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적과 백(4)
“진격을 중단해야 하오.”
“그게 무슨 소리요, 브루실로프 동지.”
“말 그대로요, 진격을 중단하고 전 병력을 재편성해야 하오.”
“이유는?”
“후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진격을 중단할 명분으로는 부족하오?”
“브루실로프 동지, 후방의 반란은 거기에 한한 일이오, 저들이 그 산맥들을 넘어서 공세를 취할 수 있을 것 같소? 저들은 스스로를 가둔 거요.”
“그렇다 해도 공격할 수 없소.”
브루실로프는 고개를 저었다.
“이유가 뭐요?”
“우리 군의 공세종말점 때문이오.”
“하, 그것도 전투가 있어야 성립하는 일이지,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여 마침내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이 일어나 저들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독일인들이?”
“.........”
“단언컨대, 이건 함정이오. 우리는 공세의 주력이 되어야 할 훈련도가 높고 잘 무장된 충격보병들 다수를 상실했고, 포탄도, 화력도 부족하오, 게다가 러시아군의 보급선은 가느다랗기 그지없으니.....”
“위원회의 동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나는 러시아를 위해 싸우는 거지, 위원회를 위해 싸우지 않소.”
***
미제 윈체스터 버튼 자동소총이 미친 듯이 불을 뿜었다.
돌격해오는 러시아군들은 시체 위에 시체를 얹으며 쓰러져나갔지만, 그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젠장! 물! 물 가져와!”
“물 떨어졌습니다!”
“식수라도 부어!”
“그것도 없습니다!”
“그럼 바지 까고 오줌이라도 싸!”
총열은 과열되어서 휘어지고, 기관총은 아예 고장날 때까지 갈기다가 버리고 간다.
수랭식 기관총들은 총열의 열이 빠르게 식지만, 공랭식 기관총들은 아예 총열 자체를 물에 담그든가 해야 할 판이었다.
중대가 가진 총알보다 달려드는 적의 수가 더 많을 지경인 러시아군의 공세는 끝이 없었다.
-여기는 시에라 3! 즉시 포격지원을 요청한다! 좌표는....
-불가능하다! 당소에는 귀측에 포격을 해줄 만한 충분한 탄약이 없다! HQ에서 즉시 후퇴 명령이 하달되었다! 당소는 5분 내에 주보급로를 통해 철수한다!
-지상지원 임무를 위해 출격했던 아군 공격기는 격추당했다. 또한 해당 공역에서 더 이상의 가용한 항공자원이 없다.
탄약 고갈, 후퇴, 격추.
모든 통신망에서 들어오는 비명은 하나였다.
적이 너무 많다.
그 말 그대로였다.
***
모스크바. 슬라브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레닌이 암살당한 뒤 그 뒤를 이은 트로츠키는 적이 많았다.
레닌은 총에 맞은 뒤 죽어가면서 트로츠키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그는 그 오만함 때문에 너무나 많은 적을 만든 뒤였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 가운데 트로츠기의 ‘아군’이라 할 만한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모두가 적이었다.
“우리는 전쟁을 끝내야 하오, 연방의 국력은 이미 바닥상태에 도달했으며, 이는.....”
“그러면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트로츠키 동지?”
“독일과 프랑스와 협상을 할 것이오.”
“협상이라!”
스탈린이 킬킬대며 웃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상대였다. 트로츠키 본인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레닌조차 스탈린을 주의하라는 유언을 개인적으로 남겼고, 실제로 레닌 생전 볼셰비키의 3인자, 지금은 2인자까지 부상한 그는 당내의 나름 고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정확히는, 여기저기 밉보인 곳이 많은 트로츠키가 축출되면 그 자리에 앉힐 만한 기술관료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본 그의 눈은 그렇지 않았다.
야심가의 눈.
그것이 트로츠키가 본 스탈린이었다.
“그렇소, 협상이오.”
“그렇다면 얼마나 내줄 것이오? 저들이 얼마의 영토를 내주어야 만족할 거라 생각하시오? 북으로는 레닌그라드, 남으로는 볼고그라드라도 내줄 거요?”
“얼마를 내주든 간에, 어차피 혁명이 일어날.......”
“집어치우시오, 동지.”
“뭐요?”
