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적사병(赤死病)
물론,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와 타협했다고 모든 전쟁이 끝나는 건 아니다.
남독일 연방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이들은 독일계 국가이니 남독일 연방에 합류할 정당성이 있다면서 오스트리아에는 페르디난트 대공을, 그리고 페르디난트 대공의 조카인 카를 대공을 과거에 스위스를 지배한 게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는 명분으로 스위스 왕으로 추대한 뒤 남독일 연방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물론 격렬한 반발이 일었지만, 이참에 영토를 넓히기로 결정한 남독일 연방은 총칼로 반란을 진압했다.
한편, 아일랜드는 브리튼 섬 전역을 점령하고 군정을 선언했다. 호주에 세워진 영국 망명정부는 이를 강력하게 규탄했고, 브리튼 섬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아일랜드인들은 대대적인 동원령까지 내려 가며 영국인들을 짓밟았다.
이스라엘은 기어이 인도 부왕령 중 청군과 백군에게 넘어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을 점령했다. 당연하지만 이들도 순순히 인도를 독립시켜줄 생각은 없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흘린 핏값 정도는 받아가고 싶어했던 것이다.
네덜란드와 프로이센에서도 대대적인 혁명 시도가 있었으나 프랑스군과 프로이센군이 개입해 무력진압을 진행, 피 위에 피를 덧칠해가면서 진압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지옥도가 열렸다.
“현재 백군과 청군 모두 적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급급합니다. 특히 청군의 경우는 쿠데타가 벌써 일곱 번째 일어나서.......”
“미치겠네. 이래서야 지원해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데.”
“미군은 이미 의용군을 모아 투입했습니다. 아일랜드 역시..... 의용....군을 투입했고요.”
의용군? 웃기는 소리다.
그냥 영국군 포로와 사관학교 생도 등 아일랜드 공화국의 군정에 반항할 싹을 가진 놈들을 백군이나 청군 가운데에 던져주는 거다. 심지어 무기도 거기 도착한 뒤에나 던져 준다던가? 못 돌아오게 하려고.
대충 이역만리 머나먼 극동이나 페르시아에 던져놓으면 니들이 총기 들고 폭동 일으켜 봤자 우리한테 할 수 있는 짓은 없다 이런 마인드겠지.
그리고, 그리고, 이게 참 중요한 부분인데.
“트로츠키가 실각했고, 청군 지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래, 이거다.
아니, 트로츠키가 실각한 거.... 그렇다 치자, 저 양반이 내가 알기로는 원 역사에서 멕시코로 망명했다가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한테 죽거든?
그러니까 저 양반이 실각하는 게 역사대로라는 거지, 정확한 원인이나 이유는 모르겠다만.
근데 청군에게 넘어가?
물론 청군은 지금 잡탕의 도가니이긴 하다. 쿠데타와 숙청에서 살아남은 멘셰비키, 차르정은 싫고 독립을 원하는 러시아 전역의 민족주의자, 거기에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볼셰비키가 추가된 것 뿐이다.
그냥 원 역사의 백군에서 근왕파만 빼고 다 있다. 지금 백군은 근왕파‘만’ 부르는 명칭이니까.
그리고 청군은 지금 지형 때문에 그 지랄맞은 정치싸움 와중에도 숨이 붙어 있다. 공격하려면 바다를 건너거나 산을 넘어야 하는데 바다를 건너자니 해군이 없고 산을 넘자니 대포밥 신세인지라 적군도 공세에 적극적이지 않고, 적군 내부에서도 반볼셰비키 반란이 일어나는 등의 문제 때문에 내부단속하느라 공세를 안 하고 있다.
트로츠키가 뭔가 된통 당해서 주변인 모두에게 손절당하고 소련 내에 있으면 목숨이 위험할 상황이라면 그래, 선택할 만한 도피처다. 어차피 청군은 뭐 제대로 된 의사결정기구도 없거든.
한 마디로 대가리가 아홉 개인 히드라도 아니고 서로 협력할 생각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메두사의 머리카락에 달린 뱀들 수준이다.
