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전환점(4)
기본적으로 우리가 소련에 요구하는 것은 영토할양만이 아니다.
전범재판....은 상황에 따라 접어줄 수도 있다. 이거는 진짜 모스크바 점령하게 되면 내밀어야 할 카드다.
소련 국경의 중립국 감시와 비무장화 및 연합국의 정찰비행 허가, 배상금 지불, 그리고 붉은 군대의 해산.
소련은 의외로 ‘국군’이 없다.
우리는 편의상 소련군이라고 하지만, 붉은 군대는 소련군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의 당군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건 이 당군의 해체. 별도로 소련이 새롭게 진정한 의미의 연방군을 창설한다면 그건 터치하지 않겠지만, 그런 준군사조직도 당연히 규제한다.
무장세력 일체의 병력 규모-원 역사 바이마르 공화국의 준군사조직 같은 것까지 다 포함해서-제한, 징병제 금지, 핵개발 금지, 무기 수출 및 수입, 양도 금지, 로켓 개발 금지, 잠수함 연구 금지, 항공모함 보유 금지, 항공기 보유 금지.
이게 우리가 요구할 ‘최대치’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모스크바에 기갑사단이 진입하고 스탈린을 붙잡은 뒤에 들이밀 요구조건이라는 거다.
그 전이라면 당연히 좀 후퇴된 조건을 내걸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그런데, 지금 상황 보면 이 요구.
먹힐 거 같다.
“소련군이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련군 잔존 세력이 너무 간단하게 분쇄되고 있습니다. 진격하는 부대에 보급물자를 추진해주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이게 왜 되지?
***
“적이 모스크바 코앞까지 밀려오고 있습니다.”
“사마라로 대부분의 정부 기능이 이전되었습니다, 다만 고려연방이 참전한 이상 우랄 이동의 산업지대의 안전을 보장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적이 툴라에 도착했습니다. 적 핵탄두 사정거리에 모스크바가 들어왔습니다!”
물론 지금 연합국은 핵이 떨어졌지만. 아무튼 간에 모스크바는 문자 그대로 함락 위기였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서부는 다 넘어갔고, 캅카스도 공격받고 있고, 시베리아도 공격받고 있다.
전선은 너무 넓은데 막을 병력이라고는 한 줌도 없다.
원 역사의 탄넨베르크 전투를 연상시키는 대패, 심지어 오랜 전쟁으로 소모된 병력도 많다.
“서기장 동지, 평화 협상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탈린은 이를 악물었다.
평화 협상을 한다면, 그의 권위는 절대 멀쩡하지 않으리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이 그를 불신임하고 체포하러 오지 않는 게 이상할 터.
‘누구냐.’
누가 제일 먼저 이빨을 드러낼 것인가.
최소한 제일 먼저 이빨을 드러내는 놈의 대가리를 깨부숴야만 권좌가 유지될 수 있다.
소련이 유지될 수 있다.
소련은 곧 자신이었고, 자신은 곧 소련이었다.
스탈린이라는 이름, 그것은 소련의 권력 그 자체였다.
그랬기에, 스탈린은 결단했다.
“이 전쟁의 패배에는 마땅히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하오, 그러니, 평화 협정이 추인된 뒤에는 작금의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내가 물러나겠소.”
“안 됩니다!”
“소비에트 연방에는 서기장 동지가 필요합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아우성이 터졌다.
이건 충성심 시험이었다. 만약 ‘그러십시오’라고 했다가는 평화 협상을 하기 전에 그 자와 일가친척이 총살대로 끌려갈 테니까.
그리고, 스탈린은 지금 이 순간, 폭탄을 던졌다.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스탈린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스탈린은 이 퍼포먼스를 통해서 자신이 책임을 지려 했으나 당 간부들이 스탈린이 최고 책임자라는 이유만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현실에 반발해 스탈린 동지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논리로 면책한 것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대가를 치러야 할까?
이 모든 상황을 틀어지게 만든 결정적인 신무기, 핵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한 NKVD와 그 수장 베리야?
아니면 명목상 베리야의 상관인 몰로토프?
패배에 패배만을 거듭한 군부의 수장 주코프?
