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정치적 이유(2)
1917년 4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타타타타타타타타타!
“기관총좌! 기관총좌 제압해!”
미친 듯이 포탄이 쏟아진다.
미 해군 전함들이 탈린 방면에서 적 해군을 붙드는 동안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남독일 사단이 상륙을 시작했다.
문제는, 미 해군이 전함 세 척 대 전함 세 척의 대결을 벌였다가 그야말로 참패를 당한 것이었다.
한 차례 포격전이 벌어진 뒤 러시아 제국의 항공전함들이 후퇴하면서 일방적으로 공습을 퍼부었다.
수십 기가 교대로 날려대는 사방팔방에서 날아드는 어뢰를 다 피할 수는 없었고, 포격전으로 인해 대공포들은 죄다 작살난 뒤인지라 꼼짝 못하고 공습을 두들겨맞던 전함들은 거의 폐선 꼴이 되어 바다 위를 표류했고, 전함들은 큰 손상을 입어 꼼짝 못하는 미 해군 전함들을 하나씩 확인사살했다.
물론 초장의 포격전에서 미끼가 된 블라디보스토크가 유폭해서 격침당했지만, 주포 구경도, 배수량도, 포문 수도 더 많은 전함 셋을 아무것도 못 하고 날려먹은 건 그야말로 개망신 중의 개망신이었다.
프랑스 해군이었다면 대규모 항공대를 출격시켜서 함대의 상공을 엄호하고 어설픈 항공전함의 함재기들을 모조리 불덩이로 만들어줬겠지만, 미 해군이 적의 항공공격을 귀찮아하는 수준으로 경시한 대가는 피로 치러야 했다.
이렇게 되자 질겁한 미 해군은 전함들을 모조리 손상된 전함 두 척이 입항했다는 팔디스키로 보냈다.
그 결과, 변변한 포격 지원을 못 받은 채 해안에 내버려진 육군과 해병대는 그야말로 피로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단지 해안에 닿는 데에만 선두 병력의 절반이 몰살당한 것이었다.
-콰콰쾅!
아일랜드 해군의 경순양함이 194mm 포를 일제히 퍼부었고, 자욱한 먼지가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기관총좌는 줄기차게 탄환을 퍼붓고 있었다.
“아돌프 상병! 지금 포격 날아오는 거 보이지! 지금 우리 병력 절반은 저 포격과 기관총에 날아가고 있어! 지금 우리 병사들이 러시아군 방어 진지의 좌표를 땄으니까 저 경순양함에 좌표를 보내!”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이런 씨발......”
장교 한 명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아일랜드군 경순양함이 빠르게 해저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그들 눈앞의 요새에서 쏘아진 520mm 포탄 한 발이 경순양함을 명중시킨 것이었다.
“제기랄, 저 요새를 무너트려야 하는데! 전함들은 다 어디서 뭐 하는 거야!”
“우리 전함 세 척이 적 전함 한 척이랑 사이좋게 가라앉은 뒤로 적 전함 잡으러 갔다잖아! 망할 개구리 놈들이 배를 그놈들에게 팔아서!”
“빌어먹을! 포격이다!”
***
미 해군 전함 콜로라도급 USS 캔자스.
적 전함 두 척을 팔디스키 북서쪽 약 30km 지점에서 포착해 모조리 수장시켰지만, 미 해군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동료함 세 척이 모조리 탈린에서 수장되었다. 생존자 여부도 파악하지 못했고, 미군은 전멸을 각오한 전우들이 보낸 마지막 수상기가 함대에 도착한 뒤에야 사태를 파악했다.
밤을 새워 가면서 전속력으로 달려와 보인 전선의 상태도 과히 좋지 않아 보였다.
“함장님!”
캔자스의 함장, 윌리엄 리히(William Daniel Leahy) 대령은 부장을 돌아보았다.
“기함에서 입전, 모든 해안포와 아군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표적, 그리고 지상에 있는 모든 적대 표적에 대한 공격을 허가한답니다.”
“사격 개시해. 목표는 적 요새다.”
캔자스의 주포, 18인치 3연장포 1문과 연장포 5문이 일제히 불을 뿜어냈다.
-콰콰콰콰앙!
18인치 포탄의 위력은 재앙 그 자체였다.
