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백래시(1)
“롬멜 대위님! 즉시 후퇴해야 합니다!”
“뭐?”
“이 지역 전역에 포격 명령을 내렸답니다! 전 병력에게 후퇴를.....”
“이런 빌어먹을, 이미 부대가 돌격했는데.”
“얼마나 갔습니까?”
“돌격은 쇠르너 대위가 직접 지휘했고, 나는 후방에 남았지, 그리고 아까 자네가 봤던 하인리히 소위랑.... 중대 둘 합쳐서 8명 빼고 나머지 전부 다.”
“빌어먹을. 그놈들도 데리고 퇴각해야.......”
“지금 병력도 없고, 여기 남은 건 중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박격포병 등 필수인원이네, 지원을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가 없어. 자네까지 해도 여기 전부 열 명밖에 없고.”
“하지만 후퇴하라는 말은 전해야 합니다.”
“........”
롬멜은 이를 악물었다.
“가보도록. 어서, 시간이 얼마 없네. 우리도 버틸 수 있는 데까지는 버텨 볼 테니.”
***
포화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나마 요새의 주포와 부포는 해군 군함들을 쏘는 데에 관심이 많았고, 야포들도 해안에 포탄을 퍼부을 뿐, 한 명밖에 없는 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기관총이나 박격포, 대전차포 등을 요새 안에 있는 병력이 보유하고는 있었지만, 이들은 요새를 향한 견제사격 때문에 아예 벙커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독가스까지 퍼진 가운데 방독면이 빈약한 러시아군은 밖을 나다니지 않았고, 참호를 한참 동안 기어간 끝에 전령인 아돌프 히틀러 상병은 간신히 요새에 도달했다.
요새의 무너진 틈으로 진입한 히틀러는 얼마 가지 않아 한 무리의 독일 병사들을 만났고, 그 중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힘러 소위님!”
“아돌프 상병? 왜......”
“당장 퇴각해야 합니다! 양키들이 우리 머리 위로 포격을.......”
“우리 병력 중 부상자가 너무 많아, 17명밖에 안 남았고,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후퇴하다가 몰살당하겠지.”
“일단 공세로 전환한 척 하고, 적들이 싸우는 이들에게 유인된 동안 빠져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말은 좋은데, 누가 하겠나?”
“제가 합니다, 남은 탄약 전부 주십시오, 시선은 될 수 있는 만큼 끌어보겠습니다.”
잠시 멍하니 바라본 하인리히 힘러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거, 제가 쓰던 원고입니다.”
“이걸 왜 나한테....”
“전쟁이 끝나면 출판하려고 짬짬이 썼습니다. 만일 제가 돌아오지 못하면, 대신 출판해 주십시오, 제가 돌아오면 그때는 돌려주십시오.”
“반드시 돌려주겠네.”
힘러 소위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게르만의 영웅이야.”
***
상트페테르부르크 전투의 결과는 참패였다.
미군과 프로이센군, 남독일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미 해군을 포함해 14만 1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주력함 7척을 상실했다.
전사자 가운데에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독특한 이름이 있었고, 간신히 수송선에 타고 생환한 자 가운데에는 하인리히 힘러 소위라는 인물이 있었지만, 그것에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러시아군은 주력함 3척을 잃고 10만여 명의 군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함포사격으로 초토화되었을 뿐 아니라 막대한 민간 피해도 발생했다.
해안요새들 대부분은 반파되거나 완파되었다. 미 해군의 전함들이 모조리 박살난 뒤에도 모니터함이나 순양함들의 사격은 계속되었고, 이 가운데에는 대요새용 구포도 많았기에 폭삭 무너진 포대들도 제법 많았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켜냈고, 미군은 패배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리고 그 후폭풍은 미국 정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
“이번 참패는 오롯이 윌슨 대통령의 잘못입니다!”
“대통령은 즉시 사임하세요! 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서 애꿏은 미군들을 총알받이로 내던진 건 결국 대통령 아닙니까!”
“동맹국 군 수뇌부가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한 데다가 우리 장군들까지도 다수가 반대하는 작전이 도대체 왜 강행된 겁니까! 전쟁장관! 말 좀 해 보십시오!”
“애초에 유럽에 군대를 보내는 게 아니라 북미의 전선부터 먼저 해결했어야 했습니다!”
미국의 여론은 그야말로 지옥불이 되었다.
애초에 전쟁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고립주의자들은 기왕 전쟁이 터졌으니 멕시코와 캐나다만 때려잡고 전쟁을 끝내자는 주장을 들고 나왔고, 다수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당연히 1918년 미국 중간선거는 이미 누가 보더라도 끝장나 있었다. 상하원 모두에서 공화당의 압승이 예상되었고, 뭔가 큰 이변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1920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대권을 잡을 가능성은 없었다.
전쟁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다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똥물을 정면으로 뒤집어쓴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프로이센과 남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역시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전쟁 전체의 규모에서 1개 사단 정도면 그렇게 큰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간에 패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빌헬름 2세 앞에서 열린 어전회의 역시 혼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협상하면 어떻겠습니까? 빨갱이들이 계속해서 선동을 벌이고 있단 말입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프랑스군이 우리 배후로 진격할 겁니다. 적어도 프랑스 제국은 아직 종전 여론이 없습니다. 저들이 직접 당한 게 아니니까요.”
“빌어먹을, 고작해야 1개 사단이고 대국에는 큰 지장이 없소! 1년 전쟁 때는.......”