“집어치우라고 했소, 우리가 혁명에 성공한 건, 지독히 운이 좋아서였소, 당신의 영도력 따위로 당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고. 대부분의 당 원로들이 선거 결과를 엎어버리고 쿠데타를 하자는 주장에 반대한 까닭이 뭐였는지 벌써 잊었소? 아, 그래, 당신은 원래 기억력이 나빴지. 암, 당신이 내린 명령 하나 때문에 그나마 중립국들과 가지고 있던 외교관계들도 다 박살났지만 그 명령을 내린 기억이 없다고 했지.”
스탈린의 조롱에 욱한 트로츠키가 삿대질을 시작했다.
“지금 동무는 레닌 동지를 부정하는 것인가!”
“실력과 운을 착각하지 마시오, 전위당은 아직 껍질도 채 굳지 않은 연약한 신세요, 동지. 그리고 다른 나라의 당들도 마찬가지고! 지금 연방 내 실무가 얼마나 대혼란인지 눈곱만큼이라도 아는 바가 있소? 지금 전선에 나가 있는 병사가 몇 명인지는 알고 있으시오? 동원 계획은? 전쟁이 끝나면 저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방도는 있고? 러시아 제국의 관료제는, 애초에 부실했던 것마저 철저히 박살난 상태요! 지금 동지가 희망하는 건 보나파르트적 모험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오!”
보나파르티스트. 트로츠키를 공격할 때 꽤 자주 쓰인 단어였다.
“협상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오, 협상으로 잃은 영토를 혁명으로 되찾을 가능성은 0이라고 말하는 거요. 당신이 처음에 지껄였던 무배상, 무할양은 논할 가치도 없으니 집어치우고, 현 전선에서 국경을 확정하는 대신 배상금을 낼 걸 약속해야지.”
“배상금?”
“배상금 지불은 협상으로 줄이든, 아니면 그냥 힘이 생기면 배를 째버리든 할 수 있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주요 이해 당사자인 프랑스와 독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거고!”
스탈린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중제국, 오스트리아의 혁명은 글러먹었소, 그건 애초에 사회주의 혁명도 아니오, 민족적 갈등과 모순이 폭발한 거지. 터질 일이 터진 거요. 헝가리와 보헤미아는 점령했지만, 거기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면 안 되오, 이 상태에서 협상을 제안해야지, 독일의 원래 영토는 한 발짝도 침범하지 않을 거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서도 손을 떼겠다고.”
“그건 혁명에 대한 배신이오!”
“배신이고 충성이고 국가가 유지되어야 있는 거요,”
“..........”
“아예 바르샤바까지는 떼어주겠다고 하는 것도 고려는 해 봐야지. 그렇게 독일을 달래고, 프랑스와 미국은 배상금을 내겠다고 제안해야지, 사실 프로이센이 거기에 만족한다면 프랑스와 미국도 별달리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스탈린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연방에 필요한 건 다른 게 아니오, 시간이지, 이 나라가 통째로 무너지는 걸 보기 싫으면, 단 10년이라도 체제를 정비할 시간이 필요하오.”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 협상을 하자는 거요.”
“협상을 해서 혁명으로 되찾아오겠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문제란 거 아니오. 우리가 적어도 겉보기로라도 저들을 위협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기에 대등한 수준의 협상이 가능하다고, 그리고 우리는 항복 선언이 아닌 평화 협상을 하러 왔다고 말할 정도의 성과가 필요하오! 차르 전제정을 무너트린 건 혁명의 끝이 아니오, 시작의 끝일 뿐이지!”
애초에 트로츠키는 볼셰비키라 부르기 어려웠다. 그는 언제나 정치적으로 외로운 존재였다.
그에게 아군이 없는 것은 그의 거만하고 잘난척하기 좋아하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그의 지위의 특수성도 있었다.
그는 애초에 볼셰비키와는 조금 다른, 일종의 일인 정당 같은 존재였다. 지향점도 상당 부분 달랐지만, 그의 파벌이라 부를 이들 중 고위 정치인은 하나도 없는, 그런 존재였다.
즉, 볼셰비키 원로들에게 있어서 트로츠키는 ‘굴러온 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가 레닌의 후계자라는 사실 역시, 볼셰비키의 고위 인사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
“에리히 루덴도르프.”
힌덴부르크가 차갑게 말했다.
“귀관을 공산주의에 대한 동조 혐의로 체포하네.”
“결국 이런 식입니까.”
“이적죄를 적용하지 않은 걸로 다행히 여기게, 임시라고는 하지만 프로이센의 참모총장이 적을 이롭게 했다는 건 체면을 구길 일이니까.”
