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적과 백(3)
북독일, 베를린 참모본부.
루덴도로프는 차갑게 답했다.
“불가능합니다.”
“그게 무슨.....”
“현재 참모본부에서는 필요에 따라 동프로이센 역시 포기할 의사가 있습니다.”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하나! 제국의 점령지를 전부 내주는 것도 모자라 영토를 내주겠다고?”
“장군님, 러시아가 두 번의 공세를 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뭐?”
“편의상 모스크바라고 하죠, 모스크바에서 여기까지, 몇 줄기의 강을 제외하고는 거의 평야입니다. 아니, 여길 넘어서 라인, 그리고 알자스-로트링겐까지 전진해야 방어선으로 쓸 만한 자연지형이 나옵니다. 1870년의 전쟁 당시 우리가 알자스와 로트링겐을 손에 넣으려 했던 이유이가도 하죠.”
“그래서, 뭔가?”
“본국이 떠맡고 있는 전선은 현재 총 3400km에 이릅니다. 이를 극적으로 축소합니다. 여기서 병력을 더 징집하면 그때는 베를린에도 적기가 내걸릴 겁니다. 공간을 내주고, 시간과 병력을 아껴 그 병력과 시간으로 국내의 반역자들을 토벌합니다.”
루덴도로프의 손은 태연스레 움직였다.
“점령지로 모자라다면 프로이센 지역도 내줍니다. 베를린이 최전선이 될 때까지는 물러날 수 있습니다. 그 동쪽에 변변한 공업지대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프랑스가 우리 배후에 있는 이상 식량 문제에는 큰 우려가 없습니다.”
탁, 탁, 탁.
지도 위의 말판이 옮겨지고 치워진다. 국내의 반역자들은 섬멸되고, 적들은 베를린까지 다가온다.
“프랑스가 순순히 군대를 내놓지는 않을 겁니다. 저들은 스페인에도 병력을 보냈고, 영국의 일도 마무리지어야 하며, 이탈리아에도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자기들 식민지도 신경써야 할 대상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도를 위협받을 지경까지 밀렸다면 저들도 수백만 명 정도는 내놓게 될 겁니다.”
“........”
“그리고, 그 시점이면 우리의 약점은 전부 저들의 약점으로 돌변합니다. 우리의 신민들 모두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니, 저들은 후방 안정을 위해 대규모 병력을 상주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점령지에서 그러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프랑스군과 연합해 진격합니다. 프랑스 기갑세력의 충격력을 대단하며, 저들은 그 시점에는 탄약과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이 거의 고갈되었을 터, 단숨에 회전을 벌여 섬멸하고 기존 점령지를 되찾습니다. 그 이후에는 작전도 필요없습니다. 장갑열차를 전진시켜 눈에 보이는 도시마다 내려서 빨갱이들을 잡아들여 총살한 뒤 전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요.”
“독일의 혼을 그것 때문에 쑥대밭으로 만들 건가!”
“전 1년전쟁에 참전했었습니다.”
에리히 루덴도로프의 눈빛은 누군가 한 명은 죽여버리고 말 듯한 눈빛이었다.
“하급장교로써 전선에 나섰을 때, 수천 발의 기관총이 퍼부어지고 제 부하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저만 살았죠, 그리고 다른 적 병사를 마주쳤습니다.”
“........”
“시체 더미에서 기어나온 우리 둘은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왜 싸우는가, 수십 개 사단의 피를 뿌려 얻은 땅은 그들을 묻기에 충분하기는 한가!”
“루덴도로프! 이건 불경죄네! 감히 프로이센의 장군이...”
“난 당신네들 같은 융커 귀족 나으리가 아니야!”
루덴도로프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고 삿대질을 시작했다.
