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동지(3)
“예? 결혼이요?”
조제프는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그래, 결혼.”
어머니는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 할아버지도 나이가 적지 않으시다. 그러니까 가시기 전에 네 결혼식은 보고 가고 싶으시다는구나, 그리고 너도 이미 노총각 소리 듣기는 조금 이르긴 하지만, 아무튼 진작 장가 보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고.”
“크흠, 그게 저는 어.......”
“만나는 여자 있는 거 안다.”
“그게, 네, 여자가 있기는 한데........”
“하급귀족에 부친은 영국인, 모친은 네덜란드 귀족인 혼혈, 다 알고 왔다. 그리고 할아버님도 반대하시지 않으셨다. 신분이 낮으면 낮은 대로 민중에 더 친화될 수 있고, 연방 소속국이지만 프랑스인이 아니라면 그건 그것대로 연방의 결속력을 더 높일 수 있다고. 그리고 하나 더. 가능하면 증손은 보고 가시고 싶으시다니까. 최대한 빨리 청혼해.”
“...... 알겠습니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청혼 대충 하지 마라, 네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로써 하는 말이야.”
“..........”
***
유럽연방이 황태손 결혼이네 어쩌네 하고 오랜만의 가십에 시끄러워진 동안에도 알렉세이 2세 황제는 피곤했다.
유엔 상임이사국도 되었고, 핵개발도 자체적으로 별다른 태클 걸리지 않고 진행하고 있고, 군은 정예화되었고, 기타 등등 잘 지내는데.
자기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로마노프 가문의 적자라는 이유만으로 지랄하는 사람들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이건 완전한 독립이 아닙니다! 코쟁이 황제를 앉혀놓고 독립은 무슨 독립! 황실을 갈아버린 뒤에야 조선은 완전한 독립을......”
“아니, 이쯤 했으면 됐지 뭘 굳이 더하려고, 총리도 조선사람 뽑고 장관도 조선사람 뽑고 의원도 조선사람 뽑았고, 수도도 옮기고, 주류 민족도 우리가 됐는데 이게 독립을 안 한 거면 저기 저 예전에 있었던 잉글랜드도 식민지배당한 건가? 그쪽도 스코틀랜드 왕이 내려와서 지배했잖냐?”
“그건 엘리자베스 여왕이 처녀로 죽어버려서 후사가 없어서 그런 거고, 친척이잖소. 하다못해 최소한 조선 사람과 혼인하는 성의라도 보였어야지!”
“그래서 조선 사람 누구랑? 이왕가도 씨가 마른 지 오래인데. 이제 와서 족보라도 들여다보면서 찾을 거요? 게다가 조선이 그냥 독립하면 저기 저 북쪽 영토는? 당장 만주도 뱉어내야 하는데?”
대충 그런 논란을 겪은 것도 제법 오래된 일이지만, 한 가지는 절감하고 있었다.
황실이 국민들과 유리되어 있다는 것.
‘그렇다고 해도 피를 당장 섞는 건.... 대서방 외교에 대해서 불리할 요소가 크지.’
중국의 만행 때문에 유럽에서 황인종에 대한 여론은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상태.
괜히 유럽연방이나 미국에서 고위급 특사가 오면 총리 놔두고 그가 나가서 맞는 게 아니다. 모양새가 그러니까.
사실 아시아에서 황인들이 국가를 주도하는 경우가 많지가 않다.
서아시아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세상이고 그들의 수뇌는 다름아닌 트로츠키, 게다가 인구 비율도 백인이 대다수이니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거기서 동쪽으로 오면 남아시아인데, 남아시아는 일단 명목상은 유대인들, 그것도 백인 유대인들이 국가의 권력 대부분을 꿰차고 있다. 일단 내전 중이라지만.
그 다음은 구 중국, 독립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류큐, 그리고 고려연방뿐이다.
그런데 중국이 머릿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니 황인종이라고 하면 경멸이 패시브로 박히는 판이다. 나머지 셋은 존재감이 없고.
그런 마당에 로마노프 왕조가 현지인과 혼인한다면..... 귀천상혼도 문제지만 위신이 무너질 거다.
그가 차르니, 밀어붙이면 할 수 있다. 다만 그 깎아먹는 위신과, 얻는 이득을 고려하면......
