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170화 (170/200)

170화 낙엽(2)

부산, 고려연방.

고려연방 제 3의 도시 부산에 도착한 조제프는 한숨을 쉬었다.

“으아, 죽겠다.”

땅멀미를 느끼던 조제프는 간신히 비틀거리지 않고 섰다.

항구에는 고려연방의 주력함인 중순양함들이 여럿 보였다.

8인치 속사포를 보유한 미국제 중순양함들은 전쟁 도중 소련의 극동 보급로를 끊어야 했던 고려연방에 대량으로 공여되었고, 현재 고려연방의 주력함이자 해군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 근처에는 구잠함 여러 척이 있었다. 수백 톤밖에 되지 않는 소형 대잠함들은 57mm 대공포와 대잠로켓, 어뢰만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주력함과 그 호위함대를 외교사절 호위에 동원한 유럽연방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물론 고려연방의 해군력은 그리 강하지 못한 편이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전함에서 내리는 조제프의 뒤를 따라 다른 몇몇이 내렸다.

“여기가 고려연방인가, 러시아 제국의 후신.”

“그리고 외삼촌의 나라죠.”

“러시아 제국의 정체성은 이미 로마노프 왕조 그 자체와 쌍두독수리 국장을 제외하고는 사라진 지 오래기는 하지만, 일단 틀린 말은 아니네. 근데 니 외삼촌이지 내 외삼촌은 아니다.”

은근슬쩍 자신의 자매와 자신이 배다른 남매라는 걸 지적한 조제프는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걸어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뒤, 한 남자가 반겨주었다.

“실물로는 처음 보는구나, 조제프.”

“알렉세이 2세 폐하를 뵙습니다.”

차르가 그들을 직접 마중나와 있었다.

잠시 뒤, 차량에 타고 이동하는 동안 조제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요.”

“응?”

“저건 뭔 언어죠? 키릴 문자도 아니고.”

얼핏 보면 알파벳 같은데 얼핏 보면 또 아닌 문자.

“한글 아냐? 이 나라 공용문자.......”

“아니, 한글 아냐. 나도 한글 본 적 있는데 저런 모양 아니었다고.”

“네가 어디서 봐?”

“할아버지가 알려주시던데? 네모지게 생겨서 나름 예쁜 모양이었는데.”

“네모나?”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저건..... 어..... 응?”

근데 뭔가 읽을 수는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한글이 맞다.”

알렉세이 2세가 단언하자, 조제프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저게 어떻게 한글입니까? 알파벳처럼 생겼는데.”

“한글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보면 읽을 수 있을 거다.”

“전 한글 못 읽습니다. 그냥 구경이나 한 거죠.”

“흠. 대충 간단하게 이야기해주자면, 한글은 원래 모아쓰는 글자다, 한자처럼, 네가 아는 게 맞다는 거지.”

“그런데 왜.....?”

“지난 전쟁을 치르다 보니 수많은 문서들을 처리해야 했는데, 이때 한글은 타자기로 쓰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그래서 닥터 최라는 사람이 한글의 문법을 풀어쓰기 방식으로 바꾸고, 글자체도 크게 개량했지, 그래서 이런 모양이 된 거고. 뭐, 음소적 특징이네 뭐네 이야기는 했지만 일단 읽기 편하고 쓰기 쉽고 타자기로 치기 편한 방식이 좋으니까, 전쟁을 치러야 했으니 말이다.”

얼마 전까지 이 나라의 군대는 수백만에 달했다.

고려연방의 역량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규모의 전쟁이었지만, 이겼다. 이기고, 국토는 넓혔으며, 배상금은 뜯어냈다.

그거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우리도 유럽연방과 깊은 관계를 맺고자 할 의지는 있네.”

이게 본론이었다.

한국은 땅은 넓지만 인구는 적고 기술도 없다.

유럽에서 기술을 사오고, 천연자원을 팔고, 산업을 발전시킨다.

“산업이 발전된 지역이라고 해 봐야 한반도, 좀 더 쳐줘서 만주밖에 없네. 대부분의 역량이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정치적인 이유로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정부 요직들을 죄다 차지한 한국계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던 고려연방은 한반도에 대부분의 역량을 집중시키고, 나머지를 종속시켰다.

