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칼레, 트라팔가르 (2)
1917년 2월, 연합함대는 신세를 지고 있던 지브롤터를 떠났다.
어차피 희망봉에 아직 도달하지도 못했을 전함 3척이 영국 본토에 도달하기 전에 결전을 벌이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3월 2일, 파리에 프랑스군과 미 해병대 병력이 브르타뉴에서 탑승 상태로 대기하고 있으며 항공대의 재배치 등도 완료되었다는 보고가 전해진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는 황제 대리로 상륙작전을 승인하고, 최종 결정권은 페르디낭 포슈 장군에게 위임되었다.
포슈는 여러 정찰정보를 종합한 결과, 다음 날 상륙작전을 개시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대망의 3월 3일이 밝았다.
***
“우욱......”
“등신아, 너 토하면 뒤질 줄 알아!”
뱃멀미를 우려한 프랑스군은 전날은 사기를 높이기 위해 호화로운 만찬을 제공했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상륙을 성공하면 주겠다며 고당도의 사탕과 초콜릿만 소량 배급했다.
문제는 이 방침을 미리 전달받은 장교들이었다. 뱃멀미를 경험해보지 않은 초임 장교들 중 일부가 상부의 방침에 불만을 품고 자신들끼 사비를 각출해 식사를 하고 왔고, 상부의 일방적인 지시를 납득하지 못했던 영관급 장교들 중 일부가 이를 또 묵인했다.
물론 소수이긴 했지만, 뱃멀미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장교들이 한 다발 나오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우웨엑!”
그리고 구토는 전염성이 있다.
한 놈이 토하기 시작하자 다른 놈들도 토하기 시작했다.
먹은 게 없는 자들은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프랑수아 드 라 로크 중위는 안타깝게도 그 운 좋은 다수에 속하지 못했다.
자신의 멍청함을 저주하면서 구역질을 하는 그를 곁에서 드사티니 대위가 정신이 절로 빠져나갈 정도로 갈구기 시작했다.
“이 등신새꺄, 쳐먹지 말라고 했으면 말을 들어야 할 거 아냐! 너 한 방울이라도 토하면 이 자리에서 널 바다에 던져버리겠어, 알았냐?”
“우욱.....”
“알았냐고!”
“대위님, 그만하십시오, 라 로크 중위가 경험이 모자라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등신아, 너 나한테 걸려서 못 먹은 거잖아.”
“그래도 안 먹었으면 안 먹은 거 아닙니까. 결과만 좋으면 됐죠.”
“달라디에 네놈은 나중에 정치인이나 해라, 아주 그냥 능글맞은 게.....”
“60초 전!”
-콰아앙!
“뭐야?”
“해안포 사격이다! 항공대랑 물개 이 등신새끼들!”
둘이 들으면 억울할 소리였다.
-쿠우웅!
좀 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그들의 눈에 그대로 두 동강나 바닷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순양함이 보였다.
“뭐에요! 뭡니까? 기뢰?”
“아냐.... 씨발! 라이미 놈들 전함이다!”
수송선 탑승자들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파도를 가르며 나타난 거대한 바다 위의 강철 거성에서는 전설 속 용이 불을 뿜기라도 하는 듯 거대한 화염을 뿜어내었다.
그리고 수많은 물기둥이 생겼다.
거기에 화답하듯, 또 다른 거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브르타뉴....”
브르타뉴급 전함 노르망디가 엄청난 불꽃과 화염을 토해냈다.
***
브르타뉴급 전함 노르망디의 함장 에밀 뮈즐리에는 악을 써 대면서 명령을 내렸다.
“빌어먹을, 항공대 놈들은 뭘 한 거야! 어떻게 경보도 없이.....”
“제독님! 적함 발포! 우리가 표적입니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우리가 맞아주면서 싸운다! 수송선들이 맞으면 전우들이 죽고 작전도 실패다! 수송선에서 떨어지면서 계속 쏴!”
“적 항공기 다수 접근 중! 대공사격합니다!”
“포술장! 3탄 이내 협차!”
“함장님! 부르고뉴에서 통신입니다!”
“바꿔!”
-뮈즐리에, 지금........
“다를랑! 이 등신아! 지금 어디서 뭉개고 자빠져 있냐!”
사관학교 동기의 폭언에 통신 상대인 프랑수아 다를랑 대령은 잠깐 얼이 빠진 듯 했다.
“수송선단이 공격당하고 있잖아! 당장 이리 튀어와!”
-이쪽도 공격당하고 있네만.
“뭐?”
-적 전함 다수가 출진했네, 이쪽에만 전함이 6척이야, 아무래도 지원은 어렵겠네.
