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백래시(3)
프랑스 제국, 파리, 튈르리 궁 회의실.
“러시아가 무너졌습니다. 오늘, 라디오를 통해 러시아 공화국의 탄생이 선언되었습니다.”
“상황은?”
“북독일 연방군이 모든 전선에서 대공세를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흑해에 도달하는 건 시간 문제랍니다. 다만 발칸의 러시아군은 여전히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으며, 러시아군이 자중지란에 빠졌다지만 아직 저항할 여력까지 상실한 것은 아닙니다.”
“차르와 그 가족들은?”
“차르 일가는 총 넷입니다, 그 중 하나는 아시다시피 파리 교외에 있으니 제외하고, 차르 부부의 생사는 불명입니다. 소문에 따르면 여름궁전에 포탄이 날아와서 부부가 모두 죽었다고도 하고, 살아서 도망다니고 있다고도 하고, 혁명군이 체포했는데 비밀로 했다고도 합니다.”
“황태자는?”
“극동에 있었답니다.”
“뭐?”
“이번 혁명..... 폭동은 철저히 우발적인 것이었고, 철저한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줄줄이 동조자가 나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무너졌습니다. 여전히 황실에 충성하는 군대도 많으며, 현재 반군이 장악한 세력은 상트페테르부르크뿐....”
내 눈초리에 혁명에서 폭동으로 외무장관이 보고를 정정했지만, 이 형국은 뭐랄까....
‘프랑스 대혁명?’
그러고 보니 바스티유 감옥 습격도 계획된 건 아니었다고 했지.
“황태자는 차르 부처의 사망을 공표하고, 스스로를 알렉세이 2세로 선언했습니다.”
“알렉세이 2세라.”
알렉세이 차르는 이전에 한 번 있었다. 표트르 대제의 아버지 이름이 알렉세이였으니까.
다만 그 이후 있었던 표트르의 장남 알렉세이 황태자는 표트르 대제에게 반역 혐의로 처형당했고, 이로 인해 후대에는 알렉세이라는 이름을 황태자에게 붙이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다.
그걸 처음 깼던 게 니콜라이 2세였지 아마? 그리고 그 대에 제국이 망했고.
“알렉세이 2세 차르.....라고 해야겠지. 아직 대관식을 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일단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극동의 군대는 황태자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만, 극동함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현재 차르에게는 해군력이 없고, 일본 열도는 반군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교전이 벌어졌다는 보고입니다.”
“임시정부에게서 들어온 협상 요청이나 비슷한 건 없나?”
“전혀 없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추측했을 때 임시정부 수뇌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거나, 적어도 항복 의사는 없어 보입니다.”
“전쟁을 끝낼 의지가 없다는 거군. 그럼.”
나는 혀를 찼다. 혼란스럽고, 심지어 적국이기까지 한 러시아 내에서 정치지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내가 알 길이 없기는 했지만. 러시아 혁명이 기어코 터졌으면 그 결과는 하나다.
적백내전.
다만, 여러 상황을 감안할 때 원 역사보다 러시아 공화국의 상황이 좋지 않을 거다.
당장 러시아 본토는 과확장에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붕 떠버리면서 곳곳에서 반란이 터져나온다고 들었다. 당장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발트 3국, 핀란드,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했고, 캅카스도 이슬람 반란으로 시끄럽다.
게다가 발칸 주둔군은 여전히 차르에게 충성한다지? 물론 발칸과 아나톨리아에서도 반란이 터져나오기는 했다만 전부 진압당했다고 하니 이쪽의 병력은 아직 전투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프로이센은 좋다고 진격하고 있고, 막 독립한 폴란드와 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로 진격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더라도 완전히 바보짓이지.’
당장 진압군과 프로이센군 사이에서 양면전선을 치르게 되지 않았는가. 아니, 백 번 양보해서 러시아가 지금 진압군을 보낼 상황이 아니라고 쳐도 보급도 싹 끊어진 상태에서 뭔 수로 프로이센군을 이기려고 독립선언인가? 원 역사처럼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박살난 것도 아닌데.
