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157화 (157/200)

157화 전환점(6)

모스크바, 소비에트 연방.

곳곳에서 총성이 쏟아졌다.

돌격소총에서 카빈, 분대지원화기, 경기관총 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모듈화 개선이 된 FAB03A1 소총을 든 프랑스군이 보이는 적들 모두를 향해 탄환을 쏟아내었고, 기관단총을 휘두르던 중국군 한 개 분대가 그 총탄에 전멸당했다.

모스크바에서의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소련군보다는 중국군이 더 많이 보인다는 점에서 현재 소련의 지역 행정능력의 전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이르쿠츠크, 울란우데, 투먼, 첼랴빈스크, 예카테린부르크, 페름 등이 지상과 공중으로 공격당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토막토막 끊겼고, 모스크바 서쪽, 남쪽, 북쪽은 전부 적이었다.

주요 행정 거점들이 무너지자 우랄 동쪽은 완전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심지어 카자흐스탄 전역이 고려연방에 넘어가며 임시수도인 사마라와 카잔까지 공습을 받는 상태가 되었다.

어느 모로 보나, 소비에트 연방은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이미 협상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투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당연히 전황에 따라 협상에서 양보해야 하는 수준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

“핀란드는 전쟁의 피해자인 스웨덴에게 할양, 새로운 국경을 가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겠습니다. 발트의 독립과 상트페테르부르크 할양, 벨라루스 독립, 폴란드 독립, 우크라이나 독립, 캅카스 독립, 발칸의 분할도 인정하겠습니다.”

어차피 인정 안 해봤자 이미 넘어간 영토니까. 다시 되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요?”

“붉은 군대의 해산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전범재판 요구는 프랑스도 한 번 찔러나 본 거였는지 금방 물러났다.

소련 국경의 중립국 감시와 비무장화, 연합국의 정찰비행 허가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붉은 군대의 해산은 불가능했다.

물론 연합국은 붉은 군대를 해산하고 나서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군을 창설하는 건 여러 가지 제한만 받으면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육군과 해군을 가진 방언이 표준어라는 말이 괜히 있는가.

그런데, 붉은 군대가 해체되고, 소비에트 연방군이 정식으로 창설된다면?

군과 당의 분리는 불가피하다.

설령 장성들이 전원 당원이라고 해도, 그 근본적인 차이는 소련 공산당에게 있어 두고두고 독소로 작용할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를 하나 들자면, 당장 정치장교의 배치 근거도 붉은 군대가 당군이라는 점이었는데,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당신들이 지금 협상할 처지였는지 궁금하군. 당신들이 임시수도로 정한 사마라에 얼마 전에 폭격이 쏟아지지 않았소? 아, 혹시 중국군을 믿으시는 건가? 그건 어려울 거요, 고려군이 중국군이 북상하지 못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거든. 게다가 조만간 미군도 그쪽으로 진입할 거고.”

물론 이들은 어디까지나 조공이다, 미국은 부산부터 만주와 몽골까지 보급하기보다는 중국의 산업, 정치 중심지인 중국 남부를 상륙 작전을 통해 단숨에 휩쓸어버리기를 택했다. 중국의 수도가 베이핑이기라도 하면 고려했겠지만 난징이니까.

하지만 일단 미국의 물자가 고려에 보급된다는 건 소련에게 있어서 신경쓰이는 사안인 건 명확하다. 막고 싶어도 애초에 그럴 해군도 없고.

“미군은 조만간 오키나와에 상륙할 거고, 그럼 당신네들과 중국 간의 항로도 끊기겠지. 계속 시간을 끌면 일본까지 잃게 될 텐데, 일본 열도라도 유지하고 싶으면 포기하시오.”

몰로토프는 이를 악물었다.

“...... 알겠소.”

“그리고 다음은 이거요, 정식 군대와 준군사조직을 포함해 무장세력 일체의 규모는 400만 명으로 제한하겠소, 소련의 영토가 넓으니 제법 넉넉하게 약속해 드리리다.”

400만이라고 하면 엄청나 보이지만, 문제는 이건 ‘경찰’을 포함한 병력이었다.

