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맥동(2)
발트 해,
엘베 강에서 전선이 교착된 지도 시간이 제법 흘렀다. 소련은 비공식적으로 프랑스에 엘베 강을 기준으로 독일을 분할하자는 제안을 했고, 엘베 강 동쪽을 아예 합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제안에 대해 핵무장한 전함 샤를마뉴를 발트 해에 투입, 레닌그라드를 직접 위협하는 것으로 답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저들을 막을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입니다.”
소련 해군 전함, 소비예츠키 소유즈.
20인치 4연장 함포 3문을 단 소비예츠키 소유즈는 소련 해군의 자랑이다, 이번 작전을 위해 추가로 개수를 받기까지 한 이 함선을 통해 샤를마뉴를 격침시키면, 프랑스군에게 충분한 압박이 되리라.
여전히, 소련의 목적은 협상에 있었다. 끝까지 가면 사회주의 조국 역시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알고 있소, 정치위원 동지.”
쌍안경으로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 쿠즈네초프 제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함대는 2척의 주력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항공모함 6월 혁명, 그리고 소비예츠키 소유즈.
그리고 쿠즈네초프 제독이 승함한 소비예츠키 소유즈의 함장은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대령으로, 촉망받는 인재였다.
기본 계획은 간단했다, 샤를마뉴를 6월 혁명과 지상발진 항공기들이 귀찮게 굴고, 그동안 빠른 속도로 소비예츠키 소유즈가 접근한다.
소비예츠키 소유즈의 장갑과 등가교환한 속도는 제법 빠른 편이었고, 거기에 만일 저들이 핵 대공사격을 가한다면 핵무기를 소모시킨 상태에서 싸울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순간, 하늘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백 단위의 적기에게 쫓기던 샤를마뉴가 핵포탄 한 발을 공중폭발시켜 접근해온 적 항공기들을 청소해버린 것이었다.
“전 함대 전속력으로 접근한다!”
지금이다.
핵이 터진 이상, 적들도 한동안 관측 등에 어려움을 겪을 터!
그러니 그 틈을 타 최대한 거리를 좁혀 난타전에 들어간다!
이게 유일한 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 외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샤를마뉴의 핵포탄 사거리는 60km, 그리고 소비예츠키 소유즈의 20인치 주포탄 사거리는 45km.
적 사거리 내에서 15km를 접근해야 하고, 그 뒤에도 맞으면 안 된다.
500m 내에 떨어지면 전함도 단박에 침몰할 테니까.
게다가 그들은 샤를마뉴보다 느리다.
여러모로 악조건 중의 악조건이었다.
하지만 이점은 있었다.
샤를마뉴는 지금 관측기를 띄울 수도, 정찰기를 보낼 수도 없다. 핵폭풍의 전자파가 가라앉을 때까지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레이더 역시 교란된 상태, 샤를마뉴가 믿을 건 견시뿐이고, 초수평선 사격이 가능한 입장에서 소비예츠키 소유즈는 문자 그대로 적이 육안으로 보일 거리까지 접근해서 일제사가 가능하다.
우연이 아니다, 애초에 이 조건을 이끌어내려고 그 개고생을 했지 않는가.
적어도 천에 달하는 최고 엘리트인 조종사들의 목숨과, 수백 기의 항공기를 제물로 바쳐서 이끌어낸 조건이다.
얼마 뒤, 전속력으로 접근하던 소비예츠키 소유즈의 눈에 버섯구름이 관측되었다.
핵의 섬광은 멀찍한 곳에서 번뜩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시대에 유도포탄도 없는 이상, 60km 사격은 명중률은 내다버리는 짓이었으니.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견시 여러 명이 과도한 감마선에 노출되어 후송되었다.
“크윽........”
“접근합니다! 2탄!”
한 발이 착탄하는 데 무려 2분에 달하는 거리.
포탄 가운데 한 발이 1km 정도 거리에서 터지고, 핵폭발의 근접폭발을 견디기 위해 칠해진 소비예츠키 소유즈의 내열 페인트가 지글거리며 끓어올랐고, 함장 이하 승조원들의 입 안에서는 납 맛이 느껴졌다.
“적함과의 거리 30km!”
“발포!”
12발의 20인치 함포가 일제사를 가했다.
