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적과 백(1)
전쟁의 포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좋은 소식은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애 이름은 뭘로 할 거냐?”
내 질문에, 루이제는 조용히 답했다.
“여러 이름 생각해 봤는데, 필리프 프랑수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을 것 같아요.”
“좋은 이름이군.”
나는 샤를이 안고 있는 내 손자를 들여다보았다.
새근새근 잠든 손자의 얼굴을 내려다본 나는 나직이 말했다.
“언젠가 네가 이 나라를 물려받을 거다. 필리프.”
***
일본 열도, 혼슈, 조슈 번.
“이봐, 바실리!”
“무슨 일입니까, 부됸니 장군.”
“어차피 같이 전선에서 구르는 입장에서 좀 정감 있게 나오면 어디 덧나는가? 허.”
콧수염을 실룩거린 세묜 부됸니 기병대장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내 부하들만 데리고 저놈들 좀 휩쓸어보고 오겠네, 안 된다고는 하지 않겠지?”
적위대 정치장교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는 짜게 식은 눈으로 기병들을 보았다.
적위대에 가담한 일본 주둔 카자크 기병들은 낄낄거리면서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군율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저 마적떼처럼 보이는 자들은 붉은 군대의 나름 정예병이었고, 부됸니는 병사 소비에트에서 그 인품으로 인해 정당하게 투표로 뽑힌 인물이었다.
물론 블류헤르의 눈에는 그냥 마적 두목같아 보이긴 했지만, 그는 적위대에서 가장 뛰어난 기병장교 중 하나였다.
“돌파해서 적들을 분쇄할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으음?”
“저는 기병으로 복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잘 아실 당신께 묻는 겁니다.”
“물론이지! 못 뚫으면 책임지겠네, 저런 잡스러운 놈들을 분쇄하지 못해서야 말등에 있을 자격이 없지, 안 그렇소 동무들!”
카자크들은 웃어대며 동조를 표했다. 마유주를 한 모금 들이킨 부됸니는 훌쩍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가보겠소!”
블류헤르는 한숨만 푸욱 쉬었다. 아무래도 일본 생활은 참 험난할 것 같았다.
그래도 뭐, 설마 져서 오겠는가?
저 나폴레옹 전쟁기보다 더 전에 나온 것 같은 놈들을 상대로 말이다.
***
말들은 가볍게 뛰었다.
본래 기병대는 저 멀리에서부터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들이박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기병의 돌격은 상당히 느린 편이다.
그 대신, 기병들의 돌격은 진형을 확고하게 유지해야만 한다.
일본에 있는 카자크는 창기병, 총기병, 검기병이 뒤섞여 있었고, 부됸니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저 너머에 대규모의 반군이 모여 있었다.
일본의 독립을 외치는 자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러시아의 일부가 된 이들이 독립을 외치는 걸 용납할 수 없었고, 당에서는 저들을 전멸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면 따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모습이 보였다.
방탄복 삼아 갑옷을 챙겨입고, 총과 창과 활과 검으로 무장한 적들이었다.
그 총도 러시아군이 하도 단속을 해서 제대로 된 근대식 화기는 많지 않았고, 텟포라 불리는 화승총까지 들고 나온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적 기병들이 달려왔다. 곧장 총기병들이 총격을 가했지만, 낙마한 이들보다 달려드는 이들이 더 많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갑주에 뿔 장식이 달린 투구, 그리고 일본식 장검을 든 사무라이들은 카자크 기병을 향해 육박했고, 곧장 카자크들도 기병창과 기병도를 들고 돌격했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
“소비에트 우라!”
함성을 내지르며 부됸니는 앞서 달려온 적 사무라이 선두를 향해 곡도를 휘둘렀다.
상대는 곧장 타치를 휘둘러 부됸니의 검을 막아냈고, 둘은 서로를 지나쳐 달려갔다.
상대에게 미련을 가질 여지는 없었다. 다른 적들도 많았.......
“동지! 전면에 적 장창방진!”
“뭐?”
진짜였다.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장창방진이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 여기 있는 카자크들은 포병 같은 게 없으니 장창방진은 분명 유효한 대책이었지만, 좀 얼떨떨하기는 했다.
“하하하하하!”
그러나 그 와중에도 좋다고 웃는 이는 있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
“동지?”
“동지들이여! 저 에미없는 놈들이 감히 우리와 백병전으로 붙어보겠단다!”
러시아에서는 역사적으로 장창방진이 드물었지만, 스트렐치가 파이크로 방진을 이루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200여 년 전에 사라졌지만, 부됸니는 자신이 대북방전쟁 한가운데에 떨어진 느낌까지 받으며 극도로 흥분했다.
러시아의 아버지, 표트르 대제와 스웨덴과의 전쟁의 일익을 맡은 기병대장의 심정이 되어 적들에게 돌진한 그는 곧장 눈앞에 보이는 적들을 참살했다.
“소비에트 우라!”
벤다, 찌른다. 피한다.
말을 달리고, 검을 휘두른다.
끓어오르는 피가 그의 심장을 두방망이치게 한다. 자신의 온몸이 눈앞의 적수들을 짓밟고 쓰러트리라며 함성을 지르는 듯 하다.
그리고 그는 그 감각에 온몸을 맡겼다.
뒤에서 포병들과 보병들을 떠맡아서 죽어라 오고 있을 블류헤르가 봤으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겠지만, 그는 본디 이런 사람이었다.
말 위에서 태어나, 말 위에서 죽는다.
자신의 동반자는 말이다.
유럽에서는 철조망과 지뢰, 기관총과 참호, 그리고 전차라는 물건으로 인해 기병은 정찰용으로나 사용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 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든 간에, 이곳이 기병의 마지막 단말마라면, 이 전쟁이 기병의 마지막 전장이라면.