“그런데 소문은 우리가 20만 30만쯤 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수준이 아닙니까!”
“빨갱이 놈들은 선동에는 도가 텄잖소.”
“우리가 빨갱이들 때문에 고생이라면, 저들도 빨갱이들 때문에 고생을 하도록 만들어주면 되지 않겠소? 망명와있던 러시아계 빨갱이들을 러시아로 추방합시다. 놈들도 우리만큼은 후방에서 골머리를 앓아줘야 하니 말이오.”
“러시아군의 희생이 크긴 크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선의 보고에 따르면 발칸을 넘어 극동에서도 병력을 긁어모으고 있다는 것을 포로들을 심문한 결과 확인했습니다, 심지어 튀르크인도 있다는군요.”
“그건 긍정적이군, 적들도 병력이 슬슬 모자라지고 있다는 것 아닌가.”
“현재 국가적인 상황을 감안하면 러시아 내부에서의 반전 시위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지난 전투에서 이겼다지만, 러시아가 실질적으로 얻은 건 파괴된 도심뿐이니 말입니다.”
“그 부분은 군 정보부에 맡기겠네, 그리고.......”
“라스푸티차가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접근도 못 했다는 건 명백한 무능입니다. 힌덴부르크 장군을 해임하십시오!”
“루덴도로프 장군이 제법 공격전에서 능력을 보였습니다. 힌덴부르크 장군을 교체하고 루덴도로프 장군의 6군을 이용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알겠네.”
어차피 빌헬름 2세가 하는 일이라고는, 우습게도 저 너머, 그의 사촌인 니키가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강경파 군부 장성들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이미 러시아든, 독일이든, 군부가 우선권을 가지게 된 것은 똑같았다. 그나마 민주주의가 아직 형식은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는 적어도 문민통제는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으나, 프로이센은 애초에 문민통제는 엿바꿔먹은 군국주의 국가였고, 러시아는 1년 전쟁 이후 군부의 영향력이 커진 상태였다.
당장 러시아의 도발로 일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이 전쟁 역시 니콜라이 2세가 군부를 억제할 의지와 실질적인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을 전쟁이기도 했다.
물론 차르의 권위는 높지만, 아무리 권위가 높아도 쓰는 사람이 자격미달이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카이저 역시 마찬가지, 명목상으로는 군권과 인사권 등은 다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국가를 이끌어가는 것은 프로이센군 참모본부였다.
국가가 군대의 목줄을 놓치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어그러지는 법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랬다.
사실 이쯤 되면 체코는 아무래도 좋았다. 전쟁을 사실상 일으키기는 했지만, 니콜라이 2세는 체코를 병탄하고자 한 적도 없었다. 범슬라브주의에 만취한 군부가 멋대로 저지른 짓이었다.
반대로 빌헬름 2세 역시 굳이 이 전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는 판이었다.
그러나, 그 둘의 손을 떠나도 한참 전에 떠난 전쟁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이 모든 전선에서 진전이 없는 것은 보급의 부족 때문입니다. 미국이 참전했으니 보급 문제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단독으로 흑해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 치욕입니다.”
“요점만 말하게.”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대규모 공세를 제안합니다.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는 현재 이상저온으로 인해 심각하게 줄어든 본국의 식량 생산량을 보충하기에 적절합니다.”
“지금 프로이센군이, 튜튼 기사단의 후예가 약탈을 하자는 건가?”
“그래야 합니다. 현재 병참을 위해 국민들이 심각하게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줄이려면 겨울을 나기 전에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점령해야 합니다. 그리고 식량의 운송을 감안하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라스푸티차와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은 이제 모르는 이가 없었다. 1년 전쟁기에 바로 그것 때문에 패했고, 대전쟁에서도 진격이 지지부진할 때면 장성들이 으레 추위나 라스푸티차 때문이라고 하기는 했으니.
상대도 겨울엔 춥고 괴로우며 진흙탕이 되는 봄과 가을에는 제대로 움직이기 어렵다는 게 그나마 위안 아닌 위안이었다.
차량이건 사람이건 푹푹 빠져대는 지옥 같은 계절에 무슨 재주로 공세를 취한단 말인가? 보급마차들도 말과 함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간신히 기병들 정도만 단단한 곳만 골라 다니면서 정찰이라도 하고 다니는 시기에.
하늘에서야 1년 365일 내내 전투가 벌어졌고,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러시아에서는 그런 전쟁을 치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늦봄에서 초가을까지만 전쟁을 치르는, 실질적으로는 여름에만 전쟁을 치르는 꼴이었다.
여기에서 발칸은 모든 면에서 예외였다. 정예부대를 동원한 산악전과 유격전은 양측 모두에서 행해졌고, 당연히 겨울이라고 쉬지도 않았다. 라스푸티차라는 계절이 없는 것도 한 몫 했다.
그러나 발칸은 그 지형 자체로 교통이 불편했고, 양측 모두가 수십만 대군을 투입해서 밀고 당기는 전투를 해 봤자 전선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고 사상자만 수만 명씩 발생할 따름이었다.
문자 그대로 누가 보면 참호전이라도 벌이냐고 할 만한 모든 전선에서의 교착, 심지어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팽팽한 접전이 벌어진 상태에서, 점령지 변화가 큰 곳은 드물었다.
“이스라엘군이 계속해서 인도를 짓밟고 다니고 있고, 프랑스군은 잉글랜드와 웨일스 방면의 잔존 영국 저항세력을 소탕하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아직 버티고 있지만, 시간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