근데 총살당할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혹시 스탈린이라는 자가 뭘 하는지는 알려진 것 있나?”
“스탈린.... 이오시프 스탈린은 볼셰비키 최고위원회의 위원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집단지도체제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의전서열상......”
뭐, 스탈린도 태어나면서부터 독재자는 아니었겠지, 처음부터 절대권력을 쥐고 흔든 양반은 아니었을 테니 한 계단 한 계단 밟아올랐을 거다.
근데 트로츠키를 싫어하는 건 스탈린이었는데 왜 트로츠키가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튀어야 했나 싶어서 부하린은 바지사장이고 스탈린이 절대권력을 잡은 건가 했는데 웬걸, 스탈린은 그냥 일종의 기술관료진의 대표주자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고 현재 지도자는 부하린이란다, 스탈린과 개인적 친분이 있기는 한데 그게 끝이고 부하린이 스탈린의 조종을 받는다는 증거는 없다.
그래서 알아보니 트로츠키 저 양반이 적을 한둘 만든 게 아니었다. 최고위원회의 위원 모두가 트로츠키를 죽이고 싶어하고, 군부와도 척을 질대로 지고, 심지어 건방지고 거만하며 잘난 체까지 심해서 공산당에서, 심지어 트로츠키 라인을 탄 인간이라고 해도 트로츠키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단다.
그 서슬 퍼런 소련에서 저래놓고 권력투쟁에서 밀렸는데 목숨이 붙어 있기를 바라는 게 양심이 없는 거겠지, 적이 어지간히 없고 당내에서 친구가 많으면 투쟁에서 밀려도 한직으로 쫒겨날 뿐 모가지는 간수할지 몰라도 평소에 저러고 다닌 놈은 가족 목숨은 구할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할 거다.
망명한 것도 이해가 가지, 근데 저놈 가족이 있던가......
아무튼 간에, 우리는 최대한 반공을 내세우며, 저 사탄의 성채에 맞설 십자군을 모으고 있다.
임시명칭 유럽연합의 가맹 후보국은 의장국인 프랑스, 남독, 북독, 네덜란드. 참관국으로 이탈리아.
이탈리아가 상황이 많이 애매한데, 이놈들은 그야말로 샐러드 그 자체다.
일단 이탈리아인들은 힘을 합쳐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멸망시킨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알프스 북쪽으로 쫓아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프랑스와 남독일 연방군이 빨갱이들을 조지라면서 전차로 이탈리아군의 머리통을 수확하기 시작하고 로마고 나발이고 사방군데에 폭격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파스타 놈들은 슬슬 또 다시 망국을 우려해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야 망했지만 새 주인님은 누구든 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프랑스, 남독일 연방이 로마로 진격하기 시작하자 이탈리아의 정치지도자들은 줄줄이 해외 망명을 준비했다. 빨갱이들은 소련으로, 나머지는 남미나 아시아 어디쯤으로.
그러나 우리가 국내의 불온한 분위기와 이베리아 반도 문제, 네덜란드 문제 등으로 군을 빼내자 이탈리아군은 잠깐 한숨을 돌렸다.
말했듯이, 잠깐이었다.
우리가 슬슬 집안청소 끝내고 다시 이탈리아 독립군과 납의 대화를 나누려고 하자, 이탈리아인들은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친 끝에 미 행정부를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윌슨 행정부는 이탈리아인에게는 이탈리아인의 나라를 세울 권리가 있고, 이들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도 망했는데-제국에서 대공국으로 떨어졌으면 망한 것 맞지-미국 정부가 중재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나? 나는 애초에 몇 개 뜯어내고 빠질 생각이었다. 영토를 넓혀? 이탈리아를 지배해? 이탈리아 놈들이 우리 지배를 퍽이나 순순히 받아들이겠다.