1만 명으로 편성한 1개 사단씩 러시아 전역에 고르게 주둔시키면 각 부대 사이의 거리가 수십 킬로미터는 그냥 나오는 게 러시아의 영토다. 영토를 뜯긴 뒤에도 그렇다.

원 역사에서도 러시아는 경찰의 숫자만 백만이 넘었다.

“핵개발 등 원자력 기술에 대한 연구는 원천적으로 금지, 방사성 물질의 수출 목적 채취는 허용하지만 정제 시도 금지, 원자로 건설 금지, 로켓병기 개발 금지, 잠수함 연구 금지, 항공모함 보유 금지, 군사적 용도로 사용이 가능한 고정익 항공기 보유 금지. 무기 수출입 및 양도 금지.”

양도와 수출 금지라는 조항은 왜 달았냐고? 저놈들이 게릴라에게 무기 뿌리거나 하면서 혁명 선동하는 거 막으려고 넣은 거다.

수입 금지야 저놈들이 물건 뜯어볼 게 뻔하니까 하는 거고.

“해군력 제한은 전함 8척, 순양전함 8척, 구형 전함 8척, 장갑순양함 8척의 주력함의 보유는 허가합니다.”

잠수함이랑 항모는 당연히 보유 금지.

우리가 88함대를 보유하는 걸 허가해준 이유는 간단하다. 열심히 거기에 군비를 쏟아부으라는 거지.

어차피 항공모함 위주 함대가 아니라 포격전 전문 함대라면 그 한게가 명확하다. 어디서 미사일 전함쯤 만들어오면 모를까.

“이하 9종에 대한 연구와 개발을 금지한다, 통칭 로켓이라 불리는 유체를 분출해 그 반작용으로 추력을 얻는 비행체, 통칭 전차로 분류되는 75mm 이상의 화포를 장착한 15톤 이상의 모든 차량, 통칭 자동화기라 불리는 기관부가 자동으로 차탄을 약실에 장전하여 발사하는 화기, 소위 화학무기라 불리는 적 인마의 신체 화학물질을 교란시켜 기절, 이상행동, 사망 등 무력화를 시키는 병기, 소위 생물무기라 불리는 세균 및 바이러스를 이용한 무기, 소위 핵무기라 불리는 핵분열 및 핵융합의 원리를 이용하는 병기, 방사선을 이용한 피해를 줄 목적으로 개발된 병기, 소위 항공모함이라 불리는 항공기를 탑재하고 이착함시킬 수 있는 수상함, 소위 잠수함이라 통칭되는 물 속으로 잠수하는 것이 가능한 선박.”

“또한, 보유 중인 기갑병기를 우리 군에 양도할 것을 요구하오.”

소련군이 보유한 대량의 T-34, 그 프랑스와 독일조차도 머릿수는 압도적인데 딱히 낮지도 않은 성능으로 고전하게 만든 견고한 무쇠덩어리.

싹 압류해서 변변한 기갑부대가 없는 고려연방이나, 이스라엘이나, 아무튼 뿌려주면 앞으로 열릴 극동전선에서도 굉장한 도움이 될 터, 그 많은 장비를 고철로 처리하느니 저 밑의 동맹국들에게 뿌려주면 전쟁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 시간을 주십시오.”

“시간은 이미 드리고 있소, 모스크바 시내에 우리 군이 이미 진입했다는 보고도 들어왔지. 선택은 그저 그대들에게 달렸소.”

그리고 24시간 뒤, 소련 수뇌부는 우리가 내건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답변이 전달되었다.

다시 48시간 뒤, 유럽 전선의 모든 부대가 전투를 멈췄다.

유럽 전선의 종막이었지만, 아직 절반에 불과했다.

여전히 중국군은 본토를 침범당하지 않은 채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기에, 전쟁은 최소 2년은 더 끌 것이라고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

“소련이 항복했소, 이제 세상에 우리만 남았소.”

“하! 양이들의 물질주의적 문명 따위는 우리 중화민족이 극복해낼 수 있소!”

“저들의 총알 수보다 인민이 더 많소, 인민이야 다시 늘어나기 마련이지만 양이들을 쳐부술 기회는 지금밖에 없는 법, 더 많은 특공을 보내야 하오!”