“미국의 듀이 대통령도 한반도 투자에는 제법 관심이 있네, 가너 전 대통령은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듀이 대통령은 정반대니까.”

‘투자가 는다면, 미국의 영향력이 고려연방에 커질 것이라는 건 뻔한 일. 그건 니들도 싫겠지?’

그러니까 투자 좀 늘려줘라.

이 순간만큼은 황제가 아닌 세일즈맨인 알렉세이는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이 나라가 비록 인구가 적고 그리 부유하지도 않고 변변한 기술도 없지만 지하자원은 많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나. 그리고 소련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지.”

소련의 수도는 모스크바지만, 그 세력은 조금씩 동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종전조약으로 소련 본토는 사실상의 내륙국이 되었다. 게다가 새롭게 생겨난 신생국들에서 모스크바의 거리는 최단거리가 약 300km. 탄도미사일을 비롯한 유럽연방의 전략타격수단에 수도가 노출된 셈이었다.

이미 한 차례 탈탈 털린 소련의 피해의식은 상상을 초월했고, 언제고 자본주의자들이 대 공산주의 십자군을 재개할지 모른다며 막대한 군비를 쏟아붓는 중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모스크바가 안전지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 역시 명확해졌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곡창지대를 상실하고, 철광, 탄광, 석유를 상실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잃고, 기존에 접하고 있던 모든 방면의 바다에서 물리적으로 축출당한 소련의 정치 중심지는 동쪽으로 넘어갔다.

소련의 실질적 수도는 여전히 전쟁기의 사마라 그대로였고, 여기에서 의외로 급부상한 지역이 있었다.

다름아닌 일본 열도.

2차 세계대전의 종전 당시 유럽연방은 어떤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연해주까지 뜯어내면서 정작 일본의 독립은 논의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일본 열도는 월경지로써 소련에 남게 되었다.

소련의 유일한 대양으로의 진출로이자. 가장 큰 경제적 가치를 지닌 땅으로.

원주민들은 단 한 명도 남겨두지 않고 유럽으로 옯겨진 뒤 벨라루스에 살다가 조약에 따라 벨라루스가 독립해나가면서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사라졌지만, 그 대신 강제 이주당한 수많은 백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소련의 해군은 오롯이 일본 열도를 방위하기 위해 존재하지, 애초에 발트 해든, 흑해든, 심지어 카스피 해든, 바다라고 이름 붙은 곳 중에 거기 말고 소련이 접한 곳이 북극해 말고 더 있기는 하냐마는.”

바렌츠 해나 카라 해, 동시베리아, 베링, 오호츠크해와 접하기는 했다. 접하기는.

죄다 꽝꽝 얼어붙은 동네라 그렇지.

그런 관계로 소련이 해군 비슷한 걸 기르고 싶다면 극동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꼭 일본 열도의 경제적 가치를 논하지 않더라도 우크라이나, 캅카스 공화국과 협조해서 볼가 강 따라서 고려연방군이 밀고 올라가면 러시아인들의 간을 쫄깃하게 만들어주고도 남는다.

게다가 산악지대로 가로막혀서 실질적으로 양쪽 모두 공격은 거의 불가능하다지만 저 러시아 공화국의 동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전쟁을 일으킨 대가로 아주 갈가리 찢겨나간 중국 대륙 국가들이 뭉치지 못하도록 독일에 개입하는 리슐리외 체제 시절의 프랑스마냥 개입하는 역할까지 하니 고려연방의 지정학적 가치는 굉장히 크다.

그리고 크니까 유럽연방이 투자를 포기할 수 없는 거고.

적어도 고려연방을 영향권 내에 두어야만 유럽연방의 세계전략이 성립한다.

“가장 급한 게 뭡니까?”

“유럽연방이 우리의 진실된 우방이라면, 그 안보협약에 한 가지 전제를 걸고자 하네.”

“........ 핵이겠죠.”