게다가 남독과 북독이 통일하려고 간 본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즉시 우리는 경계태세에 들어가야 했기에 이탈리아 전쟁에 발 계속 담그기도 어려웠고, 일단 양측 모두 휴전하고 협상을 하기로 했는데, 이놈들은 휴전하자마자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느냐 독립하느냐를 놓고 싸울 때는 일단 협력했지만, 원래 이탈리아는 지역 특색이 강한 나라, 좌우대립도 극심한데, 우리가 전제한 게 문제가 되었다.
기존 이탈리아 왕실의 복귀는 불허, 신생 이탈리아 공화국은 공산당을 금지한다는 협상 조건이 던져지자 여기서 시비가 붙은 것이다.
일단 상대가 자신들의 독립을 인정해줄 의사가 있다는 걸 확인했기에 싸움을 할 만한 상태가 되었고, 이탈리아 공산당은 즉각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우익 측은 손해볼 거 없다며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 왕당파는 길길이 뛰면서 사보이아 왕조의 복귀를 주장했고, 결국 왕당파와 공산당이 손을 잡고 나머지 전부와 싸움박질을 벌였다.
이게 정치판의 싸움으로 끝나면 모르겠는데 무력충돌까지 동반되었고, 결국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자 이탈리아가 독립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이/탈/리/아가 될 판이 되고, 공산당과 왕당파가 장악한 몇몇 지역이 아예 자기들끼리 따로 놀겠다며 이탈리아 임시정부에서 탈퇴해버리자 날벼락을 맞은 이탈리아 임시정부는 곧장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그러자 결국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그대로 이탈리아 내전으로 전쟁 이름이 전환되었다, 우리가 이이제이를 노린 거였으면 최적이었겠지만, 우리는 휴전을 준수해 알프스에서 팔짱 끼고 구경하면서 남독과 북독일에게 니들 통일이네 뭐네 하면 전쟁할 각오 하라며 쌍심지를 켜고 있기만 했다. 사실 할 여력도 없었고.
당연히 이탈리아인도 외세의 개입이 없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해 전쟁 중에도 종전 협상은 계속했지만, 뭐 하나만 던지면 또 그게 정쟁의 명분이 되고, 결국 이탈리아 공화국은 출범해보지도 못하고 이름만 남아 갈가리 찢겨진 중세 이탈리아 꼴이 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래도 우리가 군을 움직이면 다시 뭉칠 준비는 되었다는 게 위안이었을까, 아무튼 간에 시간이 끌리다가 이탈리아 측에서 역제안을 했다.
이탈리아 측에서 프랑스가 국왕의 복귀도, 이탈리아가 통째로 공산화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이탈리아를 연방제로 하고 외교권만 연방정부가 가지는 걸로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거기에 연방 의장국을 태생적으로 공산주의와 상극일 수밖에 없는 교황령으로 지정해놓으면 프랑스가 우려하는 것처럼 사보이아 왕실이 이탈리아를 대표하거나, 반대로 공산주의가 이탈리아를 잠식하는 것 양자 모두를 막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고, 우리는 받아들였다.
그렇게 이탈리아 연방이 탄생했고, 이탈리아 연방은 탄생하자마자 중립국을 선언했다.
사실 각 주들이 자기만의 군대를 가진 시점에서 어딜 침략하든 전쟁에 끼든 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교황청은 국가를 주도적으로 이끌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명목상 수도인 로마 외에 중립적인 실질적 수도가 필요했고, 우리가 마지막까지 점령하고 있었던 베네치아가 낙점되었다.
그래서 명목 수도 로마, 의장국 교황청, 실질적 수도이자 상하원 소재지는 베네치아인 이탈리아 연방이 탄생했다.
그런 마당이라 이탈리아 연방은 참관국 지위만 획득했을 뿐,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다. 가입 여부가 타협이 안 되는 판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스페인 공산당이 정권을 전복하고 이베리아 연방을 선포하면서 포르투갈을 침공했고, 거기 개입한 프랑스군은 저항하는 현지인들과 맞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일랜드에서는 점령 중인 브리튼 섬에서의 반란으로 몸살을 앓는 등, 유럽 중 단 한 나라도 평온한 곳이라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