순식간에 요새의 피격된 지점 일부가 붕괴했다.
그러나 요새의 전체 기능에는 지장이 없었고, 즉시 반격탄이 날아왔따. 적의 19인치 포탄은 사거리도, 화력도, 명중률도 우위에 있었다.
거기에 520mm와 430mm 열차포 역시 열심히 미 해군을 향해 불을 뿜었고, 명중탄이 발생했다.
-콰앙!
“피격당했습니다!”
520mm, 인치로 따지면 20인치가 넘는 거포다. 430mm 열차포 역시 인치로 변환하면 약 17인치, 회전이 불가능해서 사실상 들어오는 대로 사거리만 조절해서 쏠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포대의 위치선정을 통해 그런 문제점을 어느 정도 보완했다.
그런 것에 피격당하면 캔자스라고 해서 무사할 수는 없다.
“피해 보고하라!”
“3번 포탑이 회전을 멈췄습니다! 4번 보일러실 파괴!”
“제기랄.”
그 순간, 세 발의 포탄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그 포탄은 캔자스 너머의 다른 함선을 겨냥했다.
한 발은 빗나가고, 두 발은 적중했다.
20인치와 19인치 철갑유탄 한 발씩이 버몬트의 장갑을 무너트리고 파고들었다.
“버몬트 피탄....... 아니.”
엄청난 폭발이 뒤흔들었다.
탄약고 유폭, 의심의 여지 없는 굉침이었다.
“함장님! 지금 변침해야 합니다! 적 화망에 제대로 걸려들었습니다!”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폭음이 울렸다.
“위스콘신 피뢰!”
물기둥이 위스콘신에서 솟아올랐다.
“여긴 기뢰원입니다!”
“분명 소해를 했다고 들었는데!”
“놈들이 야음을 틈타 다시 설치하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당장......”
순간, 두 번째 폭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충격이 그들을 강타했다.
“피뢰!”
“피해! 피해를 보고해!”
“격벽 다수가 붕괴했고, 대량의 물이 쏟아져들어오고 있습니다! 갑판 하부 상황이 불명확합니다!”
“미시간에서 통신! 본함을 예인하겠답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해! 기뢰가 어디 있는지 모른......”
-콰앙!
“미시간 피탄!”
“제기랄, 움직이면 안 되는데!”
“함장님, 어떻게 해야.....”
“함수가 피탄되었습니다!”
“.......... 퇴함한다! 미시간에게는 뒤로 물러나라고 해! 빌어먹을 놈들.”
이틀이라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 이틀간 적들은 아직 제압되지 않은 해안포를 복구하고 증원을 불렀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후회해 봤자 늦었다.
‘차라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로 가지 않고 탈린에서 전투를 벌이고 갔으면 훨씬 유리했을 텐데.’
그랬으면 재수없게 한두 척이 격침되었더라도 적이 대비하기 전에 들이쳤을 것이다. 그랬으면 어쩌면 상트페테르부르크 하나쯤은 떨어트렸을지도 몰랐다.
물론 착각이었다. 이미 러시아군은 미 해군의 움직임을 파악했고, 수송선들이 내릴 보병들은 해안 방어선으로도 충분히 저지할 수 있다 판단한 후 미 해군의 주력함들을 노리기 위해 대구경 해안포에 한해 사격금지 명령을 내려두었다.
덕분에 상황을 오판한 미군은 해안포대와 기뢰원에 제대로 물린 상태였다.
***
“제기랄.”
아돌프 상병은 허탈한 눈빛으로 바위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 있던 프로이센군 진지는 포격으로 사라져 있었다. 자신이 전달해야 했던 통지문은 이미 받을 상대도 없었다.
그때, 고함소리가 들렸다.
“우라! 우라!”
“이런 젠장!”
구덩이 속으로 몸을 피한 아돌프는 권총을 들었다.
일단 지휘부로 돌아가야 했다. 그 다음은...... 거기서 알게 되겠지.
-탕! 탕탕!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고, 총류탄이 날아가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달리고, 총을 쏘고, 엎드리고.
죽을 힘을 다해 사선을 몇 번이나 넘어 가면서 지휘부에 도달했을 때는 교전은 이미 소강 상태로 들어가 있었다.
