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대공황(2)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은 사실 대공황의 첫 테이프를 끊었을 뿐, 그것 자체가 대공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버 정권은 똥볼을 차 가면서 스스로를 대공황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스무트-홀리 관세법, 근린 궁핍화 정책 등의 근시안적 정책을 내놓았고, 공황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재무장관 앤드루 맬런은 ‘노동을 청산하고, 주식을 청산하고, 농부를 청산하고, 부동산을 청산하자’는 망언을 했고, 경제는 쉴새없이 붕괴하며 더 찍을 바닥이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추락했다.
하지만, 유럽의 피해는 예상보다 덜했다.
먼저 원 역사에서 초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며 무너진 바이마르 공화국이 없었다. 북독이든 남독이든 간에 누구한테 배상금을 지급할 일은 없었고, 오히려 콩고에 초대형 댐을 지으면서 국력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그런 초대형 토목공사들은 의도치 않게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게 유럽이 멀쩡했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사소하고 중요한 역사의 전환점들이 수십, 수백 개씩 축적되자 적어도 원 역사의 유럽이 뒤집어쓴 혹독한 대공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기 충분했다.
게다가 프랑스 제국은 디플레이션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했고, 금리를 낮추고, 수요가 부족한 농산물들을 국가에서 사들이고, 국채를 회수하면서 최대한 돈을 시장에 풀었다.
돈을 찍어내서 투자를 강제로 늘리고, 통화승수가 감소하면 본원통화를 무식하게 늘려서 균형을 맞추는 방식이었다.
21세기의 양적 완화와 근본적으로 유사했지만, 동시에 굉장히 위험한 짓이었다.
당장 프랑스 제국은 유럽 최대 패권국으로, 나폴레옹 제국의 영광을 재현한 국가로써의 군사력으로 신용을 담보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신용을 근본적으로 담보해야 할 금의 양보다 훨씬 많이 프랑화를 발행하는 것은 화폐 신용을 붕괴시킬 위험성이 컸다.
물론 이 돈들은 자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가 일반 소비시장의 물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이것이 시장으로 풀려나면 제국이 버틸 수가 없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고 금리를 올려 돈을 회수하려면 2차 공황이 올 수도 있기에 진퇴양난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프랑스 제국은 강행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프랑스 제국의 수뇌부는 조만간 전쟁이, 그것도 지난 대전쟁과 맞먹는 규모의 전쟁이,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예측된 것보다 훨씬 가까운 시일 내에.
***
“경기는 호전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공황 이전 수준보다는 못하지만, 전 유럽 기준에서는 선방하고 있습니다. 지지율 역시 튼튼합니다.”
나는 턱을 괸 채 재무관료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북독일과 남독일은 사상 최악의 공황을 겪고 있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저건 아무것도 아니다.
원 역사에서, 대공황을 뒤집어쓴 각국은 문자 그대로 피죽도 못 먹어서 전쟁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원 역사에서 나치 독일이, 그리고 유고슬라비아가 그랬듯 디플레이션이 정치 극단주의와 전쟁을 부른다지만, 대공황 시기에는 다들 피를 토하느라 군대를 일으킬 기운도 없었다.
지금은?
다들 죽겠다 죽겠다 하지만 저건 죽겠는 게 아니다. 대충 여름에 수은주가 30도를 가리켰을 때 쌍욕해대는 것에 가깝지.
여름에 30도짜리 폭염을 뒤집어쓰면 욕이 나오지만, 40도가 되면 욕할 기운도 없이 에어컨 근처에 옹기종기 모이게 되는 것과 같다.
똑같이, 원 역사대로 하면 골골대느라 국력을 회복해 전쟁에 나서려면 10년은 걸렸을 놈들이 지금 전쟁을 하겠다고 꺼드럭거리고 있다.
21세기라면 바보짓이지만, 20세기라면, 이 시대라면 전쟁에서 이기면 경제가 좋아진다는 근거가 있으니까.
이 시대는, 금본위제가 세계 경제를 지배한다.
그리고 원 역사에서 나치는 과도한 경기부양책으로 인해 국내에 풀린 너무 많은 돈으로 발생한 신용경색, 그리고 이게 불러온 디플레이션을 침략으로 수습했다.
통화량에 비해 그 가치를 담보할 금이 너무 부족한 탓에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가 보유한 금을 강탈한 뒤에야 그 디플레이션을 진정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똑같은 생각을 다른 나라들이 안 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당장 우리도 진지하게 대량의 금이 조만간 필요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타국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테니까.
식민지 착취? 이미 바늘 꽃을 틈도 없고, 새 금광을 발견할 확률보다는 전쟁으로 금괴를 뺏는 게 낫다.
식민지에서의 투닥거림 정도로 끝낼 일은 이미 아니고, 전쟁을 하려면 아예 본토에서 대규모로 부딪혀야 한다. 그래야 수도를 점령하고 금괴를 뺏으니까.
***
서방 세계 전역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랑스 제국은 대공황 직후 반드시 두 번째 대전쟁이 발생하리라 확신하고 비밀리에 막대한 군비를 확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티르피츠 총리가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내정된 프란츠 폰 파펜 총리는 빌헬름 2세에게 아부를 떠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에게 대공황의 대처를 하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연료 수입이 안 되고 있습니다.”
“군인들을 훈련시킬 비용도 부족합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길바닥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전당포만 성업중입니다.”
