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모래시계(1)
싱가포르, 연합국 점령지.
“심심하다.”
명목상 프랑스 제국의 파견장교로써 별 세 개를 달고 배를 타고 싱가포르로 떠나왔다.
하지만 싱가포르가 태평양 전선 연합군 총사령부였던 것도 옛말이고 상륙이 성공한 뒤 사령부는 홍콩으로 이전한 지 오래.
그러나 홍콩에도 가끔은 공습이 들어왔고, 해로도 그다지 안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는 여기 버려졌다.
어차피 실무진만 가면 되지 얼굴마담이 뭐하러 가냐는 이유, 그리고 유사시 제위 계승 서열 2위가 폭사하기라도 하면 진짜로 뒷감당이 안 된다는 현실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이 싱가포르에 붙박이로 남아서 서류나 뒤적이는 신세가 되었다.
사실 그 서류도 뭔가 앉아 있는 동안은 일하는 티 비슷한 거라도 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탓에 주워와서 읽어보는 거였다.
커피와 담배로 연명하는 좀비들이 한가득한 지휘부에서 혼자 출근 시간부터 퇴근 시간까지 멍하니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었으니 말이다.
그 서류들 대부분은 전투보고서와 그 분석, 현재 전쟁의 진행상황, 이에 관련한 새로운 요청서 등등이었다.
거기에 서명할 권한도 있기는 있지만, 그는 그냥 읽어나 볼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본국까지 날아가야 할 보고서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굳이 하는 일이 있다면 행정 착오로 엉뚱한 분류가 붙은 보고서들의 정리?
-기존에 소모하던 탄약량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됨, 포병 탄약 공급은 대충 5배 정도로 늘려주길 바람
이건 미군 군수사령부로 갈 문건이고.
-각종 보고서의 보병 탄약 소모량을 종합한 결과, 적 보병 1명을 제압하는 데에 평균적으로 1만 발에 달하는 각종 개인화기 탄약이 소모된 것으로 보임. 또한 평균 교전거리는 대충 300m 내외임.
애초에 보병장교였으며 시가전에서 굴러봤던 조제프는 곧장 이 보고서의 맹점을 파악했다.
실제로 300m 내에서 적을 쏴맞추는 데에는 숙련병이라면 1만 발이 아니라 20발짜리 돌격소총 탄창 하나면 된다. 병사들이 죄다 자동화기를 난사해대는 것도 아니고 그럼 왜 1만 발이라는 이뭐병스러운 수치가 나왔느냐.
‘이 인간들, 전투 중 탄약 소모량으로 보고된 전체 탄약량에다가 개인화기로 사살당한 적병들 숫자를 구해서 나눗셈했구만.’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맞는 거 아냐?’ 이렇게 묻겠지만, 전혀 아니올시다.
당장 전투 상황에서 적이 눈에 들어오면 총 쏘는 것만 하는가?
일단 분실되는 탄환도 없지 않을 테지만 그런 거 빼더라도 당장 엄호사격, 제압사격 등등 총알을 대량으로 소모할 일은 흔해빠졌다.
당장 기관총도 날아가는 탄환들이 다 맞을 거 기대하고 쏴갈기는 거 아니잖은가. 그냥 적들이 대가리 쳐박으라고 쏴갈기는 거지.
물론 몇몇 경우 정면으로 돌격해오는 적군을 향해 극도로 효율적인 탄약 소모를 하게 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상대 지휘부가 대가리가 없다시피 한 경우.
-따라서 신규 소총은 프랑스군의 제식 소총처럼 300m 내외의 교전 거리를 상정하고, 단시간 내에 목표물을 향한 화력을 극대화하는 구조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니거든.
조제프는 추가로 메모를 해주려고 펜을 들었다.
‘전장에 안 나간 후방의 지휘관들이 숫자 놀음이나 하고 있으니 이런 계산 결과가 나오지.’
그러나, 손을 멈췄다.
워낙 자연스러워서 깨닫지 못했는데, 이거 미군 보고서였다.
‘..... 굳이 해줄 필요가 있나?’
어차피 전쟁 끝나면 경쟁관계에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장기적으로 유럽연방 소속국으로 흡수될 독일과 네덜란드, 이탈리아면 몰라도 미국을 굳이?
가만히 펜을 들고 있던 조제프는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에라 모르겠다.’
결국, 조제프는 아주 편리한 결론을 내렸다.
내 알 바 아님.
미군 병사들이 앞으로 수십 년간 ROC부터가 글러먹은 탓에 만들어진 병신 같은 요구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병신같은 소총 끌어안고 캐나다와 멕시코 저항군과 싸우다 뒤지든 말든 그가 알 바인가. 그는 미국인도 아니고 프랑스인인데.