전방에 집중된 3기의 주포탑이 일제히 불을 뿜고, 샤를마뉴의 항적 위에 물기둥을 새겼다.
그리고 그 순간, 9문의 16인치 주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콰콰콰콰쾅!
9발의 핵포탄의 일제사.
샤를마뉴가 보유하고 있던 14발의 핵탄두 중 남아 있는 포탄 전탄을 일제사격하는 일격이 회피 자체가 불가능한 거리에서 쏘아졌다.
포탄이 날아오는 동안 소비예츠키 소유즈 역시 동귀어진이라도 꿈꾸며 12발의 20인치 포탄을 쏘았지만, 상식을 벗어나는 괴이한 기동을 선보인 샤를마뉴는 쏟아지는 포탄 사이를 유유하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느릿하게 날아온 포탄들이 섬광으로 변했다.
아홉 개의 광구는 어마어마한 섬광과 열폭풍, 전자파와 방사선을 동반했다.
오염된 해수가 발트 해를 검은빛으로 물들이며 퍼져나갈 때, 섬광이 걷히며 폐함이 다 된 소비예츠키 소유즈의 모습이 드러났다.
상부구조물은 구워진 오징어마냥 사방에서 우그러든 채 시커멓게 불탔고, 함교는 단 하나의 유리창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함내로 쏟아져들어간 열풍과 자외선과 방사선은 함장과 제독 이하 승조원들을 원폭의 그림자로 만들어버렸다.
측거의들은 앙상한 골조만 남아 있었고, 포탑들은 검게 불타 그을려 있었다.
그러나, 자국군도 예인을 포기하고 뇌격처분했을 법한 전함은 여전히 물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생존자도 있었다.
“분리!”
명령이 떨어지고, 폭발과 함께 거대한 구조물이 둘로 쪼개졌다.
철근 콘크리트로 속을 가득 채워 후방 함교를 덮어씌운 구조물은 그대로 바다에 빠지며 자신의 의무를 완수했다.
후방 함교에 장착된 예비용 측거의도 무사했고, 부장과 함내에 탑승한 예비 승조원들도 그곳에 있었다.
완전히 밀폐되어 있던 후방 함교의 봉인이 해제되고, 느리게, 아주 느리게 포탑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었거나 아직 숨만 붙어 있는 동료들을 자리에서 끌어내고 앉은 포탑 운용요원들은 고열을 막기 위해 역시 두터운 장갑판 아래 봉인되어 있던 탄약고에서 포탄을 끄집어내어 장전했다.
“3번 포탑이 사용 가능합니다. 부장님. 1번, 2번 포탑은 손상이 심합니다.”
“적함과의 거리는?”
“29....28km입니다.”
“근접할 때까지 대기한다.”
어차피 앉은뱅이 신세.
도저히 못 피할 거리에서 일격을 먹여주마.
자신들도 살아돌아가기는 글러먹었지만, 그건 저놈들도 마찬가지다.
샤를마뉴를 격침시켜야만 그들의 가족들이 살아남는다.
콱 자폭해 버려서 적함을 확실하게 격침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련만, 엔진도, 스크류도 모조리 박살나고 녹아버린 상황에서는 이게 한계다.
한 문 남은 포탑이 단 한 발이라도 명중시켜 준다면 그들의 승리다. 샤를마뉴는 절대로 20인치 포탄을 버텨내지 못할 테니까!
문제는 핵폭발의 열기에 포신이 녹아서 강선이라든가 여러 문제가 발생해 탄착이 틀어지지 않을까 하는 점인데, 이건 내열 재킷이 제 역할을 해주었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포신을 갈아끼울 수도 없으니까.
어차피 이 함선에게 남은 수명은 몇 시간 남지 않았다.
“확실하게 끝을 보려는 모양입니다.”
예상했던 바다.
그들이 샤를마뉴를 격침시키려고 전함 한 척과 수백 기의 항공기를 제물로 바칠 각오를 한 것처럼, 샤를마뉴 역시 소비예츠키 소유즈, 번역하자면 소비에트 연방의 이름을 가진 함선을, 세계 최대의 전함을 발트 해 밑바닥에 쳐박을 수 있다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여기는 소련 영해, 작정하면 소련군이 나타나 어떻게든 항구로 예인해 갈 수도 있다고 본 것일 터, 아직 대파되었을 뿐 떠 있는 것 자체는 가능해보이는 적함을 근접사격으로 확실히 격침하고 싶었으리라.