“대기업에 지원금을 집중시키는 정책은 무의미합니다! 콩고 댐 공사를 강행해야 합니다! 대기업이 물건을 만들어도 지금 수요가 없단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게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대전쟁을 전후해 이는 완전히 바뀐 지 오래였다.
“동프로이센 전역이 쑥밭입니다. 곡물이 팔리지 않아 썩어가고 있습니다.”
“금본위제를 포기해야 합니다. 프랑스도 금본위제 포기가 논의되고 있다고 합니다.”
“금본위제를 포기하면 경제의 마지막 고삐마저 놓치는 셈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화폐 신용은 바닥을 칠 거고, 현 상황에서는 마르크화가 모조리 휴짓조각이 될 겁니다!”
“하지만 금이 없지 않소!”
“지금 당장 군경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빨갱이들이 혁명을 일으키려고.....”
“빨갱이 수괴인 하인리히 힘러가 어디 있는지도 불명입니다. 그놈이 혁명을 일으킨다고 하면 나치당의 지하당원 수십만이 일제히 봉기할 거고, 최악의 경우 군경의 전체 병력보다도 많은 규모의 민병대가.....”
“폐하.”
손을 덜덜 떨던 빌헬름 2세에게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뭔가, 파울.”
“지금 당장 군비를 증강해야 합니다.”
“자네도 그 빨갱이타령인가?”
“아닙니다. 침공작전을 해야 합니다.”
“침공?”
“지금 빨갱이들이 정권을 잡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게르만 민족주의뿐입니다. 모든 독일인이 카이저 아래 단결하자고 외치고, 적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쟁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었다.
남독일 연방이 보유한 금은 세계에서도 수준급이다. 오스트리아의 국고와 스위스 은행 지하의 자본금 등을 싸그리 압류해서 금으로 바꿔서 중앙은행에 보관하고 있으니, 그걸 먹으면 당장 돈을 더 찍어내 경기부양책을 펼 수 있다.
“샤흐트 총재, 만약 남독일 연방의 금을 전부 획득한다고 하면, 경제의 연착륙이 가능하오?”
“프랑스 수준의 억제를 말하신다면 지금도 가능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국내 문제만이 아니라 국제적 문제인 만큼 길어야 5년 내에 프랑스 식의 미봉책은 한게에 달할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대량의 금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독일 연방과 통일을 한다고 가정하면, 예, 남독일 연방의 금을 저희 중앙은행에 예치할 수 있다면 충분히 수습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하지만 폐하, 남독일을 침공할 경우, 침공이 지지부진해질 가능성은 둘째쳐도 프랑스 제국이 반드시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가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콧수염을 만진 장군이 입을 열었다.
“팔켄하우젠 장군. 말해보시오.”
“아시겠지만 본국은 비밀리에 소련과 교류를 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신형함 건조는 카이저마리네가 지원했으며, 막대한 자원이 싼값에 들어왔습니다.”
“그건 알고 있소.”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은 극비리에 프로이센-소비에트 연방 간의 불가침조약을 제의해 왔으며, 내각은 비밀리에 이 사안에 대해 논의한 결과 소비에트 연방과의 불가침조약과 장기간의 협력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었습니다. 유사시 소비에트 연방은 독일 제국에 독점적으로 대량의 자원을 공급하며, 독일 제국은 기술력을 공급한다는 계약입니다.”
“그리고, 중국에 있는 트라우트만 대사가 큰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중화민국은 전쟁 발발 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경유해 대규모의 ‘의용군’ 및 비전투 노동인력을 제공해주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의미는 간단했다.
군부는 이미 카이저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전쟁을 준비해왔던 것이었다.
사실 이는 독일 참모본부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원 역사에서도 슐리펜 계획을 통해 프랑스, 러시아, 벨기에, 영국 간의 전쟁을 준비하는데도 외무장관이나 재상은 물론이거니와 해군과 육군 내 여타 조직과의 협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 전쟁부가 슐리펜 계획이 완성된 6년 후에야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파악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독일 국가은행 총장에 불과한 샤흐트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독일의 군사력은 아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하며,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남독일이 무너지기 전에 프랑스군이 라인 강을 도하할 것입니다.”
장군들은 지도 위에서 말판을 움직였다.
“이탈리아는 영세 중립국이며 알프스 산맥의 존재로 인해 유의미한 기동로를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진격로에서는 배제합니다. 네덜란드 회랑을 돌파해 파리를 단시간 내에 공략한다는 것이 작전 목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 프랑스 영내의 작전 도중 파리를 끼고 대회전을 벌여 일드프랑스를 완전히 포위하는 것입니다. 지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실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프랑스를 최단시간 내에 패배시키고, 남독일을 합병한다. 프랑스에게서 배상금을 뜯어내면 최고고 그가 안 된다고 해도 남독일 통일만 인정받을 수 있으면 된다.
일이 잘만 풀리면 라인 공국, 어쩌면 알자스-로렌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다만, 이는 대략적인 작전일 뿐이며, 국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군비를 증강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필요한가?”
“1936년입니다, 샤흐트 총재, 경제가 5년은 버틸 수 있겠지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군비를 증강하면 기업들도 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됐습니다.”
뭐라 말을 더 하려는 얄마르 샤흐트의 말을 끊은 장성들은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이것이 저희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