자신 역시 그곳에 묻히리라.
그리고 이 전장은 그가 꿈에도 그려왔던 전장이었다.
기병이 활약하는 전장, 단순히 전장의 구경꾼이 아닌, 당당한 주력으로써!
극동은 유럽에 비해 너무나 낙후된 탓이었지만, 그게 중요하던가.
그러니 이 전장에서 눈을 감는다고 해도 아쉬울 것이 없다.
“우라!”
또 다른 적을 쓰러트리며 가슴에 맺힌 것들을 함성으로 토해낸다.
죽는다면, 말 위에서.
기관총의 총탄에 무의미하게 죽어나가기는 싫다.
그저 죽을 힘을 다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전장을 달려나가다가 그 마지막 순간에 죽는다.
그것이 말 위에서 태어나, 말 위에서 죽는 자들의 숙명이다.
유목민의 혈통은 아니되, 카자크들의 틈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스스로를 카자크라 여기는 한 남자의 가슴 속 깊은 소원이었다.
시대는 기계화를 외친다고 하지만 그는 전력으로 그 기계화를 거부하고 싶었다.
그 거대하고, 피비린내나며 영혼 없는 강철의 관짝이 어찌 말을 대체한다는 말인가.
그런 말은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인류 전장의 동반자에게 예의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소리를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는 기필코 그들의 따귀를 후려친 다음 말과 함께 달리게 할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사람의 믿음직한 전우인지 그 몸으로 깨닫게 해 주리라.
이것은 백날 말로 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과 함께 태어나, 말과 함께 호흡하고, 말과 함께 먹고, 자고, 울고, 웃으며, 말과 함께 죽는 자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니까.
그와 같은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각이니까. 애써 말로 설명할 필요도, 글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넓은 초원을 바라보면 자연히 드는 감정, 말을 타고 이 초원의 끝에서 끝까지 달리고 싶다는 그런 감정.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아니고서야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이 전쟁이 말의 마지막이라면, 기병의 마지막이라면 그 역시 마땅히, 그리고 기꺼이 그 마지막과 함께 시대에 휩쓸려 사라질 것이다.
말이 없는 전장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부됸니는 외쳤다.
“내 이름은 셰몬 부됸니다! 배짱 있는 놈은 덤벼라! 상대해주마!”
그 말과 동시에 말에 탄 기병들 다수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아직 안장 위에 있는 일본 기병의 거의 전부였다. 애초에 기병 자체가 몇 없었던 탓에 자신에게 덤벼들지 않는 적 기병들은 방금의 충돌에서 거의 다 죽었거나, 낙마했다.
다른 부하들은 이미 적 보병 방진에 대한 전투에 돌입했다. 사방에서 총성이 들리고 낙마하는 부하들도 있었다.
부됸니는 그 싸움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임무의 방기는 아니었다. 어차피 돌격 후 난전이 벌어지는 상태고, 적들의 방진을 깨부수며 벌어진 난전에서는 지휘도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들 모두 경험 많은 전우들이었다. 이미 상태가 난전, 아니, 일방적인 학살에 가깝게 변모한 이상 적들이 패주할 때 역습당하지 않도록 추격을 멈출 타이밍만 제때 지정해주면 될 터였다.
저들의 난전은 창과, 검과, 총과, 드물게 활과 화살로 이루어진다. 간간이 들리는 총격은 적도 죽이지만 그의 전우들의 수도 꾸준히 줄여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은 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화약과 조그마한 납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신, 훨씬 유서깊고, 나름 품위있는 무기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미 피를 실컷 먹은 기병용 세이버를 고쳐 쥔 부됸니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병들을 보았다. 모두가 고대 무사의 갑주를 입고 검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검격이 교환되었다.
아무리 검술의 귀재라고 한들, 마상전투는 검술이 아닌, 기마술의 역량에 더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적위군의 세묜 부됸니는 카자크의 혈통은 아닐지언정 말 위에서 태어나 말 위에서 죽는 카자크들에게 공정한 투표로써 선택받은 그들의 지도자이자, 그들 사이에서 나고 자란 이였다.
기병에 대한 전통도 거의 없는 일본인들이 마상검술로 부됸니를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말에서 내렸다면 상황이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승부는 이미 났다.
마침내 두 자루의 검이 부딪혔고, 단 첫 합에 첫 번째 적병의 일본도가 러시아제 세이버에 두 동강으로 부러져 나갔다.
전국시대였다면 모를까, 수백 년에 걸친 평화기를 열었던 에도 막부에서 사용된 검은 실전용이 아닌 무사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장식용으로 전락한 지 오래, 검의 실전성보다는 장식용으로서의 하몬 등이 중시되고, 당연히 검의 강도나 절삭력은 바닥을 치게 된 지 오래였다.
차라리 대량생산되는 구 일본군 시절의 군도나 경찰도를 구해 썼다면 나았겠지만, 사무라이들이 자기 가문이 보관하고 있던 ‘진짜’ 전가의 보도가 실전성을 고려한 전국시대 물건이라도 야금술의 차이 때문에 날이 깨져버리고도 남을 판에 에도 막부의 물건이라면 이미 처음부터 결론은 나와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목숨으로 치러야 했다. 두 번째 일격이 사무라이의 목숨을 앗아갔다.
평생에 걸쳐 익힌 승마술은 적 하나를 요리하는 동안 순식간에 적 기병들을 끌어내 각개격파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다시금 두 자루씩의 칼이 충돌했다.
끝내 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말 위에 남아 있는 전사는 단 한 명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