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태동(2)
프랑스 제국, 톨롱
프랑스 제국 해군의 핵심 군항이자 브레스트와 더불어 주요 조선소가 있는 이곳에는 프랑스 해군의 주력함들 다수가 정박해 있었다.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으로써 건조된 항공모함이자, 전대 잔 다르크의 함명을 계승한 항공모함 잔 다르크 역시 이곳에서 건조되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이라 하기 복잡한 이유는 퇴역하기 전, 세계 최초의 드레드노트였던 잔 다르크 역시 비행갑판을 깔아서 여러 실험을 한 적이 있고, 안티아급 항공전함도 그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 3개국의 대표단이 모여 있었다.
먼저 이 영토의 주인인 프랑스 제국, 그리고 러시아 제국과 독일 제국이었다.
러시아 대표단은 상대를 마주하자마자 일단 예의를 갖추었다. 상대가 다름아닌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2세였던 것이다.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일단 두 나라 다 군주정 국가, 타국의 군주에게 예를 갖출 줄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외교관은 없었다.
“국왕 폐하.”
“러시아 대사가 여긴 어쩐 일아오?”
“저희가 마땅히 마무리지었어야 할 일을 하러 왔습니다, 그나저나 폐하께서는 프랑스 제국의 군항에 어쩐 용무이신지 감히 여쭐 수 있겠습니까?”
“그걸 짐이 그대들에게 굳이 밝혀야 할 사안은 아닌 것 같군, 프랑스인들과 짐의 일 아닌가? 러시아가 개입할 근거는 없지.”
“........”
이 주제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낸 주제에 후안무치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발언이었지만, 그걸 굳이 지적하는 건 하책이다.
“멋진 모습이군.”
프랑스 제국의 2급함인 리옹급 전함들이 줄지어 배치되어 있었다.
4연장 4문의 함포를 단 전함, 그리고 저 멀리에서 입항하는 낭트급 전함들도.
프랑스 제국은 함대를 둘로 나누어둔 상태다. 지중해 함대와 대서양 함대.
지중해 함대에는 로렌급과 낭트급, 대서양 함대에는 툴롱급과 브레스트급이다.
리옹급 전함은 막말로 상당히 성능이 뒤떨어지는 전함이다. 16문에 달하는 주포는 위력적이지만 그래봤자 14인치다.
16인치 전함들이 줄줄이 출하되는 이 시대에는 1선급 전력이라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지중해에서는 마땅한 적수가 없는 프랑스의 안보환경 특성상 지중해 함대는 2선급 전함들이 대부분 배치되어 있다.
낭트급 전함은 15인치 4연장 주포를 앞뒤로 단 전함으로, 이 리옹급 전함들이 수적 주력이라면 지중해 함대의 질적 주력을 차지하고 있다.
거기에 브레스트급이 올해 내에 완전히 배치될 경우 기존에 있던 툴롱급들도 전부 지중해로 돌릴 예정이기에 지중해 함대의 전력은 수적인 면에서는 결코 불리하지 않다.
가상적국, 러시아를 상대로 말이다.
자명한 일이었다. 지중해에 인접한 국가 중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도나우급, 마리아 테레지아급, 산타 루치아(성녀 루치아, 나폴리의 수호성인)급 전함은 리옹급 전함에게도 고전해야 하는 상대고, 스페인은 전함이고 나발이고 건조할 처지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남은 위협은 러시아뿐인데, 러시아도 한동안 보유하고 있던 전함이 없었다.
오늘부터 있게 되겠지만.
“대금을 지불하고, 약속된 전함을 인수받겠습니다, 4척 전부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될지 안 될지 마지막 순간까지도 알 수 없었던 문제, 안티아급 전함의 판매였다.
“이제는 이름이 바뀌겠군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 바랴그로 정해졌습니다.”
물론, 이것 때문에 러시아가 얼마나 빚을 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가 대금은 금으로 결제해줄 것을 요구했기에 금으로 결제했지만, 그 금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들 4척 모두가 러시아 해군에 배치되고, 거기에 건조 중인 강구트급 4척이 진수되어 배치되면 러시아 해군은 순식간에 상당한 위협으로 떠오를 터.
