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110화 (110/200)

110화 칼레, 트라팔가르 (3)

북독일 연방, 베를린, 프로이센 참모본부.

세계 어디를 가든, 다른 이들이 일해도 놀게 되는 사람은 있다.

집에 몇 달째 귀가하지 못한 이들이 수두룩한 프로이센 참모본부도 딱히 다르지는 않다.

“벨라루스 방면으로 진격하는 6군의 보급이......”

“3군이 발트 인근에서 강력한 저항에 맞닥트렸습니다. 병력비가 거의 4대 1이랍니다. 언제나처럼 훈련도는 바닥입니다만.”

“남독일 1군이 연료 보급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2주일분 밑으로 재고량이 떨어졌답니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한 남자는 제 사무실에 들어앉아서 지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루덴도로프 장군.”

“...... 한직으로 쫓겨난 퇴물에게 무슨 용건이십니까.”

“누가 자네더러 퇴물이라고 하나? 그때 ‘그’ 일만 아니었으면 자네는 참모장쯤은 했을 걸세.”

“후회는 안 합니다.”

“.......... 기대한 답은 아니었네만.”

“장군님, 1892년의 전장을 보셨습니까.”

“그땐 난 참모본부에 있었지, 전선을 볼 일은 없었네.”

“전 봤습니다. 전장 한가운데에 있었죠, 저 빼고 다 죽었습니다. 다른 장교들도, 부하들도, 제가 산 건.... 문자 그대로 행운, 그리고 제 부하의 시체 덕분이었습니다. 시체가 파편을 막아줬죠.”

“.........”

“전 지옥을 보았습니다. 시체 위에 시체가 쌓여 수십만이 되고, 그 시체에 파리와 쥐떼, 까마귀들이 몰려드는 걸, 일방적인 도살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눈알이 까마귀에 파먹히는 걸 보았습니다.”

노인은 묵묵히 루덴도로프의 한탄을 들었다.

“전, 결코 전쟁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이건 방어전쟁이네.”

“그렇다면 우리 군이 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발트 연안과 캅카스에 있습니까.”

“루벤도로프.”

마켄젠은 나직이 말했다.

“난 죽어, 자네도 나보다는 늦겠지만 결국 죽겠지, 우리는 영생불사하지 않으니, 우리의 복 받은 후손들은 우리의 고통을 겪지 않고, 우리의 이야기를 역사로 읽겠지.”

“그러나 그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승자의 특권이네. 그렇기에 승리한 쪽의 진실이 역사가 되고, 나머지는 묻히게 되지, 자네가 원하는 것은 이 모든 피의 의미지? 그 의미는 승리할 때 주어지네, 패배하면? 개죽음이지.”

“지난 전쟁은 결국 개죽음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그렇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지금까지 죽은 이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만들 수 있고, 그들의 삶과 죽음 모두에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네.”

마켄젠은 냉엄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가 원하던 핑계 아닌가?”

“..... 핑계라고 하셨습니까?”

“그럼 핑계가 아니라고 하려고 했던가, 루덴도로프? 자네가 전쟁을 반대한 핑계, 자네가 전선에 복귀할 핑계, 결국 다른 이유가 아닌 자네 자신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고, 그걸 우리는 핑계라고 하지, 그토록 전쟁이 하고 싶지 않았더라면 제대를 했어야지, 제대도 하지 않고, 승진도 했으면서, 장성이 된 뒤에야 전쟁을 반대한다? 하.”

“............”

“자네는 그냥 자네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몰랐던 얼간이에 불과해, 더 우스운 건 그런 자네의 힘을 필요로 하는 우리지만.”

“...... 뭘 해야 합니까.”

“발칸 전선에 빨려들어간 병력은 100만이 넘어갈 기세고, 캅카스, 발트,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생각하면 2천만을 징집해도 모자랄 정도지, 전선이 한없이 늘어지고 있는데 프랑스인들은 영국을 핑계로 병력을 빼냈네, 저들은 스칸다나비아 전선도 사실상 혼자 감당하고 있다지만 그쪽 전선은 조만간 끝날 텐데 말이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 하나에만 집중하기도 어려운 판이고.”

“그래서, 시키실 일은?”

“6군의 참모장 자리가 비었네, 건강 악화로 이전 참모장이 귀국해야 했거든, 관심 있나?”