“소련도, 러시아 공화국도, 미국도, 이스라엘도, 모두 핵무기에 미쳤네, 우리도 핵을 보유해야만 할 상황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핵을 자체개발하려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그러면.”

“유럽연방에 우리가 간도 쓸개도 다 내주기를 원한다면, 그쪽도 그만한 답은 줘야지.”

핵무기 배치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다.

핵무기의 독자적 사용권한, 핵무기의 자체 생산능력과 투발능력 정도는 갖춰야 한다.

핵이 없는 국가는 앞으로 강대국이라 불릴 수 없을 테니.

“하지만 제게 핵에 대해 논의할 권한은 없습니다. 제가 가져온 제안은 다른 방면의 제안이죠.”

“어떤?”

“아시겠지만, 국제연맹이라는 기구가 만들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국제연맹, 그 승전국들의 세계통치 기구 말이지.”

“그렇게 말하셔도 할 말은 없겠습니다만, 네, 그 승전국들의 세계통치 기구는 몇몇 상임이사국들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겁니다. 애초에 그런 협의체니까요.”

총회는 장식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건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들의 의지.

상임이사국 중 하나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유엔은 마비된다.

“상임이사국 자리를 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상임이사국이라.”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가로써의 자격은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 더 크지 않나?”

“이스라엘이 크다 한들 인도 아대륙, 아시아인의 대표로는 손색이 있죠.”

인도와 아시아는 괴리되어 있다.

게다가 유럽연방은 아직 반유대주의적 기조가 남아 있기에, 그 동양의 프로이센에게 상임이사국 자리를 안겨주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미국, 유럽연방, 러시아 공화국, 고려연방, 이렇게 승전한 4국으로 상임이사국을 꾸리자는 거군.”

거기에 부활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포함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거의 거수기겠지만 상관은 없었다.

“손해는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그 체제가 안정되면 국제연맹을 이용해서 핵무기 확산도 통제하겠다는 의도도 명명백백히 보이고 말이네.”

“상임이사국씩이나 되어서 핵개발에 통제를 당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스운 일이죠, 그냥 거부권을 던지면 되잖습니까.”

-핵무기는 우리도 비싸게 주고 만든 건데 그걸 맨입으로 달라고? 상임이사국 자리까지 약속했으면 그냥 그거 먹고 떨어지시지?

“하하, 지난번 티베트-청해 대홍수의 피해복구조차 아직 끝나지 않은 터라....”

-배째.

티베트와 칭하이가 넓긴 한데 거기 사람이 살면 몇 명이나 살고 인공물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피해복구를 운운하는가.

물론 무식한 규모의 홍수기는 했다. 황하의 제방 파괴로 홍수가 터지고 몇 년도 지나지 않아 터진 홍수는 중국 전역에 재앙을 불러왔으니까.

다만, 이는 철저히 인위적인 홍수였다.

미 육군 공병대는 장강과 황하의 물을 틀어버리는 작전을 기획했고, 이를 위해 청해와 티베트 고원 등, 장강과 황허의 상류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핵무기를 기폭시켰다.

그래서 쓰촨에 대한 식수 공급을 통제해버리는 데는 성공했는데. 틀어져버린 물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린 것이다.

황허는 물길이 틀어져 애꿎은 러산 시에 대홍수를 일으키고, 장강도 방향이 틀어져 남쪽으로 흐르게 되어 중국 상당 지역에 막대한 수자원 고갈 사태가 일어났다지만, 연방이 알 바는 아니었다. 중국이 거기에 항의할 처지도 아니고.

꼬우면 항복했어야지.

아무튼 간에, 이 홍수 피해 복구를 핑계로 댄다는 건 배째라는 의미 외에는 없다.

‘상임이사국은 허울뿐, 진짜 세계에서 목소리를 내려면 핵무기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프랑스가 유럽을 사실상 정복한 방법도, 막대한 규모의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도, 공산주의 정권을 붕괴시킨 것도, 핵무기가 있어서 가능했던 거다.’

핵무기 없이는 어떤 국가도 패권을 유지할 수 없다.

그리고, 핵을 가진 자들이 다른 이들이 핵무기를 가지지 못하도록 시도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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