“가장 큰 문제는 극동입니다.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만주, 몽골, 위구르, 티베트, 한반도에 이르는 거대한 세력이 근왕파로 남아 있습니다. 알렉세이 황태자, 이제 알렉세이 2세는 조선의 옛 수도 한양에 있고요.”
“그러고 보니 러시아 제국이 자국 귀족으로 흡수한다고 옛 왕가들을 전부 블라디보스토크로 불러올리지 않았나?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
“탈출에 실패한 모양입니다.”
조선 이왕가, 일본 천황가 등이 지금 죄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 고종도 거기 있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대충 조지아를 합병할 때의 전례를 따른 모양인데, 그때 조지아 왕실은 러시아에서 대공위를 받아서 러시아의 주요 귀족가문이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도 그 가문 출신 장군들이 맹활약했다던데, 아무튼 니콜라이 2세도 그걸 따라했다.
덕분에 정복당한 국가에서 대부분의 귀족가문은 죄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반강제로 끌려갔다. 그래도 듣자니 일본에는 도쿠가와 가문을 비롯한 화족 세력들은 제법 남아 있다지만.... 일본 열도를 볼셰비키가 장악한 마당에 일본 열도에 있다는 게 그다지 좋은 건 아닐 것 같다. 차라리 한반도였으면 모를까. 근데 이왕가는 죄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네?
“사실 자명한 결과입니다. 현재 근왕세력이 차지한 영토가 넓어보인다지만 그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시베리아? 거기 사람이 살면 몇 명이나 살겠나? 거기는 그냥 일종의 통로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나 잔뜩 살지, 심지어 스탈린이 대숙청으로 인구를 인위적으로 늘리기도 전이다.
위구르나 몽골도 사정은 마찬가지, 티베트는 온통 산지라서 뭐 주워먹을 것도 안 나오고, 만주도 인구는 몇백만밖에 안 된다. 봉금령이 풀리기도 전에 통째로 러시아에게 뜯겼고, 만주족들 대부분은 러시아 치하에서 사느니 청나라로 떠나는 걸 택했다.
결국 상식선에서 생각해서 평화로운 국가도 아니고 지금부터 내전을 들어가야 하는 알렉세이 황태자 입장에서 대대적인 병력과 노동력을 징발하고 세금을 걷을 상대는 한반도 지역뿐이다.
일본이 있었으면 거기가 중심이었겠지만 거긴 섬이다, 극동함대가 배신한 시점에서 일본은커녕 제주도 장악도 아슬아슬한 판이니 일본에서 병력과 자원을 긁어모을 순 없다.
무기는 뭐, 원 역사에서도 백군에게 대대적인 물자 공급이 있었고 우리도 해줄 생각이기는 하고, 결정적으로 공업화 안 된 건 극동 전 지역이 어디나 마찬가지니까 애초에 의미가 없고.
“그러고 보니 알렉세이 황태자도 미혼이었던가?”
“그렇습니다.”
“흠.”
“왜 그러십니까?”
“만약 근왕파가 어찌어찌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고, 유럽 러시아를 되찾을 수 있다면 상관없을 일이지, 그런데 그게 가능해 보이나?”
“쉽지 않을 겁니다.”
이미 유럽 러시아는, 러시아 인구의 대부분은 저들에게 넘어갔다.
“알렉세이 황태자는 충분히 유능합니다. 오래 전 사망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의 환생이라는 이야기가 돌 만큼 뛰어난 인물이고, 개혁에 적극적이며 현실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모를까 불가능한 일에 극구 매달릴 사람도 아니고요.”
“뭔가 기책이 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문제는 이거네, 주력군이 되어줘야 할 극동은 러시아 제국의 통치에 가장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는 지역 중 하나네, 이제는 유럽 러시아에서 건너올 군대도 더는 없지, 극동 주둔군 자체는 아직 충성스럽지만, 그 주둔군의 수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본토는 다 뺏기고 멀리 식민지에서 절치부심해야 했던 자유 프랑스 꼴이다. 그나마 자유 프랑스는 비시 프랑스가 연합군에게 망하면서 귀국할 수 있었지만, 그건 비시 프랑스와 나치 독일군이 영국 해군에게 가로막혀 지중해를 건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시베리아로 연결되어 있다. 게다가 러시아 하면 남아도는 게 사람이고, 밭에서 캐내는 게 군인이다.