“6군이면 분명......”

“벨라루스 전선, 그리고 높은 확률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진공을 담당할 부대네. 발칸에 배치된 부대들이 다들 리가와 탈린에서 소모가 심해서 말이지.”

마켄젠은 그의 어께를 두드렸다.

“자네도 이제 공적 좀 세워야지.”

***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로 진공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소.”

소태 씹은 표정의 퍼싱 장군과 그 외 장성들 앞에서 베이커 장관이 입을 열었다.

“국민들은 더 큰 승리를 원하오, 하지만 우리 해군은 피해만 컸지, 결국 전투 내내 들러리였잖소?”

“예, 어느 함선이 통제에 안 따르고 마음대로 움직이다가 기뢰를 건드려서 굉침하지만 않았으면 미군은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을 겁니다.”

프랑스인 특유의 직설화법이 거북했는지 베이커 장관이 헛기침을 했다.

“D.C.에서는 여전히 반대 운동이 심하오, 어느 의원은 아예 공개적으로 이미 결정된 선전포고를 비난하는 연설까지 했지. 그리고 그 의원은 인기몰이를 하고 있소.”

“지넷 P. 랜킨 의원 아닙니까?”

“맞소, 대서양 건너에도 알려졌구려.”

원 역사에서는 1차대전 때 전쟁을 반대해 인기를 끌어 상원으로 진출했으나, 2차대전 당시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하는 걸 의회 전체에서 혼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가 분노한 시민들에게 조리돌림당해 맞아 죽을뻔하고, 매일같이 협박편지와 협박전화가 날아오는가 하면 가족들에 대한 신변위협에 지인과 친인척들이 줄줄이 의절과 절연을 통보했으며 바로 다음 선거에서부터 의원 후보로 나서지 못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한국전과 베트남 전쟁 때에도 모든 전쟁을 반대한다며 반전 운동을 하긴 했지만 정치생명은 이미 끊어진 뒤였다.

그 모든 일은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지만, 본인의 성향은 변하지 않았다. 그럴 계기도 없었지만.

“저희 프랑스인들은 그런 작자를 이렇게 부릅니다, ‘조국을 위해 피흘리기를 거부하는 위선자이며 비겁자.’ 잘못된 평화보다는 옳은 전쟁을 하는 게 옳죠, 그 여자는 멕시코나 캐나다가 미국의 주 하나를 갈라달라고 요구하면 전쟁하기 싫으니 주자고 할 거랍니까? 저희 국민의회 의원이었으면 목구멍을 역류해 나올 수 있다고 해서 다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줬을 텐데. 쯧.”

“이 동네에는 의원에 대한 면책특권이 없소?”

“의회가 박탈하지 않는 한 있긴 합니다, 하지만 면책특권이고 뭐고 정의감 있는 시민들이 연단에서 끌어내려 두들겨패는 데에 면책특권을 운운할 것까지 있습니까? 그러다 맞아 죽어도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제 혓바닥으로 화를 불러왔으니 운명이겠거니 해야죠.”

물론 열강 중 민족주의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라에서 그런 ‘비애국적인’ 언사를 대놓고 할 배짱이 있는 의원이 나올 리도 없고, 그 정도로 분위기 파악을 못 하면 애초에 의회에 입성조차 불가능하긴 하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뭔가 보여줘야 하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각하, 우리 군은 아직 훈련이 부족합니다.”

퍼싱 장군이 소태 씹은 표정을 풀고 반박에 나섰다.

“패터슨 소총은 아직 육군 전투부대에도 전부 들려주기 어려워서 구식 스프링필드 소총과 심지어 해안경비대용 트럼본 소총까지 최전선에서 대여해 쓰는 판입니다. 루이스 기관총도, 야포도, 모두 부족합니다.”

“카빈 소총을 공급해 달라고 하시면 예비군용 무기고와 치장물자에서 2주일 내로 대량으로 공급해드릴 수 있습니다. 생산라인도 아직 살아 있으니 시간만 주시면 추가 공급이 가능합니다만.”

“듣지 않았나? 프랑스군이 친절하게도 야포와 소총, 기관총을 팔아주겠다고 했고, 우리 수송선들도 애쓰게 물자를 실어나르고 있네.”