저놈에게 구축함이 안 붙어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놈들이 어뢰를 쏴들고 왔겠지만, 샤를마뉴는 직접 왔다.
그리고, 그것이 소비예츠키 소유즈에게 최후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지금이다!”
4문의 포에서 일제히 포탄이 뿜어졌다.
서로의 포탄에 간섭을 주지 않기 위해 일제사격일지언정 포탄은 2발씩 짧은 텀을 두고 발사되었고, 그랬기에 포신 하나가 폭발한 시점에서 두 발의 포탄은 유유히 포신을 통과해 발사되었다.
포탄을 보고 회피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방금 전까지는 그런 신묘한 묘기를 해낸 게 샤를마뉴였지만, 지금은 그러기에는 과히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탄 한 발은 샤를마뉴를 맞추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물기둥을 세웠다.
그러나 다른 한 발은 그대로 샤를마뉴의 장갑을 찢어발겼다.
14인치 대응방어를 하도록 설계된 샤를마뉴의 바이탈 파트를 보호하는 장갑대는 20인치 철갑유탄의 직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샤를마뉴 역시 보복하듯 16인치 일반탄 일제사를 가한 뒤였다.
빗나가는 게 웃기는 일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기에, 이미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복수를 한 것만으로 만족할 뿐.
포탑이 16인치 포탄에 갈가리 찢기고, 후방 함교는 산산조각나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은 육편과 뼛조각이 되어 쓸려나갔다.
샤를마뉴는 그대로 유폭을 일으키며 두 동강으로 갈라졌다.
소비예츠키 소유즈는 폭발 직후 그대로 전복되었다.
인류 최후의 전함 대 전함의 대결의 종막이었다.
***
“발터.”
“한스.”
두 명의 장성이 북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나?”
충성하던 조국은 두 패로 갈려 내전을 벌이고 있다.
“군인은 정통정부의 명령에 따라야 하네.”
“그 정통정부는 이제 누가 봐도 끝장인데? 발터, 자네가 귀순하면 저쪽에서도 환영할 거야, 그리고, 그 무기..... 그 신무기가 프랑스군에게 있네.”
라이터를 켠 남자는 나직이 말했다.
“저들은 융커와 황실에 적대적이지만, 평민 출신 장성들은 저기서 우대받네, 나나, 자네 역시 딱히 귀족 출신은 아니지 않은가.”
“크렙스.”
발터 모델은 나직하게, 하지만 강렬하게 말했다.
“내게 지금 반역을 종용하는 건가.”
“충성할 정통정부가 남아 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인가. 왕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민간 내각의 인사 가운데 다시 모습을 드러낸 자가 있나? 게다가 우리는 침략당했네.”
“침략에 맞서싸우는 건 정부군이네.”
“신정부군이라고 해서 싸우지 않는가? 본질을 보게, 우리는 침략을 저질렀고, 그 대가를 받았어,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사람들의 파멸로, 자네가 하우서나 크뤼거 같은 자들보다 못할 게 뭐가 있나? 자네 정도면 신정부 아래에서 참모총장도 노릴 만 하고, 신정부는 이길 거네, 이미 늦었어, 프랑스군은 라인 강 동쪽으로 기어나가지 않고 있지만 공군을 대거 투입하고 막대한 물자를 신정부군에게 몰아주고 있고, 프랑스제 무기를 든 신정부군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지지를 받고 있네.”
“..........”
“정부군이 이긴다고 하세, 남는 건 신병기를 휘둘러대는 프랑스와 볼셰비키 사이에서의 양면 전선이야, 프랑스와 볼셰비키가 우리의 조국을 두 쪽으로 잘라서 사이좋게 나눠먹을 거라고!”
“...... 내가 뭘 하기를 원하는가.”
“지금 신정부에 합류하지, 이미 옛 정부는 무너진 거나 다름없고, 각 장군들이 군벌이 되어서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형국이야, 독일이 무너졌다면, 다시 세워야 하지 않겠나.”
발터 모델은 오랜 친구, 한스 크렙스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무엇이 옳은 것인가.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의 휘하 장병들은 자신을 따라오리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그 고민은 깊었다.
두 개의 신념이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