“그래서 어쩌라고! 니들은 8척이잖아!”
-그 8척 중 6척이 쥐뿔도 도움이 안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놈들이라서 문제네, 그리고 지금 한 척이 당했네. 빌어먹을, 놈들 사격 속도가 보통이 아니야. 왕립해군이 허명이 아니란 말인가.
“태평한 소리 집어치워! 그럼 본함 혼자 막으란 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집어치워, 우리 혼자 막는다.”
좀 무리를 하면 전부 잡아내지 못할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진 뮈즐리에 대령은 명령을 내렸다.
“적 넬슨급에 화력을 집중해! 수부터 줄인다!”
넬슨급은 느리고, 화력도 약하다. 반면 킹 조지 7세급은 위험하다. 브르타뉴급은 기껏해야 14인치 정도의 대응방어만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약함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수송선에게는 차고 넘치는 살의였다.
둘 다 위험하다면,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쪽부터 잡아내어 한 척에 시선이 끌린 동안 다른 전함이 수송선을 공격하는 일을 막아야 했다.
“제독님! 포격입니다!”
“알고 있네!”
물론,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동시에 솟아오르는 물기둥의 수는 복수의 해안포가 이 전함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두 문의 해안포가 포격으로 운 좋게 파괴되었지만, 본토가 한 번 공격당한 뒤로 영국은 함선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방어체계를 배치했다.
다르게 말해,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뚫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희생의 대부분은 전함들이 치르고 있었다.
“어뢰 접근 중!”
“제기랄, 여기 잠수함이 있나?”
물론 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적함 발포합니다!”
“젠장, 좌현 최고속도로, 우현 최대 속도 역추진! 선수를 어뢰 진행방향으로! 조타장! 타륜 내놓게!”
“예! 함장님 조타!”
잠시 뒤, 물기둥 네 개가 함선 주변에서 솟아올랐다.
영국 해군의 거포가 또 다시 수면을 때린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통신망에서는 비명이 울렸다. 벌써 아군 전함 다수를 잃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전력에 별반 도움이 안 되는 구형함이었지만, 조금 전 들려온 소식으로 그 말도 수정해야 할 듯 했다.
미 해군의 컬럼비아급 전함이 기뢰에 피격, 침수를 걷잡을 수 없어 퇴함 명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그것이었다.
‘북독일 연방 함대 전멸, 오스트리아 해군은 절반밖에 안 남았고, 미 해군은 1척 상실인가.’
다행히 아직 프랑스 해군의 피해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적 넬슨급에서 화염 관측! 유폭했습니다!”
이로써 격침 스코어는 7대 6이 되었다. 아무리 수에서 우수하다지만 시간에 쫓기고, 상대가 펴놓은 전장 안으로 직접 걸어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입장에서는 굉장한 선방이었다.
“이대로 가면 오늘 하루만 포세이돈이 전함 20척은 가볍게 공양받겠군. 적 킹 에드워드 7세급에 화력을 집중해!”
“예!”
남은 적 전함은 셋.
그러나 전함을 잡는다고 끝나는 게 절대 아니다.
도대체 몇 인치인지 계산하기도 싫어질 정도로 굵은 물기둥을 남기는 저 망할 해안포.
저거에 당하면 브레스트급이고 나발이고 단숨에 허리가 꺾여 격침되리라.
“라이미 놈들, 괴물을 만들었어.....”
저게 다른 쪽 해안에도 있을까? 육안에는 안 보이지만, 그렇다면 격침 보고가 들어온 함선들 가운데에는 저거에 당한 것도 최소 한둘은 있으리라.
‘저 포화에 정면으로 대응할 만한 건 컬럼비아급밖에 없는데, 그 등신같은 놈이 기뢰에 당했다.’
그러면 어째야 하는가, 저 해안포의 명중률이 낮기를 기도하면서 어떻게든 제압해야지.
저런 물건이 있다는 것도 몰랐던 정보부 놈들을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교전은 계속해야 했다.
“적 킹 에드워드 7세급 불꽃을 보이며 무력화!”
이걸로 기어들어온 불청객들은 다 처리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을까.
-적이 구경 미상의 초대구경 포를 쏘고 있다! 빌어먹을! 부르고뉴가 일격에 당했다!“
-적 포는 적어도 3문 이상이다! 절대 정면대결하지 말고 회피하라!”
-후방에 적 전함 2척! 베네치아가 당했다!
-여기는 동레미, 본함이 맡겠다.
-혼자서는 무리다! 가스코뉴는 즉시 동레미를 엄호해!
-동레미 피격! 빌어먹을, 함교가 완전히 날아갔어!