그리고 히틀러의 목을 따기로 작정한 연합군처럼 레닌의 목을 치기로 작정한-정보가 모자라서 레닌이 이번 혁명을 주도했는지는 모르지만-우방도 없다. 애초에 러시아 제국은 적국 아니었는가.
“만약 알렉세이 황태자가 패사(敗死)한다면 아나스타샤 공주가 제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도 있겠지.”
처음에는 애물단지였지만, 그녀도 이제 나름 이용 가치가 생겼다. 물론 써먹을 상황이 쉽게 생길 것 같지는 않지만, 사생아라도 낳으면 그것도 나름대로 정치적 카드로 쓸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튼, 내가 알렉세이 황태자라면 차라리 현지인들에게 자신이 주군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뭔 짓이라도 할 걸세, 결혼이든 뭐든, 물론 현지를 지배하던 왕가들이 죄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으니 그쪽 여자랑 결혼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겠지만.”
그 가문들은...... 10월 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전부 ‘예카테린부르크’당해도 이상하진 않을 거다, 여기서야 황제와 황후는 행방불명이고 공주 하나는 여기 있으며 나머지 셋은 태어나지도 않았고, 황태자는 항전하고 있으니 로마노프 왕조가 몰살당할 일은 없겠지만 다른 가문들은 그 꼴을 안 당하라는 법이 없다. 공산당이 로마노프 왕가를 다 죽이고 싶어도 이미 다 죽거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니 대신 총 맞는 셈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근데 애초에 여기서도 혁명이 2월 혁명이 아니라 6월 혁명이 된 판에 10월 혁명은 한 4월쯤에 일어나도 이상하지는 않겠지? 아니, 애초에 볼셰비키가 멘셰비키를 밀어내고 정권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알렉세이 황태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볼 때는 어떻게든 본토를 되찾으면 최상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희박한 만큼 협상해서 자기들이 확실하게 장악한 극동 영토를 가지고-원래 러시아 땅도 아니고 최근 정복한 극동 영토니-국공내전기에 국부천대를 한 장제스마냥 토착화하는 수밖에 없다.
애초에 시베리아와 만주를 모두 장악했으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장악한 적군도 몰아내지 못한다는 게 백군이 얼마나 궁지에 몰린 상태인지를 의미한다.
저런 전력으로 본토 수복은 망상에 불과하다, 원 역사에서도 실패했고.
최악의 경우라고 하면 당연히 백군의 마지막 거점까지 모조리 함락당하고 외국으로 도망가거나 죽어야 할 상황이지만, 일단 두고 봐야지.
“우리 측은 어떻게 되었나? 러시아에 공산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들으면 같이 움직일 불온분자들이 있을 텐데?”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남부 일부와 심지어 파리 내에서도 불온한 인쇄물을 유통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소규모 점조직 단위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유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전부 체포해,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가리지 마라, 신고하는 경우에 대한 포상금은 더욱 높이고, 인쇄하는 놈들은 싹 잡아들여서 반역죄로 처리한다. 모임을 가지는 놈들도 세 번 이상 참석했다는 놈들은 전부 반란음모에 참여한 간부급에 준해서 처리한다. 그 미만은 단순가담자로 분류하고.”
전시에 반역은 다른 처벌이 없다. 수괴와 간부급은 내부고발 당사자나 적극 협력 등의 감형사유가 없는 한 사형, 단순가담은 징역 혹은 태평양 군도로 유배형이다.
게다가 사상범의 경우는 체포된 놈들의 가족이나 친구 등등도 같은 사상에 물들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 주변인들도 감시 대상에 올라간다.
“문제는 우리만 정리한다고 잘 된다는 건 아니지.”
스페인, 포르투갈, 오스트리아-헝가리, 북독일, 남독일 연방까지.
빨갱이들은 마치 어디서 기어나오는지 모를 날파리 같은 놈들이다, 우리만 열심히 방역해봐야 큰 재미를 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