“당신네들 영지가 불탈까봐 두려운가? 맹세컨대 내가 본 그 광경을 되풀이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못할 거야! 당신네들 영지를 지키려고, 그것도 언제든 되찾을 수 있는 땅쪼가리 좀 지키겠다고 기세등등한 적군을 상대로 정면에서 대결하라고? 대체 왜? 저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야! 식량도, 연료도, 탄약도 없어! 저들이 건 유일한 희망은 보급이 없는 상태에서 벌이는 단기결전뿐인데 거기에 당신들의 경제적 손해를 감싸주기 위해 응해줘야 하나? 병법의 기본은 이기는 전장에서만 싸우라는 거고! 당신네들의 알량한 영지는 전쟁수행에 있어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존재야! 당신들의 영지가 좀 짓밟히면 프랑스의 청년들이 우리 대신 피를 흘릴 것이고 프랑스의 곡식을 들여와서 국민들을 먹일 수 있으며 훨씬 적은 피해로 승리할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전투를 회피하는 건가? 겁쟁이 같으니!”
“감투정신 따위는 개나 줘! 당신네들이 지껄이는 감투정신은 감투정신이 아니야! 개죽음을 조장할 뿐!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을 지키는 용기를 감투정신이라고 하는 것이지 충분히 대체할 수 있고 지킬 가치가 없는 것을 지키겠다고 생목숨을 내다버리는 건 감투정신이 아니야!”
“그만하게!”
그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콧수염을 기른 프로이센 기병장교의 복장을 입은 노인, 마켄젠이었다.
***
“꼭 그렇게 거칠게 나가야 했나.”
“전 성에 폰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폰(von)은 귀족 집안의 성씨. 루덴도로프의 이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영지도 없죠.”
“그렇다고 해서 귀족층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네, 차라리 바르샤바까지만 물러나라고 했으면 저항이 이렇게 크지는 않았을 거야. 게다가 자네의 보직은 임시보직 아닌가. 그날의 폭탄이.....”
“제게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변명에 급급한 겁쟁이라고 하신 건 당신 아니셨습니까. 마켄젠 장군.”
“그 말은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었네.”
“상관없습니다. 이번 전쟁만 끝나면, 군에서 손을 뗄 테니까요. 제 군생활이 힘들어진다? 이미 충분히 힘듭니다. 이제야 결심했으니까요.”
“........”
“전시라서 자원에 의한 예편은 불가능하지만, 전쟁이 끝나는 대로 퇴역할 겁니다.”
“그 다음은 어쩔 건가.”
“모르죠, 과일장수라도 할지.”
“거 참.....”
“애초에 저들은 더 이상의 유의미한 공세를 할 수 없습니다, 보헤미아와 헝가리를 무너트린 것만으로도 군사학적으로 기적이지만, 원래 도박을 하는 자들은 상대의 패가 보이는 것 같으면 들이박는 편이죠.”
“이번에도 그럴 거다?”
“저들은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하고, 물자도 부족하고, 무기도 부족합니다. 있는 건 사람뿐이죠. 반드시 먹힐 겁니다. 적장이 굉장히 유능한 걸로 추측된다는 게 우려되지만요.”
“그 경우 어떻게 할 것 같나?”
“적정 선에서 진격을 중단할 겁니다. 그 경우, 저는 시차를 두고 저들에게 타격을 줄 겁니다. 이미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는 적 수뇌부는 그 이름모를 장군에 대해 뭐라고 하겠습니까.”
“...... 과연.”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적을 놓아주고 저와 내통했다는 명분으로 최소 보직해임, 아마 높은 확률로 처형당할 겁니다. 우리는 이후의 작전을 훨씬 편하게 전개할 수 있겠죠.”
루덴도로프는 그렇게 말했다.
“다 좋네, 자네의 말은 전혀 문제가 없어.”
“이미 철수 계획과 보급 계획, 재편성 계획 등은 전부 세워뒀습니다. 물론 이는 대략적인 계획으로, 현장의 상황 및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슐리펜 장군의 실책을 다시 반복할 이유도 없으니 말입니다.”
“루덴도로프, 하지만 그 전에 자네가 총에 맞거나 쫓겨날 것 같군.”
“하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자네의 계획 중 하나는 확실하게 틀어질 걸세, 긍정적인 방향일지, 부정적인 방향일지는 모르겠지만.”
“........?”
“쿠데타를 일으켜 러시아의 현 지도자가 된 블라디미르 레닌이 총에 맞았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정면충돌을 일으켰네.”
“아직 극동의 러시아 제국의 잔재를 쓸어내지도 못하지 않았습니까?”