“미군의 단독공세 계획은 문자 그대로 미친 짓입니다. 빌어먹을, 본토에서는 대체 무슨 훈련을 시킨 겁니까? 훈련병이 총도 쏠 줄 모....”

“크흠, 퍼싱 장군, 타국의 인사들이 앞에 있는 곳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발언 같군.”

애써 눌러 참는 표정이 가득했지만, 퍼싱은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백악관도, 의회도 전쟁부에 한 목소리로 요구했소, 프랑스의 보조부대가 아니라, 독자적인 전선을 펴게 해달라고 말이오, 우리 해병대는 두 번이나 상륙전을 경험해봤으니 능력도 검증되지 않았소? 심지어 그 두 곳이 지브롤터와 영국 본토이니 자격은 충분하겠지.”

“상륙전? 상륙작전을 생각 중이십니까?”

“그렇소.”

“그럴 장소가 어딨습니까? 발트 해 방면은 거의 다 점령되었고, 북극해 인근은 가 봤자 전략 목표도 없습니다. 있어야 무르만스크 정도겠군요, 이미 교두보를 확보한 영국에 더 상륙하실 것 같지는 않고, 인도는 이스라엘이 알아서 할 겁니다. 그 외 식민지는 귀국의 의도에 부합할 만한 상륙지점을 제공해드리지 못할 것 같군요, 혹시 발칸이나 아나톨리아, 이탈리아에서 상륙을 감행하실 생각입니까?”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결사적으로 거부하더군, 그리고 발칸과 아나톨리아를 건드리면 감수해야 하는 전선의 넓이도 너무 넓고, 저 게르만인들의 반발도 감당하기 어렵소.”

“제길, 본관은 군인이라 답답한 건 못 참는 성격이오, 그러니 그냥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시오, 대체 어딜 노리는 거요?”

“.... 단 한 번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장소요.”

“그러니까 그게 어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잠깐 회의실이 침묵에 휩싸였다.

“저기, 장관님, 혹시.......”

미치셨습니까?

자리에 앉아 있던 참석자들 모두의 시선이 그렇게 말했지만, 베이커 장관은 말을 이었다.

“내가 군무에는 능하지 못하지만, 일단 수도를 점령하면 반은 승리한다는 건 알고 있소, 저 동방의 미개국뿐 아니라 상당한 강국들조차, 심지어 저 청조차도 수도를 공격당하니 단숨에 무너져내렸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탈리아 왕국도 로마를 잃은 뒤에는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했소.”

“그것과는 이야기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방어선은 그렇게 만만하지도 않으며, 프랑스군의 입장은 그러한 위험한 공세에 귀중한 전함을 차출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트라팔가와 칼레에서는......”

“그건 전혀 달랐습니다. 한 곳은 최중요 요충지의 점령을 위해 피해를 각오하고 투입한 것이며, 그 규모상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은 적의 본토였고요.”

“우리가 가는 것도 적의 본토고, 현실적으로 매우 위험하다지만 성공만 하면 굉장한 전략적 이득을 가져다줄 전략적 요충지요, 프로이센군 공세가 돈좌했다고 들었소만.”

“사상자도 많고, 기후 탓에 도무지 공세를 할 수가 없다더군요. 그런 문제가 큰 발트 연안에서는 전력이 집중되는 파람에 피해도 크고.”

라스푸티차.

최악의 뻘밭에 또 걸린 독일군이었지만, 대책 없는 건 그때든 지금이든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우리 미합중국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거나, 그럴 기미만 보여도 발트 연안의 프로이센군이 받아내는 압력은 훨씬 줄어들 테고, 유사시에는 서로가 망치와 모루가 되어 러시아군을 분쇄할 수도 있지 않겠소?”

“우선, 발트해에는 그만한 수송선이 없습니다. 수송선을 대규모로 동원한다면 대서양에서 구하셔야 할 텐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요?”

“블라디보스토크,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이 세 척의 전함이 스코틀랜드에 정박해 있습니다. 상륙작전을 시도한다면 결국 전함을 동원해야 할 텐데, 전함과 수송선이 다수 움직이는 걸 저들이 장님이 아닌 이상 모를 리 없다는 것, 즉 이들과 다시 한번 교전을 벌여야 합니다.”

“미 해군이 상대할 거요.”

“그 다음 상륙도 문제고 말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상륙은 불가능하며, 시도한다 한들 지원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