?”
이제는 내 미래 지식은 전부 낡고 빛바랜 그 무언가에 불과하다.
역사는 완전히 틀어졌고, 내가 나서서 얻을 건 없다.
세계가 아직 혼란하다? 한 10년이면 다 끝낼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느냐고?
전혀 아니올시다.
어차피 10년, 20년, 아니, 냉전이 끝나고 신 냉전이 다가올 시기까지 내가 살더라도.
공산주의가 한계에 부딪혀 자멸할 날까지 내가 산다고 해도.
내 후손들에게 그 업무를 넘겨주는 것, 그리고 내가 그 업무를 계속 해나가는 것.
둘 중 후자가 전자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건 내가 누구보다 제일 잘 안다.
“그래도 이놈아, 무슨 최단기 재위 황제 기록을 세울 것도 아니고 네놈이 나보다 10년은 더 살아야 하지 않겠냐. 무슨 15분 재위하고 나 따라올 거냐?”
“하하, 그러지는 않을 겁니... 아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저기 동방에서는 참척이라고 해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만큼 큰 불효가 없다고 한다.”
“그건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어느 세상이나 안 그러겠습니까?”
“뭐, 그렇지, 아무튼 네놈이 막판에 나한테 불효하고 싶은 거 아니면 좀 참아라.”
“부모를 잃는 건 자식 가슴에 못 박는 일 아닙니까?”
“하여튼 한 마디를 안 지니, 이놈아, 난 지금 당장 네놈과 이야기하다가 쓰러져 죽어도 충분히 호상 소리 듣고도 남아.”
“저도 그리 만만치는 않습니다만.”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언제나 어린아이로 보인다.
손자까지 본 아들을 보더라도, 뭔가 하나라도 더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제국을 수십 년간 지배해온 군주가 사라지게 되면 당연히 혼란이 올 수밖에 없을 터.
내 권위가 하늘을 찌르기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헤르만 괴링이 유럽연방에 가입한 것도 어떤 이유에서든 내게 충성했기에 그러한 것이었고, 네덜란드의 가입은 네덜란드 여왕의 남편이 내 동생이었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서부 산업지대가 쑥밭이 되었고, 네덜란드는 전 국토가 쑥밭이 되었는데 지금 시점까지도 아직도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탓에 프랑스에서 떨어져나가면 그게 더 손해이며, 독일 국민들도 그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샤를.”
“예, 아버지.”
“내가 죽으면, 헤르만 괴링을 암살해라.”
“..........”
“헤르만 괴링은 내게 충성했다. 하지만 그가 네게 충성한다는 보장은 없어, 그리고, 나치당은 위험하다. 훌륭한 도구였지만, 위험해. 제국을 유지시킬 수단은 민주주의뿐이다.”
수많은 역사가 그걸 증명하니까.
과유불급.
너무 많은 권력을 무리해서 잡고 있으려다 보면 스스로 무너지게 된다.
“대놓고 살해하면 안 된다, 사고사로 위장해야 해.”
“이해했습니다. 맨 공국도 없애야 할까요.”
“아니, 그쪽은 신경쓸 것 없다.”
힘러를 몰아낸 하이드리히는 얼마 가지 못해 죽었다.
자기 집무실에서 총에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된 하이드리히의 후계자를 자처한 요아힘 파이퍼는 아돌프 아이히만을 하이드리히 암살의 배후라고 공표하고 약식재판을 거쳐 처형했지만 파이퍼 본인도 폭탄 테러로 사망하는 등 하이드리히가 사망한 뒤 맨 공국은 사실상의 내전에 휩싸인 상태였다.
그러나 하이드리히가 진짜 암살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사실 유지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고 있는 국가의 실태에 좌절해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엇고, 파이퍼가 하이드리히의 유서를 태워버렸다는 소문도 돌고 있는 판이었다.
“연방 탈퇴의 위협이 제일 높은 건 이탈리아다. 알고 있겠지만.”
“절대 경계를 늦추지 않겠습니다.”
“이미 넌 잘 해왔다. 지금처럼만 하면 돼.”
몸에 힘이 없었다.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나는 나직이 말했다.
“그동안 수많은 실무는 네가 해 왔지, 그리고 너는 언론에서도.... 딱히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간에 언론 대응 경험도 많으니 잘 할 거다. 내 할 일은 다 끝난 셈이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 끝나시다뇨, 연방은 오직 아버지의 카리스마만으로 이끌어 온 셈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연방의 시작이자 끝이 아니었습니까. 앞으로 계속 일하셔야죠, 설령 제게 양위하시더라도 끝까지 부려먹어 드리겠습니다. 양위하신다고 해도 제위를 넘기시는 거지 제국원수 직위는 종신직이니 평생 가지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오기로 한 사람이 한 명 있었거든.”
“예?”
“원래는 몇 명 더 부를까 했네, 내 앞에서 그들이 네게 충성을 맹세하게 시킨다면 훨씬 안심이 되었겠지만..... 아니, 그러고 싶긴 하지만, 그건 별 도움이 안 되겠지.”
강압적으로 충성 맹세를 받아내는 것 정도는 별거 아니다.
하지만, 황제에게만 충성하는 제국은 유지되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선택하지 않았다.
제국의 구심점이 황제뿐이라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증명했듯이 유지될 수 없으니까.
물론 우리의 필요성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부활했다지만, 당시의 제국과 지금의 제국은 사실상 별개의 국가였다.
국민국가로써, 연방은 다시 태어나야 했다.
황제 개인에 대한 충성은, 그런 시점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내가 굳이 받아내지 않아도 당연하게 충성해야 하니까.
“평생, 난 따뜻한 것보다는 서늘한 걸 좋아했지, 어쩌면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쉽사리 안아주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체온을 나누기보다는 홀로 떨어져 있는 걸 선호했다.
누군가와 짐을 나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음, 왔군.”
“예? 누가 왔다는 말씀입니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샤를.
그러나, 내 눈에는 보였다.
빛을 등지고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이랬구나.”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 평생에 한 가지 후회되는 게 있다면, 내 아버지께 못할 짓을 저지른 것 같아 평생 그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내 분명히 네게 말해두마, 넌 내게 있어서 자랑스러운 자식이었다.”
“....... 아버지.”
“기다리지는 않으마,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겠다고 했는데, 목적을 잃어버리고, 수단과 목적을 분간하지 못한 끝에 그렇게 맹세했던 내 손에 정작 피가 너무 많이 묻었으니 그 죄가 너무나 무겁구나, 그러니 너는 나와는 다른 곳으로 가거라. 나는 그 죗값을 치러야 할 거 같으니 말이다. 너는 따라오지 말거라.”
“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믿고 가겠다. 그리고 고맙다, 네가 내 아들이어서, 이...... 실패자를 아버지라고 해 줘서.”
“아버지를 누가 실패자라고 하겠습니까.”
“정복을 하고, 전쟁에서 이기고..... 국가를 이끄는 황제로써는 어떨지 몰라도, 나 스스로는 결코 내가 성공했노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구나. 네 어미에게, 너에게, 제대로 된 정을 준 적이 거의 없으니...... 난 실패한 아버지다. 그러나 그런 해준 것 없는 아비라도.... 넌 아버지라 불러주는구나.”
“아버지.”
“다른 아이들에게도 전해 주거라,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내가 그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이다.”
황제의 마지막 말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황제의 손이 툭 떨어지자, 황태자는 비명을 지르듯 아버지를 불렀다.
근위병들과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뛰어들어왔지만, 황제의 눈은 다시는 떠지지 않았다.
1956년 12월 21일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