‘내 손자나 증손자 때나 시도를 해야지, 적어도 고려인들에 대한 국제적 지위가 상승하고, 2차대전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제법 사라진 뒤에나 가능하지, 그 전에는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어차피 시간은 권위를 만들어준다.
고려연방이 선포된 지도 제법 오래된 상태. 사회 주류층은 점차 당연히 로마노프 가문을 받아들이게 되리라.
그러니까 다르게 말해서.
‘지금만 넘기면 어떻게든 된다는 거지, 지금만 넘기면.’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을 넘기기가 힘들어서 문제다.
약 40년만 더 버티면 확실하게 연방 자체도 안정되고, 황실도 연방에 뿌리를 박을 수 있게 될ㄴ다.
적어도 황실 존속은 연방 유지라는 실리적인 이유에서라도 필요하다는 게 정계의 총의지만, 민의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문맹퇴치교육과 입신양명 등의 구호를 내세운 이 나라의 계몽은 제법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고,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국토개발도 속도가 붙었다.
공장이 돌아가고, 제철소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지고, 군대를 키우고. 보통교육을 시도하고.
차라리 저들이 그저 ‘신민’이었다면 편했을 텐데, 저들은 국민이 되어가고 있다.
우민화 정책? 이미 민족성을 자각한 상대에게 외부인이 그래봤자 역효과만 났을 게 뻔했다.
무엇보다 공산주의자들을 사방에 둔 입장에서 빨갱이들이 기어들어올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아니, 이미 기어들어왔다.
“마르크스주의 불온서적의 단속을 오흐라나가, 아니, 국정원이 더 철저히 할 필요가 있어요.”
“이게 이놈들이 표지를 바꿔서 유통하는데, 현지에서는 대강 보고 넘기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단속 기준도 주먹구구식인지라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막스를 마르크스로, 프로테스탄트를 프롤레타리아 비슷한 것인 줄 알고 불온서적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는데, 참.......”
“차라리 그런 경우면 낮죠, 경관들이 대놓고 불온 서적인데도 이게 불온서적인 줄 알아보지를 못해서 넘어가는 경우도 심심찮습니다.”
아무튼 기득권 세력이든, 황실이든 간에 공산혁명은 원하지 않았다.
타협도 하고, 억누르기도 하지만 빨갱이들에 대한 제압은 쉽지 않은 문제.
“빨갱이들은 농담이 아니라 모기와 파리, 곰팡이와 바퀴벌레 같은 놈들입니다. 자연발생이 강력하게 의심될 만큼 사방 팔방에서 솟아나죠.”
괜히 빨갱이들을 때려잡기 위해 유럽의 한가락 하는 나라만 넷이 통일을 선언하고, 빨갱이들이 핵을 만들어 죽창을 꽃는 것만은 막기 위해 국제연맹이라는 기구에 빨갱이들을 위한 자리까지 만들어주는 어마어마한 배려를 했겠는가.
물론 핵죽창을 완성해서 상대가 핵죽창을 완성하기 전에 빨갱이들의 면상에 쳐박아준다면 최고겠지만, 일단 국민들을 설득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적이 핵을 완성하기 전에 유럽연방이 탄도미사일을 양산해서 충분한 수량을 배치할 수 있다는 확신은 아무데도 없었다.
다행히 빨갱이들은 전면전을 하면 핵죽창이 자기들 대가리에 꽃힌다는 걸 인지하고 초대형 사업을 벌여 선전을 해대는 창구로 삼고는 했다.
독일제국의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콩고에 댐을 기어코 완공해 차드호로 물길을 틀어버리는 방법으로 아프리카 중부와 사하라 사막 남부를 녹지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인 유럽연방에 맞서 카타라에 해수를 끌어들이는 공사를 해서 사하라 사막 북부를 녹지화하겠다는가 하면 사해에 해수를 끌어들여 아라비아 사막을 녹지화하는 프로젝트를 공개적으로 실시해 오스트레일리아 에어호에 원자력을 이용한 담수를 들이부어 호주 중부의 강수량을 높이고 있는 유럽연방의 프로젝트에 대놓고 경쟁구도를 내세운다거나.
심지어 핵무기를 개발한 뒤 그걸 토목공사에 사용해서 카타라와 사해로 가는 물길을 파내겠다는 계획까지 가면 참으로 골때리는 상대였다.
