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칼레, 트라팔가르 (1)
이겼다. 하지만 그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아군 전함 8척이 격침, 적함 4척 침몰.
물론 원 역사의 갈리폴리보다 잘 방비된 데에 들이박아서 적 전함 4척을 격침시키고 8척밖에 격침되지 않았으면 선방한 게 맞긴 하다.
트라팔가르에서는 서로 전함들이 포격을 날려 파손시키기는 했지만, 격침된 전함 없이 지브롤터가 이미 붕괴했다는 게 확인되자 영국군이 먼저 몸을 빼는 바람에 트라팔가의 결전 같은 모양새가 나오지는 않았다.
물론 그래도 우리는 이것도 승리라고 열심히 홍보했다. 트라팔가르에서 적 전함 4척을 격침시키고 지브롤터를 막대한 희생 끝에 점령한 프랑스군! 얼마나 멋져 보이는가.
프랑스군에서는 격침된 배는 한 척도 없다는 게 주효했다. 전함 한 척이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지만 그거야 충분히 용맹했다고 띄워줄 수 있는 거고.
프로파간다에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도 적 최대의 전함과 일대일 결투 끝에 격침시켰다고 하면 싫어할 프랑스인이 있을까.
그리고, 이 모든 작전은 하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영국 본토 상륙.
***
“어이, 포슈.”
“뭔가.”
페르디낭 포슈 장군은 대놓고 인상을 구겼지만, 조프르는 씩 웃었다.
“왜 이러시나, 영국 상륙작전의 최고지휘관께서!”
“자네는 발칸 전선, 필리프는 유럽 전선이라도 맡았지, 영국을 상대로는 해군이 영광을 누리지 우리가 영광을 누릴 게 뭐가 있겠나?”
“뭐 그거야 그렇네만. 수상 각하께서 자네의 상륙을 아주 전 유럽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만들 정도로 화려하게 홍보될 테니 런던의 정복자 페르디낭 포슈의 명에는.....”
“첫 번째도 아니고 두 번째잖나. 그때보다 지금이 더 어려울 텐데 해군이 물고기밥이나 안 되었으면 좋겠군.”
한 번 당해본 영국은 해안방어에 지난 수십 년간 어마어마한 투자를 해 왔다.
영국 해군을 전멸시키더라도 상륙 자체가 어려울 거라는 관측도 나올 정도, 특히 칼레 방면의 방어는 그야말로 지브롤터보다 좀 더 윗급이라는 추측까지 나올 정도였다.
“물론 지브롤터에서의 비극은 미국의 구형전함과 자기 전함의 약점도 파악 못 한 얼간이 크라우트 놈들이 일으킨 참사지, 하지만 이번 해전도 그놈들과 같이 작전해야 하네. 내가 탄 수송선이 멀쩡할 거라는 보장도 없지.”
“자네 수송선에 타나? 전함에 안 타고?”
“수송선 하나를 해상사령부로 임시 개조한다더군, 상륙작전은 거기서 총지휘할 걸세. 전함은 전함대로 싸워야지.”
그때,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한 사람이 걸어왔다.
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 프랑스 수상이었다.
“포슈 장군, 조프르 장군.”
“수상 각하, 어쩐 일이십니까.”
“사진 한 방 찍으러 왔네, 런던의 정복자를 보도할 때 신문 1면에 보도될 사진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살짝 흥분한 듯한 클레망소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지난 1년전쟁 당시, 영국인들을 그렇게 자비롭게 대해서는 안 됐네. 이번에는 정말로 그렇게 되겠지, 영국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로 쪼개버리고......”
“크흠, 혹시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까?”
“미국에서 전함 몇 척을 더 보내주기로 했네, 그리고 우리도 브레스트급 4척을 비롯해 보유 전함을 몽땅 투입하기로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북독일 연방도 그러기로 했네, 다만 저놈들의 전함 중 상당수가 기동이 가능하다는 걸 알아냈고, 우리가 상륙할 시점에는 적 전함들 전부가 활동이 가능한 상태라고 봐야 할 거야.”
“양키들의 전함이 게임 체인저겠군요. 그냥 싸우면 이길 거라는 확신은 없습니다.”