물론 프랑스 제국은 진지하게 걱정하지 않았다. 강구트급은 그들의 조사 결과 영국에서 설계한 설계안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북해 연안에서의 통상파괴에 특화된 전함이었다.
심지어 장갑판 두께는 중순양함 수준인지라 작정하고 추격하면 격침은 손쉬울 터였기에 강구트급에 대해서 진지하게 걱정하는 제독은 없었지만, 진지하게 우려해야 할 것은 안티아, 아니, 이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급이 된 4척의 전함들이었다.
실제로 상트페테르부르크급을 상대할 프랑스 해군의 전함은 전부 대서양에 배치된 브레스트급 전함들뿐이었고, 이는 유사시 지중해에서 프랑스 해군은 지원을 기다리거나 2배를 넘는 머릿수의 우위만 믿고 한 등급 위의 전함에게 덤벼야 한다는 의미였다.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면 다른 수단들도 있긴 하지만, 상당 부분 요행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도 사실, 이들이 지중해 함대에 편성될 경우 브레스트급을 불러오지 않는 한 확실하게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지중해 함대에 배치될 터였다. 강구트급이 바렌츠 해에 배치되듯, 자신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 배치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어차피 16인치 전함 한둘 배치된다고 해서 전략적 판도가 뒤집힐 만큼 북해가 만만한 곳도 아니니까.
“계약대로 함재기는 별도입니다. 현재 테스트를 위해 레굴루스 시리즈 전투기들이 탑재되어 있습니다만, 출항 전에 전부 내릴 예정입니다.”
“..... 아쉽게 됐군요.”
항공기를 살 거면 따로 사라는 것. 그리고 이 시대에 함재기로 쓸 만한 항공기를 구하려면 선택지는 몇 곳 없었다.
그러나 프러관계가 악화되기 전에 체결된 이번 계약은 계약이니까 그대로 진행되었지만, 다음 거래인 함재기 판매 계약은 이런 외교적 상황에서 어찌될지 모를 일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비행기 몇 대 사는 데 국가간 관계까지 고려할 건 없었지만, 프랑스 제국은 대부분의 무기를 정부 소유의 공기업에서 생산하는 탓이었다.
더군다나 방금 언급된 레굴루스 시리즈는 프랑스 제국이 운용하는 최신형 단엽 전금속제 전투기로, 프랑스 제국의 방공을 책임지는 전투기다. 그런고로 수출 허가가 쉽게는 안 날 터였다.
그리고 함재기가 없으면 비행갑판과 격납고 등은 딱 좋은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딴에 전함은 전함이니 제 몫을 하긴 하겠지만 가성비가 안 맞을 터.
아무튼, 독일 대표단과 러시아 대표단, 프랑스 대표단 사이에서 은근한 기세 싸움이 벌어지던 그때,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뭐지?”
“알아보겠습니다.”
급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병사들이 뛰어가고, 명백히 전함들이 출항 준비를 하던 중, 프랑스 제국의 영관급 장교 하나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파리로 돌아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가 발생해서 말입니다.”
“문제라니, 전쟁이라도 일어났나?”
“제게는 발설할 권한이 없습니다.”
권한이 없다는데 뭐라 말하랴.
“상트페테르부르크급은 어디 있습니까?”
“저쪽 부두 끝에 정박해 있습니다. 4척 모두입니다. 미리 탑승해 계셔도 상관없고, 함재기들을 빼내는 작업이 끝나면 출항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거의 축객령에 가까운 요구에 툴롱을 떠나던 빌헬름 2세는 프랑스 지중해 함대의 함선들이 줄줄이 출항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부관이 경례했다.
“긴급 보고입니다.”
“무슨 일인가?”
“이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 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상대로 토스카나 공국을 주축으로 제노바 공화국, 파르마 공국, 피렌체, 밀라노, 피사, 시에나, 나폴리 공화국 등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하기는 했다. 명목상 이들은 독립국이었으니까.