그때, 한 독일군 병사가 그를 향해 발포했다.
-타앙!
“빌어먹을! 아군이야!”
“압니다!”
급히 뒤를 돌아보자 러시아 병사 한 명이 목이 꿰뚫린 채 즉사한 것을 본 아돌프는 한숨을 쉬었다.
“고맙다는 말은 됐습니다.”
앳된 얼굴의 소위는 소총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대위님.”
“솜씨 좋군, 소위. 상황이 바뀌었네, 통신망은 계속 끊기는 판이고, 일단 한 번 더 공세를 가해 보겠으니 포격 지원을 해 달라고 후방에 전달하도록.”
“미국 놈들은 아무리 봐도 싸울 능력이 없습니다, 차라리 프랑스놈들이 훨씬 낫겠군요.”
“프랑스 놈들은 여기 없지, 쇠르너 대위의 중대와도 전화선이 절단됐어, 일단 그쪽으로도 전령을 한 명 보내서 돌격 시점을 맞추기로 했네만, 자네 역할이 중요해, 후방으로 가서 포병지원을 요청하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최대한 많은 화력을 우리 앞으로 집중해주게. 양키 전함들은 기뢰밭에 잘못 들어가서 두들겨맞다가 모조리 수장되었지만 순양함급은 남아 있으니까.”
“앞이면....”
“요새를 쏘는 게 아니네, 200mm 정도의 구경으로는 저거에 흠집도 못 내, 요새 주변의 방어선만 청소하고, 요새 내부로는 우리 병력이 직접 진입해서 싸워야 하네. 가스탄도 넉넉하게 뿌리라고 하고.”
그렇게 말하며 에르빈 롬멜 대위는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우리도 역시 더 전차에 투자했어야 했어.”
프랑스군의 ‘판터’ 수준의 전차는 기대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전차의 수량도 적고 있는 수량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전차 수송과 상륙이 어렵다면 상륙시킬 방법을 찾아내야지 조금만 가져온다를 결론으로 채택한 무능한 작자들 같으니.
그나마도 그 수송선이 포탄에 맞아 침몰하면서 지금 상륙군 전체에는 전차가 없었다. 몇 대는 기적적으로 상륙했지만, 죄다 격파당했다.
덕분에 문자 그대로 보병의 피와 살을 동원해 적의 방어선을 분쇄해야 할 판이었다.
***
중순양함 알래스카, 상륙 지휘함.
존 조지프 퍼싱은 이를 악물었다.
해로가 막혔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아직 열려는 있지만, 저 빌어쳐먹을 해안포 사격과 야밤에 기어나와 기뢰를 부설하고 도망가는 놈들 때문에 막힌 거나 다름없다.
해안포 제압 실패가 이렇게 돌아왔다.
전함 한 척이 해안포 사격에 당했고, 전함 한 척은 기뢰에 맞아 격침되었으며, 다른 두 척은 한 척이 기뢰에 맞은 걸 예인하려다가 다른 기뢰에 또 피격당하고, 발이 묶인 상태에서 포격을 계속 얻어맞다가 수중 어뢰발사대의 어뢰 두 발을 얻어맞고 예인을 시도하던 함선이 침몰했으며, 다른 한 척은 무인 상태로 해류에 떠내려가다가 침몰해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적 요새에서는 초대구경 박격포를 쏴대고 있었다. 그 박격포에 재수없게 피격된 수송선 한 척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났다.
지금 퍼싱 장군이 내리지도 못하고 함선에서 지휘하는 것도 그 영향이었다. 해안에서는 도무지 안전을 확보하는 게 불가능해서였다.
그리고, 퍼싱은 안 될 일에 목을 멜 수는 없었다.
책임을 질 땐 지더라도, 미국의 몇 안 되는 정예병력을 이곳에서 다 죽일 수는 없었다.
“..... 전 부대에 알리게.”
퍼싱은 자신의 입술이 이렇게 무거운 줄은 처음 알았다.
“전면 후퇴, 모든 장비는 파기하고, 몸이라도 빼내야 한다. 전 함대는 이 일대 전역에 대해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고, 그동안 수송선에 병력을 태운다.”
“하지만 장군님.”
“명령이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내가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