아니면 군 내의 여러 원수들?
아무튼 스탈린을 잘못 보좌한 책임이 있으니 일단 엮어 넣으려고 하면 무슨 수를 쓰든 간에 충분히 엮어넣을 수 있는 흐루쇼프 이하 여러 당 간부들?
누굴 처형할까.
누구의 모가지를 남겨둘까.
이 순간, 스탈린은 전가의 보도를 손에 넣었다.
당연하지만, 이들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박을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의 손에 죽는 건 둘째쳐도, 그렇게 해서 서기장의 자리에 오른다고 한들 스탈린 하나 보내버린다고 해도 그 뒷수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언론 통제는 아직 제대로 되고 있다. 아예 스탈린을 죽여버리지 않는다면 스탈린은 결국 영웅이 되어 권좌에 복귀해 피의 숙청을 재개할 거고, 반대로 스탈린을 죽여버린다면 그는 순교자가 되고, 분노한 인민들에게 서기장 자리를 차지한 인물은 끌려내려와 조리돌림 당할 것이다.
스탈린 격하 운동도 시기가 잘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법, 전쟁에 이겼으면 모를까 전쟁에 다 졌거나 지고 있는 상황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을 펼쳐봤자 재미를 볼 가능성은 없었다.
스탈린을 탄핵하는 것부터가 여러 권력자들이 연합해야 하는 일인데, 이들 사이에 깊숙이 심어진 불신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설령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스탈린을 탄핵한다 한들 시국이 이 모양이니 서기장 자리에 앉아서 별 재미를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적당히 만만한 놈을 서기장에 앉힌다면?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면 누가 봐도 꼭두각시고, 배후의 진짜 권력자는 끌려나와서 쳐맞으리라. 그렇다고 힘이 있는 자를 앉히면 그 상대와 서로 죽지 않기 위해 엘 꼴라시코를 벌여야 할 판이고.
당장 어디 지나가던 당원인 이반 동지를 서기장에 낼름 앉힌다고 해서 서방과, 인민들이 납득할까? 소련 장관회의 참석자들은 그런 허수아비, 총알받이가 순순히 되어주지 않을 만큼은 노회하고, 장관회의 외의 참석자가 서기장이 되면 누구도 납득하지 않을 터.
그냥 대가리 열심히 박고 자기가 희생양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쌓아올린 권위는 그렇게 쉽사리 무너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애초에 아니었다.
본인이 죽기 전에는 말이다.
***
-적 기갑부대 접근 중!
무전에서 들려온 통신에 프랑스군의 전차들은 속도를 줄였다.
신형 20톤급 전차들은 재빠르게 75mm 주포를 조준했다.
“사거리 내에 들어오면 개별적으로 사격 개시한다!”
높은 기동성과 낮은 전고로 아예 피탄 가능성 자체를 낮춰 버리는 새로운 개념의 경량전차, 스콜피오 전차들은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적 중전차 전면 관통! 격파입니다!”
“명중!”
원통형의 75mm 포탄들이 빠르게 약실로 빨려들어간다. 마침내 제식화하는 데 성공한 고출력 가스터빈 엔진은 빠른 속도로 진지를 다시 잡은 전차들이 높은 명중률의 포격을 가하게 만들었고, 빠른데다 작기까지 한 프랑스군의 신형 전차들을 상대로 T-34 전차들은 단 한 번의 명중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심지어 성능이 개선된 75mm 포의 철갑탄은 어렵잖게 표준 교전거리에서 전차들의 장갑을 뻥뻥 뚫어대는 판이었기에 그야말로 상대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적 전차들이 불타는 고철 덩어리가 되어 알루미늄 액체로 은빛 웅덩이를 만들자, 프랑스군의 기갑수색대대는 앞으로 향했다.
“한 방만 맞았으면 우리가 저 꼴이 되었을걸?”
경량화된 스콜피오 전차의 장갑의 주 소재는 다름아닌 알루미늄이다.
프랑스는 알루미늄이 굉장히 쌌지만, 그래도 알루미늄의 반응성이 좋은 관계로 세라믹과 금속재를 복합 적층한 복합장갑을 달고 있었다.