하지만 반란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이유는 이들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군사권괴 외교권 등을 빼앗긴 속국 신세였기 때문이다. 속국이 종주국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을 반란이라고 해야 할지 선전포고라고 해야 할지는 애매하지만, 뭐라 표현하든 간에 그 의미는 이미 차고 넘치도록 전달되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소리군.”
그렇다면 지중해 함대가 법석을 떠는 것도 이해가 간다. 당장 자국의 일은 아니라고 해도, 프랑스는 이탈리아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별로 이해관계가 없는 북독일 연방 입장에서는 별로 알 바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실 언제든 간에, 예고된 거나 다름없는 일이기는 했다. 기껏 통일되었다가 다시 분해되어서 오스트리아 밑에 꿇어야 하는 상황을 이탈리아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이탈리아가 지역감정이 심하다지만 그 지역감정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기고 싶은 자는 단 하나도 없었고, 당연히 괴뢰국 내에서도 반발이 심각했다.
그 결과야..... 뭐 자명한 것 아니겠는가.
***
“이중제국 내각은 거의 무력화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파리의 내각회의실에서는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황태자나 그 외 몇몇 장관처럼 빠진 자리가 몇몇 있었지만, 그들을 기다려줄 여유도 딱히 없었다.
“내우외환인가.”
“일단 지금 터져나온 건 이탈리아지만, 보헤미아 지역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보헤미아는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인가?”
“일단 표면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이들에 대한 지지는 사실 자치권 확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보헤미아인들도 헝가리인 수준의 대접을 해달라 이거죠.”
“헝가리 왕국에서 반발하겠군.”
“현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추정상속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에 긍정적이지만, 루돌프 황제는.... 냉정히 말해 현재 제국 내의 상태를 조율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헝가리 왕국의 반발을 쉽게 찍어누르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거 참......”
“게다가 워낙 자국 내에서도 반발을 많이 산지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반발을 많이 사고, 헝가리 왕국이 정책에 반발하는데, 밑에 놈들은 자치권 달라고 들고일어나고, 이거 이러다가 이탈리아 놈들과 전쟁하다가 지기라도 하면 제국이 공중분해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무엇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는 러시아의 위협이 현실적입니다. 세르게이 비테 총리와 표트르 스톨리핀 부총리 모두 이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슬라브 민족주의 세력, 특히 군부가 보헤미아를 원합니다.”
“정신을 못 차렸구만.”
물론, 세르게이 비테와 표트르 스톨리핀 모두 굉장한 능력자다.
기술관료로써 능력이 좋을 뿐이라 문제다.
그리고 군부는, 그 두 사람이 손도 대기 어려울 정도로 커져 있었다. 많은 부분은 지난 대전에서의 승리에 기반했다.
먼저 귀족층이 대부분의 장성직 등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은 자체적인 이익집단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비테와 스톨리핀 모두 이 군이 굉장한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소모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으며, 군축을 원하고 있었지만 귀족층이 주력이 된 군은 이들의 개혁 시도를 원천적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군기문란이나 비리를 방지하는 건 가능하지도 않은 판이고.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차르의 권위 하나뿐이었다.
문제는 지금 차르가 니콜라이 2세다. 다른 말로 문민통제가 눈곱만큼도 안 되고 있다는 거고, 군 장성들이 일종의 봉건영주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안에서 파벌이 생기고, 이익집단이 된 군부는 재계와 결탁해 거대한 군산복합체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바로 그 이익집단이, 군산복합체가 전쟁을 원하고 있다.
“군부, 정계 등에 총체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비테나 스톨리핀과 손을 잡은 상태로 대대적으로 개혁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돼, 안타깝게도 지난 전쟁에서 이겨버린 이상, 그게 아무리 자연환경 덕에 이긴 거라고 해도 군의 구태는 더 깊이 뿌리박혔을 거고 군에 손을 대기는 더 어려워졌겠지.”
황제나, 적어도 그에 준하는 존재가 전권을 쥐고 적극적인 수술에 나서지 않으면 러시아는 끝이다. 지난 전쟁의 승리가 역으로 독이 되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