적군은 시베리아를 무너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계했고,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공세를 가해 상당한 영토를 얻었지만, 위구르와 티베트, 만주, 몽골, 그리고 한반도 지역은 황태자의 지휘 하에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내줄 건 내주고 나머지의 방어를 강화했다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그리스, 아나톨리아, 인도의 일부 지역과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등등의 지역에서 반제정, 반볼셰비키를 동시에 내세운 반군이 반란을 일으켰네, 멘셰비키와 연계된 것으로 보이고, 반군의 조직도로 보아 단일 수뇌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
지도 위에 그어진 선을 본 루덴도르프가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헬레니즘 제국을 그려놓은 모양새군요, 마케도니아 제국군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비꼬지 말게, 결론만 말하자면 이들은 멘셰비키거나, 빨갱이인 건 마찬가지지만 레닌, 그리고 레닌의 후계자라고 선언하고 볼셰비키를 장악한 트로츠키와는 해석을 달리하는 분파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러시아 제국에 저항해왔으나 빨갱이는 아니었던 세력들이 연합한 군벌세력들이네, 하지만 아직 취약한 빨갱이들에게 있어서는 더없는 위협이지, 저들의 위협 때문에 그 장군이 더 진격을 못하거나, 그렇게 되었다고 윗선에 보고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이네.”
“..........”
“그렇게 되면 자네가 먼저 처형당할 수도 있네. 밀어붙이지 말고 설득을 하게, 적어도 자네는 지금 나는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 않았나.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게.”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습니다. 일일이 모두에게 협력을 구하다 보면 어떠한 군사작전도 수행될 수 없습니다. 장군께서는 한 번 설명하면 이해하시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으니 멍청이들을 설득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들이 멍청해서 자네 말이 타당하다는 걸 이해 못하는 줄 아나? 멍청하면 이 건물에 있지도 못하겠지.”
껄껄 웃은 마켄젠은 노회한 눈빛으로 옛 부하를 보았다.
“그놈들도 알아, 자네가 어떤 의도로 퇴각을 명했는지, 탐욕이 눈을 가린 탓에, 어느 게 더 중요한지를 구분을 못할 뿐이지. 그리고 그 의도를 감추려다 보니 멍청한 척을 하게 되는 거고.”
“장군께서는 어떠십니까.”
“나?”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우선순위를 그토록 혼동했다면 이 자리에 없었겠지.”
***
요즘은 그냥 회의실에서 먹고 잔다. 대충 한구석에 해먹을 걸어놓고, 식사는 삼시세끼 샌드위치로 떼운다.
이빨로 무덤을 판다는 프랑스인의 황제가 이러고 있기는 모양새가 좀 그랬지만 어쩌겠는가, 밥먹을 시간도, 잘 시간도 부족한데.
“반 볼셰비키 연합세력......”
“편의상 청군이라고 하지.”
“예, 청군은 현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지휘부를 차렸습니다.”
“해군력은 양쪽 다 사실상 없으니 그리스 전선, 캅카스 전선, 중앙아시아 전선이 주 전장이겠군.”
“중앙아시아는 여전히 백군이 출몰하는 지역인 데다 산맥이 가로놓여 있어서 상식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거기를 넘지는 못할 겁니다.”
“청군 병력은 아라비아 반도와 이집트로 진격, 영국 식민지군은 저항 없이 이들에게 손을 들었고, 이들의 장비를 취득해 중무장했습니다. 수에즈 운하 역시 이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흠.”
“청군 지도부에는 이슬람교도들도 제법 있습니다. 적어도 중동 지역의 현지인들을 전선에 투입할 정도로는 있을 겁니다.”
“캅카스 지역도 산맥이 가로놓여 있으니 방어자에게 있어 극도로 유리할 터, 사실상의 전선은 그리스 전선뿐입니다. 그나마도 그리스에 워낙 산이 많다 보니 공세가 불리합니다. 사실상 천혜의 요새에 틀어박혔다고 해도 되겠군요.”
“내분만 안 터지면 제법 오래 버티겠군.”
근데 저 꼬라지에 내분이 안 터지기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