“지난번에 전함 4척을 날려먹은 일 때문에 미국에서도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야, 게다가 이번 상륙 지점은 지브롤터 못지않은 곳이니.”
“러시아 쪽은 별 이야기 없습니까?”
“있었으면 자네들이 더 먼저 알지 않았겠나? 외교 라인으로는 별 이야기 없더군.”
***
러시아 제국, 우크라이나, 키예프, 프랑스-독일 공군기지.
“신형기라. 어이, 크라우트! 부럽나?”
“네놈을 쏴죽이고 싶을 만큼 부럽군, 개구리.”
낄낄거리면서 서로를 툭툭 친 조종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헤벌리고 프랑스군의 신형 전투기를 구경했다.
“쉬라이크(Shrike: 때까치) 전투기라.”
“무장은 기관총 2정에 기관포 2문, 필요에 따라 기관포 2문 정도 더 달 수 있고, 엔진 출력은 2천 마력, 어이, 크라우트, 너희들 쓰는 게 몇 마력이지?”
“1천 마력 정도 되던가, 그것도 예전에 쓰던 것보다는 낫지만.”
이전에는 600마력급 엔진도 좋다고 써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수준이 확 올라갔다.
원래 함재기로 개발된 것을 육항대에서도 도입한 것이니 엔진 출력이 강한 것이었지만, 최고 속도가 350km를 겨우 넘는 러시아제 전투기나 480km 내외인 영국제 전투기들을 상대하던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신기원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그들이 속도에서 밀린 적은 없었다. 독일군이 운용하는 물건만 해도 최고속도가 기록상 670km였으니까.
아직 복엽기를 쓰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논외로 쳐도 최고속도가 700km에 달하며 중무장한, 세계 최강의 전투기가 아군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희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젠장, 우리도 저런 거 어떻게 쌔빌 수 없나?”
“꿈도 꾸지 마라.”
프랑스군 최고의 에이스, 르네 퐁크 대위는 낄낄거리면서 눈앞의 독일군 조종사들을 놀렸다.
두 조종사 역시 뛰어난 조종사였다. 물론 붉은 남작보다는 못한 인물들이었지만.
“어이, 괴링, 한번 태워줄까?”
“진짜?”
“뻥이야, 태워주기 싫은 건 아니기는 한데 이거 태워주면 영창으로 안 끝날 것 같아서 말이지.”
“쓰읍.... 그건 아쉽네, 우리 공학자들은 뭐하는지 모르겠어. 이런 것도 못 만들고.”
독일군의 항공기가 빠른 건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무식한 경량화를 달성해서였다. 대신 방어력은 수직으로 폭락했고, 기총 몇 발을 맞고 기체가 불타오르고는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강력한 화력과 방어력을 가지면서도 엔진 성능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이런 속도의 전투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유일한 결점은 아직 댓수 자체가 얼마 없다는 것 정도?
그야말로 조종사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다름없는 이 전투기를 프랑스 육항대의 모든 조종사는 대량양산을 요청하고, 동맹국들은 수출을 요청하고 있었다.
아직 허가된 국가는 하나도 없었지만.
“뭐 제놈들도 비슷한 거 만들려고 하면 만들겠지, 지금도 열심히 만들고 있지 않겠냐.”
***
“스웨덴은 어땠나.”
나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총이 부족해서 냉병기로 무장한 스웨덴인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꺼지지 않는 투지. 그런 선전매체에서나 나올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전쟁터를 네 눈으로 보지 않았나, 어떻게 생각하냐.”
“..... 참혹했습니다.”
“........”
“영화나, 그런 것은 그냥 애들 장난이었습니다. 사방에 잘린 팔다리와 내장이 굴러다녔고, 죽지 못해 죽여 달라고 신음하는 이들이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샤를의 지친 목소리를 들은 나는 단답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명의 죽음은 통계다, 샤를. 그리고 희생 없는 승리는 없다는 것도.”
“........ 전 아버지처럼 될 수 없습니다.”
“될 필요도 없지.”
나는 지그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전쟁과 악명은 나의 몫이다.”