이건 명백한 체제경쟁이었고, 원 역사에서 진행된 우주경쟁과 전혀 다르지 않은 돈지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존심 싸움이었기에 양쪽 중 어느 쪽도 물러서려 하지 않고, 사업 규모를 키우고만 있었다.
“적어도 우리는 그런 미친 짓에 끼어들 일 없으니 다행이군. 해 봤자 고비 사막에 나무 심기 정도지, 설마 베링 해협에 댐이라도 놓게 되겠나.”
애초에 베링해협은 그들의 영해도 아니다.
“우리는 핵 억지력을 충분히 확보하고, 그 다음부터는 나라 키우는 데에 집중하면 그걸로 충분하네.”
땅은 넓고 자원은 많고 기술도 슬슬 축적되어 가는데 인구가 모자라다.
“옛날 정치범을 시베리아에 보내듯이 빨갱이를 중앙아시아로 보내서 유형을 살게 할 수는 없겠지.”
“중앙아시아는 바로 그 빨갱이들과 국경을 접한 지역입니다.”
“그래, 그래서 문제지.”
“차라리 다른 잡범들을 보내면 몰라도 빨갱이들은 절대 보내면 안 되는 곳이 중앙아시아입니다.”
사실 동서가 바뀐 러시아라고 생각하면 현재 고려연방의 딜레마도 간단하다.
대충 서울이 모스크바고, 한반도가 유럽 러시아, 만주가 우크라이나, 2차 세계대전으로 손에 넣은 중앙아시아 영토가 시베리아라고 치면 딱 맞는다.
인구밀도도 희박하고 원주민들도 많이 사는 곳.
그리고 간신히 전쟁 중에 미국 도움을 받아 철도는 놓았지만 딱 거기까지인 곳.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제국 말기에나 간신히 놓았으니 그나마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우리랑 국경 맞대고 있는 시베리아도 사람 없는 건 똑같다만.”
애초에 시베리아 지역이 사람 살 곳이 아니기는 했다.
물론, 몇몇 파시스트들은 소련에서 아예 시베리아를 뜯어오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당장 중앙아시아를 쳐먹은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못해 과식해서 배가 터지든 구토를 하든 할 지경인데 시베리아를 논하는 건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는 반응만 얻고 거부당했다.
애초에 지난 적백내전 당시 시베리아를 지키려고 시도하기는 했는데 결국 곳곳에서 방어선이 뚫려 지키지 못한 일도 있었던 만큼, 현 국경이 적어도 당분간은 고려연방의 확장 한도에 가깝다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의 동의를 받고 있었다.
“빨갱이들만 뿌리뽑으면 연방은 앞으로도 탄탄대로네, 빨갱이놀음에 심취하면 결국 소련 아니면 러시아에 나라를 팔아먹게 된다고 선전해서 먹히면 좋겠네만......”
“애초에 빨갱이놀음을 시작하면 애비애미 못 알아보고 조국인지 적국인지도 구분 못하게 되는 게 빨갱이들의 능력입니다. 그런 걸로 선동해서 먹힐 놈들이면 애초에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뜻이지요.”
“그럼 그냥........”
“지금처럼 가급적 불만이 나올 여지를 낮추는 게 낫습니다. 그런 면에서 고려연방은 타국보다 훨씬 우월한 지위에 있죠.”
최저임금과 근로기준법이 존재해 사업주도 적어도 법적으로는 어느 정도 이상으로 임금을 깎거나 과다노동을 강요할 수 없고,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하는 것도 제법 어렵다는 것. 대신 근로자의 재취업도 어렵다는 문제가 있지만, 이런 문제들 때문에 노동자들의 불만이 수면 위로 올라올 위험은 낮았다.
농촌도 저곡가 정책을 보상하기 위해 수매제도를 펼치고 있기도 했다. 이는 캥기는 게 많았던 정부, 특히 황실 측에서 제 발로 내놓은 정책이기도 했다.
불만이 심해지면 죽창이 날아올 가능성이 너무 높다는 걸 인지하자 알아서 기었다고 봐도 좋았다.
그게 안 되는 나라들은 훨씬 많았으니, 고려연방의 처지는 제법 나은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