“내가 빨갱이라고 하는 건 체면을 구기지 않나 보군.”
그들도 루덴도르프의 작전계획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게 상당히 일리가 있다는 것도. 다만, 그 청야전술의 피해를 그들이 직격탄으로 맞기에, 그리고 보상을 기대할 수도 없기에 결국 그를 끌어내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체포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처형할 수밖에 없는 이적죄보다는 적당히 처리할 수 있는 불온 사상 유포 정도로 처리한 것이다.
“힌덴부르크 장군, 내 예언 하나 하지요. 당신네들은 프로이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협상을 할 작정이겠지만, 20년이 되지 않아 당신들은 그 선택을 피눈물로 후회하게 될 겁니다.”
***
중앙아시아는 세 개의 세력이 크게 충돌하고 있다.
백군과 청군, 적군의 각축장이 된 이곳에서는 세 개의 세력이 서로 만나 전투를 벌이는 경우도 심심찮게 벌어졌고, 이곳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컥!”
화살 한 발이 중국식 대도를 들고 돌격하던 적의 목을 꿰뚫었다.
영국제 롱보우를 내려놓은 남자는 클레이모어를 휘둘러 자신을 노리는 일본도를 막아내었다.
“후!”
“끼야앗!”
괴상한 기합과 함께 일본도가 날아들었지만, 청군의 복장을 한 청년은 클레이모어로 상대의 일격을 막아내었다.
“잭!”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검들과 창까지 끼어들어 그야말로 중세 시대 냉병기 전투를 연상시키는 격검이 벌어졌다.
접근한 적들을 하나둘 쓰러트린 청년, 잭 처칠은 전투가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자 태평하게 바위 위에 걸터앉아 백파이프를 꺼냈다.
“저 미친 새끼.”
청군 최대의 또라이라는 별명이 붙은 잭 처칠은 영국군 사관생도였지만, 의용군에 편성되어 쫓겨나다시피 해서 이란으로 왔다.
그리고 청군에 합류해 중앙아시아에 파견되었다.
총이 아니라 칼과 활을 들고 전선에 나가는 괴짜 중의 괴짜였지만, 질기도록 살아남고, 또 심지어 잘 싸웠기에 그의 행동은 청군에서 이미 유명인사였다.
“놈들이 다시 온다! 백파이프 불 시간 없어! 일어나!”
물론, 잭은 기어이 한 곡을 완주한 뒤에야 무기를 잡았다. 그리고 칼을 미친 듯이 휘둘러대면서 수십 명을 연달아 쓰러트리는 광기 어린 용맹을 본 적군과 백군 모두가 사기가 꺾여 후퇴하게 만들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기에, 그의 전우들은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얼마 뒤, 전장을 둘러보며 담배를 문 잭이 툭 던졌다.
“이번에는 볼셰비키 두목이었던 놈이 망명했다면서?”
“트로츠키? 응, 그렇지, 자길 따를 사람들을 모집하고 다닌다던데.”
청군에는 사람이 많았다.
일종의 낭만을 찾아 온 모험가들도 제법 있었고, 문자 그대로 세력 자체가 붕괴해서 갈 데가 없는 사병들과 장교들, 야심가들 등등이 총 한 자루 쥐고 돌아다니는 게 청군이었다.
그리고 야심가나 선동가들은 그런 이들을 끌어모아 자신의 세력으로 삼고 군벌이 되기도 했다. 그런 군벌들에게 평의회는 적군에 맞서 싸우겠다고 서약하기만 하면 계급과 군번을 내려주고, 일정 규모 이상의 군벌-최소 1만 명 이상-은 평의회에 그들의 수장을 참석시켜준다.
심지어 망명자들 중에서도 그런 식으로 군대를 끌어모으는 이들도 있었고, 트로츠키 또한 그랬다.
물론 그놈의 성깔을 고치지 못하는 이상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는 어려울 터였다.
이곳의 병사들은 사람을 보고 따르고, 이득을 보고 따르고, 명성을 보고 따른다. 군대라기보다는 추종자에 가까웠다. 당연히 떠나는 것도 자기 자유였고, 선동으로 열심히 사람을 모아봤자 그 건방진 태도 때문에 아군을 못 만들다 보면 결국 다 떠나기 마련이다.
“가볼 거냐?”
“싸움만 많을 것 같다면야.”
낄낄댄 잭 처칠은 수통에 채운 위스키를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