-장 바르가 적 해안포에 맞았다, 침몰한다!
-적 전함에 명중탄 발생! 가스코뉴 교전 속행한다!
-해도에 없는 기뢰원이다! 망할! 이런 게 있단 소린 없었잖아! 시칠리아와 롬바르디아가 당했다!
-피격당했다! 주요 구획에 A급 화재!
-어뢰가 접근한다! 제기랄, 왜 잠수함을 파악 못한 거야! 늦었다! 너무 가까.....
-리슐리외가 맞았다! 안 돼!
-잠수함 아냐! 잠수함 아니다! 수중 어뢰발사관이다! 반복한다! 전 함대 수중 어뢰발사관에 유의하라! 정보에 없는 무기체계다!
아직 지옥은 끝나지 않았다.
이날, 단 하루 동안 양측 합쳐 총 25척의 전함이 침몰했다.
그 이전의 어떤 해전도 이토록 많은 주력함을 단 하루만에 수장시키지는 못했다.
프랑스와 미 해병대는 브리튼의 대방벽을 피와 강철을 무수히 쏟아낸 끝에 돌파했고, 영국 해군은 패퇴했다.
아니, 전멸했다.
살아돌아간 전함은 단 한 척도 없었고, 순양함과 구축함들도 살아돌아간 함선은 거의 없었다.
이 전쟁에 한에서는 트라팔가르에 이은 두 번째 재앙이었고, 바이킹의 시대 이후 두 번째의 본토 침공이었다.
***
라 로크는 전사자들의 시신을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전우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었다.
“의무병! 의무병!”
“죽었습니다. 의미없어요.”
“여기 생존자가......”
“.... 모르핀이나 놔줘, 이 녀석은 틀렸다.”
포탄 구덩이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파였고, 주인 없는 팔다리가 곳곳을 굴러다녔다.
너무 늦어버린 전우들의 고통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약물을 투여하는 의무병들, 온몸에 화상을 입은 전차병들.
의무병들의 군복은 피에 젖은 채 말라붙어 온통 검붉었다.
“정신 드냐?”
“..... 대위님.”
“우리 군이 해안을 벗어났다, 적 병력이 전방에 수십만이지만 일단 후속 부대가 교대할 거야, 놈들이 참호를 파고 버티기 시작했다는군.”
“...........”
“재편성 전에는 안 움직일 거다. 쉬어둬라.”
“다 죽었습니다.”
“..........”
“제 소대원들, 둘만 살았습니다.”
“D중대는 생존자가 이등병 둘뿐이고 다 죽었다. 우리 중대도 너랑 나 포함해서 산 놈이 여섯이고. 네 잘못이 아니다. 그냥 라이미 놈들이 지랄맞게 두터운 방어선을 설치해놔서 그런 것 뿐이야,”
“제가 어리버리하게 굴었습니다. 좀 더 빨리 움직였으면, 지시를 더 빨리 내렸으면 소대원 중에 대여섯 명은 더 살릴 수 있었는데.”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 생각하지 않는 사람 없다.”
선두에 선 사단 가운데 재편성이 필요하지 않은 사단이 없었다. 병력의 3할을 잃어 전멸판정이 난 사단이 둘, 1할에서 2할을 잃고 작전 속행 불가능 판정이 난 사단이 넷, 사상자 약 1만 2천 명.
수송선이 가라앉거나, 상륙해서 기관총과 포격에 몰살당하거나. 도합해서 1개 사단의 전체 병력을 넘어가는 병력이 하루 만에 손실되었다.
물론 이 해안에서만 전투가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분할된 작전구역만 해도 12곳이었고, 이곳은 그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 해안 전부에서 똑같은 지옥도가 펼쳐졌다면 상륙 자체가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녹아버린 병력이 전체 사상자의 절반 이상이었으니까.
“바다에서 죽은 놈들과 합치면 족히 9천은 될 거다. 그러면 거의 75%가 여기에서 죽은 거야. 다른 해안으로 향하던 놈들과 부대가 뒤섞여버린 것도 문제지만...”
듣자하니 다른 해안 하나로 향하던 병력 절반이 여기로 떠밀려왔고, 사상자를 늘리는 데 일조했다.
정작 그 해안에 상륙한 반쪽짜리 부대는 백 명 미만의 사상자를 내고 임무를 달성했다고 하니 죽은 놈들만 억울하게 되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잘못이 있다면 상륙지점이 그 꼬라지라는 걸 모를 정도로 무능했거나, 아니면 그걸 알고도 병력을 밀어넣은 윗대가리들이지.”
하지만, 생기 없는 말라붙은 눈은 시체들과 붉게 물든 바다에서 떠나지를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