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기도
평소에는 왕관을 잘 쓰지 않지만, 오늘은 왕관을 쓰고 있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월계관 모양의 프랑스 제국관은 번갯불에 섬뜩하게 빛났다.
“오래전에 누군가가 눈물을 비로 은유해서 시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었지.”
답이 없어도, 나는 나직이 말했다.
“비가 하늘의 눈물이라면, 얼마나 격한 감정을 느끼기에 눈물이 이토록 많이 흐르는 걸까?”
이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본다고 하면, 과연 그 하늘이 내려다볼 희노애락은 얼마나 많을까.
나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알고 있는 5명이 고통받는다, 내가 알지 못하는 50명이 고통받는다.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굴 구하는 것이 옳은가?”
사람마다 다른 선택을 내릴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황제이기에, 물을 것이다. 50명이 누구의 국민이냐고.
나의 국민이라면, 나는 50명을 택할 수밖에 없다.
나의 국민이 아니라면, 나는 5명을 택하리라.
설령 누군가가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누군가가 평생토록 나를 원망하더라도.
나는 황제이기에.
모든 프랑스 시민의 대표이기에.
그래야만 한다.
“눈물이라.”
하늘에서 내리는 눈물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울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한켠에 마련된 예배 장소에 무릎을 꿇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가 분명 존재한다는 건 나의 존재만으로 이미 증명되지 않았나.
그리고 그런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에게 올리는 기도가 조금 형식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해주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나의 날이 다하기 전에 나의 책무를 끝내게 해 주소서.
아헨 인근의 프랑스-프로이센-네덜란드 국경에서 프로이센제 570형 반자동 소총을 장비한 프로이센 정규군 병사들과 신형 FAB03 자동소총을 장비한 프랑스군이 악수를 나누었다. 전쟁을 치른 지 20년도 안 된 사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우리가 당신 앞에 민족과 종교, 사상이라는 이름 앞에 지어오고, 지을 죄를 그들이 용서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일랜드군의 경순양함이자 해군 총기함 세인트 패트릭이 보유한 6문의 194mm 주포와 지상지원용 6연장 다연장로켓포 미미 2문을 영국 해군의 방호순양함에 정조준했다.
-반복한다, 즉시 퇴거하라, 귀함은 현재 아일랜드 공화국의 영해에 들어와 있다. 즉시 퇴거하라.
아일랜드는 여전히 내부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북아일랜드 문제가 더했다.
북아일랜드에 거주하던 잉글랜드인들은 전쟁 당시 학살당하거나 추방당했다.
특히 아일랜드계 성공회 교도들은 대부분 학살을 면치 못했다. 아일랜드인이면서 성공회 교도라는 것은 아일랜드인들에게 있어서 영국에 부역한 민족반역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아일랜드계 성공회 신자들은 살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야 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정부는 단호했다.
매국노를 자국 내에서 처벌해야지 영국에서 편히-영국에서는 차별당하는 신세라도-살게 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 문자 그대로 인권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는 조치였지만, 영국에 당한 기억이 생생한 거의 모든 아일랜드인들은 이 조치를 적극 지지했다.
북아일랜드 내에서도 성공회 교도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기에 저항도 시도되었지만, 전차와 기관총까지 동원한 아일랜드군을 상대할 수 없었고,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앉아서 죽느냐, 도망치느냐의 선택지뿐이었다.
그랬기에 영국-아일랜드 항로는 모조리 봉쇄되어 철저한 검문이 붙었다.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건조한 세인트 패트릭급 경순양함까지도 이 업무에 동원된 것이었다.
반대로 영국에서는 아일랜드에 극도로 적대적인 자국 내의 여론을 의식해 해상조난을 당한 민간인들을 구출한 뒤 망명을 받아준다는 모양새를 취해 아일랜드 영해를 일단 빠져나온 탈주자들을 건져가고는 했다. 해군도 간간이 임무를 수행했지만, 주로 민간 상선들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아일랜드 영해가 침범되는 일도 있고는 했다. 반대로 영해를 침범하지 않았는데 아일랜드 해군이 억지를 써서 영국 선박을 나포하고 안에 탄 탈주자들을 잡아들이려 드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을 짓밟은 아일랜드인들을 증오한다.
아일랜드인들은 자신들을 굶겨죽이던 영국인들을 증오한다.
증오의 연쇄는 끝없이 이어져 풀 수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역사를 더 옳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시고.
선동에 일어나 폭도로 변한 시위대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찰들이 충돌했다.
몽둥이가 무자비하게 휘둘러지고, 공포탄 사격도 이어졌다.
시위대 역시 경찰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맞섰다.
보헤미아의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이는 하루이틀 쌓인 불만이 아니었다. 정치적 권리를 가진 세력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뿐, 제국의 세 축 중 하나인 보헤미아에 거주하는 이들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못지 않게 제국에 공헌하고 있음에도 그들의 권리는 상당히 제약받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가 타협하더라도 헝가리 왕국이 타협할 의사가 없었다.
-잃어버리기 전에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을 지혜를 주시옵고, 심연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스스로조차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보호해 주소서.