물론 미국에게서 받아먹는 게 제법 있지만, 식민지 내놓으라고 딱딱거리는 승냥이들에게 굳이 정성스럽게 차려준 파인 다이닝을 대접할 필요가 있나? 개밥이면 그만이지.
그러고 보니 대접 하니까 저번에 온 편지가 생각났다.
네덜란드어로 쓰인 편지를 뒤적여 편 조제프는 한 소녀가 정성을 담아 쓴 편지 내용을 읽었다.
‘얘는 참..... 그런데 이 편지 그때 생존한 사람들 전부한테 보내는 건가?’
이렇게 꽉꽉 눌러서 쓰려면 거의 하루 종일 편지만 써야겠는데......
“뭐하냐, 연애편지?”
“..... 소리 좀 내고 나타나라.”
곧장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 상대를 본 조제프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그런 말이 있다.
남매는 서로를 죽이도록 프로그래밍된다는 말이.
오늘, 그 말은 한 번 더 증명되었다.
***
“북부 전선에서 고려연방군 피해 심대, 괴멸 위기에 놓였다고 합니다.”
“하아.”
저 괴멸 위기가 엄살이라는 건 누가 봐도 뻔했다.
물론 저 집단군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군단과, 칭다오에 상륙한 3개 사단은 문자 그대로 정신없이 얻어터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백만 대군에 1개 군단을 집어던지고, 3만 명으로 40만 대군을 상대시키는 것.
애초에 결과가 뻔한 싸움 아니었는가? 당연히 숫자가 더 적은 쪽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차피 죽으라고 내던진 것, 고려군이 형벌 부대에 무장을 충실하게 지급하고 역량이 뛰어난 장교와 지휘관들을 인선해서 배치했을 리도 없다.
이래저래 찍힌 폐급 장교들이나 군법을 어긴 병사들, 퇴역당할 정도는 아니지만 무능하다고 낙인찍힌 똥별들을 치워버리는 종량제 봉투로나 쓰지 않았으면 다행이지.
그나마 3개 사단은 대놓고 전군의 형벌부대를 모아 구성한 그놈의 북경방면군과는 다르게 적어도 무장은 충실했는지-그래봤자 형벌부대들 북경방면군 만들고 남은 거 모아서 만든 부대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미군이 보급을 해주자 막대한 포병화력을 통해 적들에게 피해를 강요하면서 버틴 덕에 몰살당하지는 않았다.
몰살당하지만 않고 최대한 지형을 이용해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었고, 미 해군의 최선을 다한 지원 덕에 일단 칭다오에서 버티고 있단 것에 의의를 두는 수준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물론 추가적이고 즉각적인 지원이 없으면 이 3개 사단도 얼마 가지 않아 전멸할 게 너무 명확했다.
“우리라도 가야 합니다. 그 부대들이 전멸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고려의 의도가 너무 명확해서 뭐라 할 수도 없네, 이건 전쟁을 핑계삼아 벌이는 숙청 행위야, 남의 손을 더럽혀서 다 죽여버리겠다는 거지.”
“막아야 합니다.”
이건 군의 명예 문제다. 고려인들이 저들을 다 죽여버리려고 작정했든 아니든, 아군이 죽게 둘 수 없는 건 상식이었다.
“무슨 명분으로, 어떻게 막는다는 건가?”
“..........”
“우리가 그들을 지원하려면 칭다오에 직접 우리 병력을 파병해야 하네, 그건 우리가 피하고자 하던 바로 그 결과네.”
적의 병력은 분산시키고 아군 병력은 집중시킨다.
그런데 적군을 기껏 분산시켰는데 아군 병력을 더 분산시킨다? 그만큼 멍청한 짓이 어디 있는가.
물량에서 아군이 압도적이라면 그것도 나름 사용해 볼 만한 전법이지만, 그것과는 이야기가 애초에 다르지 않은가.
오히려 전투력에서는 앞서도 물량에서 밀리는 게 연합군인데 말이다.
***
조제프는 또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허송세월한다고 지루하다고 언제 노래를 불렀던가?
그걸 또 귀신같이 포착한 할아버지는 또 일감을 주셨다.
‘미국에 좀 가봐라.’
‘네?’
‘행사도 좀 참석하고, 대통령도 만나고...... 아무튼 이것도 저것도 할 거 다 하고 와라.’
‘아니 그러니까 왜요.’
‘내가 이 나이 먹고 외국 나가겠냐, 아니면 실질적으로 대외업무 대부분 수행하고 있는 네 아버지가 가겠나.’
‘작은아버지는.......’