제법 미래에나 나올 기술들이었지만, 각종 과학기술이 무섭게 발전한 덕에 이렇게 최신기술로 떡칠한 전차도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콜피오는 중형전차와 경전차 사이 그 애매한 위치에 있었지만. 이 성능에 만족한 군부는 어차피 앞으로의 전장은 맞추면 격파된다고 전제한 상태에서 서로를 맞추느냐 마느냐의 싸움이 될 테니 프랑스군의 모든 전차를 대체할 ‘주력 전차’로 스콜피오를 생산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나오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총력전이 꽤 오래 끌린 탓에 국가 경제역량 등에 부담이 간다는 이유 등등이 있었지만, 아무튼 간에 스콜피오는 정식으로 채택되어 제식화되어쏙, 제식화 후 있던 첫 전투를 승전으로 장식했다.
머릿수로 3배 가까운 적 전차부대를 일방적으로 휩쓸어 몰살시켰다. 이제는 잡을 전차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전과를 올릴 적을 그만큼 만나는 것 자체가 유럽에서는 쉽지가 않은 일이 된 지 오래였으니까.
“그런데 이놈들은 왜 아무것도 없는 여기서 꾸물대고 있었던 거지? 모스크바 구원하러 가고 있었나?”
“설마요, 모스크바 구원을 하려고 했으면 열차를 타고 갔겠죠.”
“근데 우리 공군이 지금 폭탄 떨어트리고 있잖아, 그 철로에.”
“벌써 모스크바 방공망이 그 정도로 와해된 상태일 것 같진 않은데요.........”
“어디 철로는 모스크바에만 있대냐.”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거리를 전차가 자체주행하는 일은 거의 없다. 연료 소모도 소모고 도착하면 엔진이고 현가장치고 트랜스미션이건 간에 다들 골병이 들어 있어서 전투가 아니라 정비를 우선시해야 할 판이니까.
그래서 이놈들이 전투 태세라고 봤는데, 그렇기에는 좀 어설프고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것이다.
“뭐 어떻습니까. 아군 박살내버린 것만 아니면 되죠.”
“혹시 아군이 탈취한 전차라거나 한 건 아니죠?”
“우리 앞에 다른 부대는 없을걸? 우리가 전군 선두다.”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던 운전수와 포수, 전차장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게 자기가 말을 마칠 때만 대화가 딱딱 끊어지는 느낌을 받은 전차장은 한숨을 쉬었다.
“모스크바에는 언제쯤 도착하려나.”
“모스크바에는 안 들어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들어갔다가 얼어죽는다던데.”
“그럼 핵으로 불을 지펴줄 테니 상관없지, 따뜻하니 좋겠네.”
“핵무기는....... 요즘 그거 잘 쏘지도 않던데, 무슨 일 있나?”
“그냥 재고가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센데 많이 안 터트리는 거 보면 사용에 무슨 제한이 있을 거고, 그게 숫자 자체가 넉넉하지 않다고 하는 거면 이해할 만 하죠. 무슨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다든가, 공정 절차가 까다로워서 하나 만드는 데에도 생고생을 해야 한다던가, 복잡하고 강한 물건일수록 생산 속도가 느리다잖아요.”
스콜피오도 그 증거다. 지금 프랑스에서 생산하는 전차들의 수는 스콜피오가 잡아먹는 자원 탓에 가짓수가 확 줄어서 자원 사용이 훨씬 효율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확 줄어들었다.
이대로 전쟁이 안 끝나게 된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정도로.
그러나 프랑스가 믿고 있는 건 있었다.
모두가 그 존재를 이제 알게 된 최강의 결전병기가 있는 이상, 모스크바를 통째로 인질로 잡아 최대한 유리한 협상을 언제든 강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냥 까놓고 ‘우리가 모스크바 못 지키겠으니 철수하긴 할 건데 철수하기 전에 버섯구름 하나 구경하고 갈 거임, 꼬우면 협상장 기어나오거나.’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아쉬운 건 소련이니까.
이러니 프랑스도 슬슬 무기 생산에서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것이었다.
재래식 전쟁의 패배를 핵무기로 갈음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