병력을 더 쥐어짜자.

더 많은 자폭기를 보내자.

징병 제한 범위를 더 늘리자.

적이 상륙하자마자 독가스를 풀자.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항복을 거론하는 자는 없었다.

항복하는 순간 실각이 확실했으니까.

패배가 목전에 들어온 순간에도 권력 다툼을 지속하는 것이 인간의 생리라도 되는 듯이, 그들은 이제 전 세계를 사실상 홀로 상대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의 실각을 각오하고 ‘항복’이라는 두 글자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

“미치겠네.”

유럽 극동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샤를 드골 장군의 한탄이었다.

부사령관 발터 모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막막함을 느끼는 듯 했다.

지금 그들이 통제해야 하는 부대는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군, 독일군, 네덜란드군, 부랴부랴 참전한 이탈리아군. 아일랜드군, 덴마크군.

거기에 조율해야 하는 상대는 이스라엘군과 미군. 고려군.

휘하에 6개 군이 있고 동맹이 3개 군이니 총 9개 군이었다.

흑색 군복을 입은 독일군, 갈색 위장패턴을 가진 군복을 입은 프랑스군, 전체적으로 푸른색 군복을 입은 이탈리아군, 회색 군복을 입은 네덜란드군, 카키색 군복을 입은 아일랜드군, 녹색 군복을 입은 덴마크군.

고려군은 녹색 군복, 이스라엘군은 카키색 군복, 미군도 녹색 군복을 입으니 군복 색만 6가지인 연합군이었다.

뭐, 군복 색이야 눈 좀 아프고 말 수준이지만 무기체계 쪽으로 들어가면 머리가 절로 아파온다.

우선 9개국이 주력으로 사용하는 소총들의 탄 규격부터 비교해보자면 프랑스군은 7mm 돌격소총탄을 대부분 사용하고, 독일군은 7.92mm 마우저 탄을 쓰고, 기관단총에서는 프랑스군도 쓰는 7.5mm 탄을 쓴다. 다행히도 덴마크군과 네덜란드군 역시 규격이 같다.

뭐, 이건 체급이 다른 탄이니 혼용할 수 있다 치자.

문제는 아일랜드군은 독자적인 7.7mm 탄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아일랜드는 마우저 소총을 기반으로 미국의 총기기술자를 영입해 12발짜리 앤블록식 더블스택 클립을 사용하는 반자동소총을 개발해 군의 주력으로 채용했다. 그리고 이 총은 제법 호평을 받아 이탈리아에서 대량으로 수입해 국가의 표준으로 만들었다.

물론 이물질에 약하다거나 재수가 더럽게 없으면 엄지손가락이 씹힌다거나 하는 문제는 있지만 애교로 넘어갈 일이다.

미군은 자체적인 페터슨 탄을 쓰고, 이스라엘군은 30-06 스프링필드 탄을 주력으로 쓴다. 고려군은 많이 풀려서 구하기 쉬운 마우저 탄을 쓰긴 하지만, 벌써 개인화기 탄 규격만 6종이다.

전차야 프랑스, 독일은 운반도 편하고 고성능인 스콜피오 전차만 가져갈 거고, 네덜란드나 덴마크는 전차가 거의 없었던 데다 있던 것도 전쟁 중 소모되었으니 기갑부대가 애초에 참여를 안 한다.

미국과 아일랜드에는 자체적인 전차들이 있고, 이스라엘군도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잡다한 전차들이 있다. 고려에는 전차가 없긴 하지만 압류한 소련의 T-34들은 바로 그 고려군에 공여될 예정이다.

즉 미군과 아일랜드군의 다양한 중전차, 중형전차, 경전차들이 전선에서 굴러다닐 거라는 건데, 포탄 규격도 다 다르다.

그래도 아일랜드가 미국 장비를 많이 사다 쓰는 편이지만, 환장하게도 미국과 타국들의 장비 호환은 또 안 된다.

연합군의 한계라지만, 참 엿같은 문제였다.

의사소통 문제와 전술 교리 문제까지 가면 슬슬 업무를 거부하고 드러눕고 싶어지니, 이래서야 제때 출발이 가능하기는 할까 진지하게 우려해야 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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