‘그놈도 네 애비녀석 업무 돕는다고 정신없다. 주로 서류작업이지만. 그리고 너는 계승 서열 2위지 않냐. 네가 가는 게 제일 확실하다.’
‘제가 정치랑은 별로 연관없이 살았다는 거 아시죠?’
‘술 깨면 이야기하거라.’
‘그냥 어차피 할아버지랑 제 사이인데 그냥 터놓고 이야기하자고요, 제가 미국에서 뭘 하기 위해서 돌아다녀야 합니까, 그냥 관광만 하고 오라고 할아버지가 외무부 예산도 전용해줄 리가 없잖아요.’
‘루즈벨트 그 작자가 우리 발밑을 파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놈은 우리를 제 말 잘 듣는 푸들로 만들고 식민지를 해방시킨 다음,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신생 독립국들 등을 모아서 우리를 압박할 심산일 게 뻔하다. 지난번 덴마크-잉글랜드-노르웨이 연합왕국을 억지로 밀어붙인 것도 그 연장선이고.’
‘제가 미국 대통령을 압박하란 말입니까.’
‘굳이 그 속에 블랙맘바를 12마리씩 키우는 양반과 전면전 벌일 건 없다. 미국과 프랑스, 그러니까 유럽연방은 동맹이고, 동맹 간의 신의를 강조해서 언론에 떠들어, 정 루즈벨트가 재미없게 나오면 공화당과도 접촉해.’
루즈벨트는 이제 두 번째 임기를 수행 중.
현재 전황을 보면, 루즈벨트의 임기가 끝날 때에는 전쟁이 끝나거나, 끝날락 말락 할 상황까지 밀려났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이제 3선에 도전할지 말지를 정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루즈벨트도 8년 하고 내려가지 않겠냐고 하지만, 할아버님은 루즈벨트가 3선에 높은 확률로 도전하리라고 예측했다.
‘워싱턴 이래의 전통을 깨는 걸, 그것도 전쟁이 다 끝나고 승리가 거의 확정되어진 시점에서 굳이 대통령을 계속 지내야겠다고 하는 걸 좋게 볼 사람은 드물다, 전쟁이 아직 한창이고 대안이 별로 없다면 밀어붙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논란이 제법 될 거야, 그 상황에서 공화당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하면 FDR에게도 강력한 메시지가 될 거다.’
프랑스가 미국 대선에 개입하는 건 안 되지만, 외교적 카드를 써서 FDR에게 엿을 먹이고 대선 직전 지지율을 꺾어버리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프랑스는 여전히 세계 유일의 핵보유국이니까.
잠시 뒤, 문이 열렸다.
“대통령 각하.”
“조제프 대공 전하, 백악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안락의자에 앉은 대통령을 본 조제프는 잠시 굳었다.
“... 전쟁을 지도하시느라 공사가 다망하신가 보군요.”
최대한 정제한 말이었다.
조제프와 FDR은 초면이 아니다, FDR이 톨레도에 왔을 때 만난 적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도저히 같은 사람인가 잠시 의심할 정도로 마르고 수척해진 그 모습을 본 조제프는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그렇게 한담을 한창 나누다가, 갑자기 문이 열렸다.
“대통령 각하, 혈압 측정을 하실 시간입니다.”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대공 전하, 잠시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뭐 멀리 가실 것 없이 이곳에서 계속 이야기 나누어도 될 것 같습니다만. 혈압 측정을 나가서 하실 건 없지 않습니까? 대통령 각하의 귀중한 시간을 너무 낭비한 것 같아 우려되는군요.”
“하하, 아닙니다. 우리의 우방.. 우방국과 미합중국이 얼마나... 건설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하여 차차기 황제 폐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왜 낭비겠습니까.”
“그나저나 혈압 측정이라, 대통령 각하께서도 하시는군요.”
“요즘 뒷목이 당기는 일이 제법 일어나서 말이지요.”
대화를 나누던 도중, 혈압 측정이 끝났다.
“음, 끝났나?”
“예, 각하.”
“얼마 정도인가?”
“350/190mmHg입니다.”
순간, 조제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조금... 높군요?”
“뭐, 정상치에 비해서는 다소 높은 수준이긴 합니다.”
자기 조부가 혈압을 측정한 기억이 났다. 조부님은 높아야 140/80 후반대였는데?
‘아니, 조부님이 혈압이 낮으신 건가?’
좀 상식에 혼란이 왔지만, 일단 미국 대통령 주치의쯤 되면 미국 최고의 의사일 테니 그냥 그 의사가 약간 높지만 심각한 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겠지.
뭐, 그래도 할아버님 쪽이 더 바람직한 게 맞긴 할 거다. 그 나이에도 아직도 일주일에 한 번은 승마를 하실 만큼 팔팔하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