한때 통일되었던 이탈리아는 갈가리 찢겨 피에몬테는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고, 리구리아는 제노바 공국으로, 다른 지역들도 밀라노 공국, 토스카나 공국, 교황령, 시칠리아 왕국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공통적으로 사실상 주권을 상실한 채 오스트리아의 꼭두각시 신세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한 차례 통일된 국가를 강제로 찢어놓고, 이미 나폴레옹의 시대부터 태동한 민족주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집 밖으로 몰려나온 학생들과 시민들은 오스트리아 국기를 불태우며 행진했고, 거리로 몰려나온 헌병들은 주저 없이 총격을 가했다.
수많은 젊은 피들이 수많은 도시들의 도로를 붉게 포장했다.
-우리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세상을 삼키고 파멸시키려 하는 우리의 적들을 막으리니, 그들이 승리의 함성 앞에 무너지고 공의 앞에 영원히 침묵하는 날이 오게 하소서.
돤치루이, 왕스전, 쑨원의 연합군이 북경을 포위했다는 보고를 받은 펑궈장은 다른 모든 이들을 내보냈다.
몸의 모든 열기를 빼앗아 가는 한기가 관자놀이에 대어진 총구에서부터 느껴졌다.
자금성의 내전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태양에 견주는 힘을 쥐었을 때 그 힘을 평화롭게 사용하게 해 주시옵고.
프랑스 제국의 기밀 부서 중 하나인 핵에너지 연구센터 내 사무실에서 마리 퀴리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수식을 검토했다.
과거에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할 때처럼 직접 일일이 허리아프게 피치블렌드(우라늄 원석)을 톤 단위로 분쇄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대신 몸이 편한 만큼 정신이 피곤해졌으니 업무 난이도는 거기에서 거기였다.
흑연이나 중수를 이용해 중성자를 감속시켜 핵분열 반응을 촉진할 수 있다는 연구자료를 검토하던 마리 퀴리는 사이클로트론의 안정적인 사용을 위한 전력 추가공급 요청서에 서명했다.
초우라늄 원소의 합성 역시 그녀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사이클로트론은 초우라늄 원소의 합성에 반드시 필요했지만, 그만큼 에너지를 미친 듯이 잡아먹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핵에너지 연구센터만을 위한 전용 발전소를 하나 건립해야 할 지경이었다. 안 그러면 파리의 절반이 상시 정전될 지경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발전소가 완공되려면 멀었으니, 지금은 제국 내무부에 여분이 되는 대로 전기를 보내달라고 해야 했다. 덕분에 브르타뉴 지역의 도시들은 여유전력량이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내무부 관료들은 대체 연구실에서 뭔 짓을 하길래 저렇게 전기를 많이 쓰냐면서 멱살을 잡으려 들 지경이었지만, 황제의 최우선 허가서는 대부분의 경우 관료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과거를 되돌아보아 미래를 알게 하소서
스페인 왕국의 주요 도시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시위는 그 규모만으로도 경찰이든 군대든 간에 밟혀죽기 싫어서라도 진압을 엄두도 못 내게 만들었다. 총파업을 선언한 노동자들을 선두로 분노한 시민들이 그 뒤를 이었다.
언론 통제도 한계에 도달했다. 아프리카 토인들에게 군대가 비참하게 패배하고 무너지고 있으며, 자신의 남편, 오빠, 동생, 아들이 무어인들에게 죽거나 사로잡혔는데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스페인인들은 분노했다.
내각은 물론이고, 스페인군의 최고 책임자이며 실제로 실권을 가지고 스페인군을 이끌었던 알폰소 13세가 그 분노의 타겟이 되었다.
알폰소 13세는 실제로 군권을 휘둘렀기에, 도저히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시위대는 누가 되었든 간에 책임을 질 사람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오롯이 알폰소 13세에게 있었다.
의회가 자신의 견해에 반대한다고 의회를 해산하고, 군권을 휘둘렀으며, 군부 인사들만 측근으로 두고 사실상의 군사독재를 벌인 것은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였고, 시위대의 요구 역시 하나로 수렴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의 퇴위.
-그리고 무고한 이들과 그들을 지키는 자들을 축복하소서.
청년과 여인이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먼 발치에서 또 다른 소녀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먼 발치에서 그 둘을 바라보고 있다.
루이 14세, 태양왕이라 불렸던 자는, 정말 그가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짐은 곧 국가다.’
왕이 곧 국가라면 국가는 곧 왕이다.
군주는 그렇기에 개인이 될 수 없다. 개인의 호오는 국가의 미래 앞에서 중요하지 않다.
국가 정책에 따라 자신의 사생활과 취미, 취향마저도 바꿔내야 한다. 공적으로는 그렇지만 사적으로는 또 다르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그 결과로 피눈물이 흐를지라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남을지라도. 그렇게 태어났기에 해야만 하는 의무였다.
그렇게 태어났기에 얻은 것이 많았으니, 그렇게 태어났기에 지워진 의무도 행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쓸하게, 어쩌면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포함된 복잡한 시선으로 한 쌍의 남녀를 바라보는 한 명의 시선과, 자신들의 어께에 짊어진 짐이 너무나 무거워 시선을 느끼지도, 고개를 돌릴 생각도 하지 못한 두 명의 인간과, 그들 모두를 묵묵히 바라보는 또 다른 한 사람의 시선은 결코 마주치지 못했다.
-아멘.
기도가 끝났다. 비 역시 그치고, 태양의 빛이 구름 사이로 내려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