내가 죽을 때쯤이면, 상호확증파괴도 완성되겠지.
“너는 평화의 시대를 열거라.”
***
“수에즈 운하에서 첩보입니다. 세 척의 전함이 수에즈를 통과했다고 합니다. 정황상 희망봉을 통과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됐군.”
제독 이하 주력함급 함장들이 총집결한 회의장에서, 한 명의 대령이 발언했다.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영국 본토의 방어능력은 기존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지브롤터 상륙 과정에서 우리 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상군의 피해는 각오해야만 할 것입니다.”
“영국 해군은 기존의 전함들을 전부 복귀시켰습니다. 넬슨급 5척, 킹 에드워드 7세급 4척입니다. 게다가 다수의 구축함과 어뢰정, 순양함 등등, 보조함의 숫자에서는 우리 측이 압도적으로 밀립니다.”
“우리 함대는?”
“미 해군이 전함을 얼마나 차출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 해군 전함 6척,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함 8척, 독일 해군 전함 2척으로 총 16척입니다. 거기에 미 해군 전함이 얼마나 합류하느냐가 핵심이겠죠.”
수적으로는 최소한으로 쳐도 2배에 조금 못 미치는 상황이지만, 피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 거라는 정보만 아는 기뢰원들과 잠수함, 해안포, 각종 보조함들, 그리고 막대한 항공 지원까지.
“우리 중 한두 척만 살아남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이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런 피해를 각오하더라도 성공해야 한다는 거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북독일 연방 해군의 전함들은 해전에서 취약점을 노출했습니다. 너무 장갑이 얇고, 이 단점을 보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적 해안포 사격 등에 조기에 탈락하고, 미 해군 전함이 기뢰 등에 피격되어 탈락한다면 오로지 우리 힘만으로 싸워야 합니다.”
영국 해군과 정면대결을 해서 이길 자신은 있다.
“이번에는 놈들을 살려보내지 않을 겁니다. 출격하는 족족 포세이돈 곁으로 보내줄 겁니다.”
“잔 다르크급 항공모함은 아직 지중해에 있지만, 다수의 항공기들이 칼레로 재배치되었습니다. 이 항공기들을 총동원해 공중우세를 장악할 것입니다.”
“체공시간이 문제기는 한데.....”
“체공시간을 늘릴 방안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리고 적기를 확실하게 압도할 수 있는 쉬라이크 전투기들은 동부전선에 배치할 수량도 부족합니다.”
“정치적 협의에 따라, 영국 상륙부대는 우리 군과 미 해병대가 혼성으로 편성된다. 이들은 동부전선과 발칸, 이탈리아에서 실전을 겪은 최정예부대이며, 이들의 자리는 남북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메운 상태다.”
영국군 하나를 잡기 위해 항공대를 제외한 전체 지상병력이 동부전선에서 빠졌다. 이는 사령부에서 독일 혼자의 능력만으로도 캅카스까지 진격하기 모자람이 없다고 판단한 것도 있었다.
프로이센도 자신들이 동부전선, 프랑스가 서부전선을 맡는 게 나중에 논공행상할 때도 계산이 편하기에 찬성했다.
“영국군은 막대한 규모의 지상전투부대를 새롭게 편성했다. 이들의 정예도는 떨어지지만, 규모만큼은 만만히 볼 수 없다. 적들은 우리의 교두보를 일소하려고 할 것이며, 우리 역시 최단시간에 최대한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다. 즉, 파리에서는 우리의 희생을 바라고 있다.”
“주력함을 희생시켜서 시간을 사겠다는 겁니까?”
“주력함이 희생‘되더라도’ 시간을 아끼는 것이다. 전혀 달라.”
그 의미는 간단했다.
제대로 된 소해작업은 불가능하다. 사전폭격 등도 충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단시간에 도버 해협을 넘어, 빗발치는 해안포와 사방에서 기어나오는 적 뇌격부대와, 적 전함전대에 맞서 싸운다.
“지난 해전을 언론에서는 트라팔가르 해전이라고 했지, 이제는 칼레 해전이다.”
물론, 양상은 트라팔가르에 훨씬 가까울 테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륙할 시간을 번다.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