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질문
프랑스의 모처에서 핵무기의 기초가 닦이고 있든, 영국 런던에서 음모가 꾸며지든, 스페인이 개망신을 당하든, 중국에서 내전이 벌어지든.
적어도 한 남자에게는 지금 당장 자기가 알 바는 아니었다.
“유럽 최고의 행운아 전하께서 오셨습니까?”
“그 말투는 둘째치고 내가 왜 유럽 최고의 행운아인가?”
“유럽 전체에서 미모로 유명한 두 명의 공주가 사랑싸움을 벌이게 만든 장본인이 행운아가 아니면 뭡니까?”
황태자의 보좌 장교인 뮈즐리에 해군 소령이 낄낄거리자, 곁에 앉아 있던 다른 장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꺽다리, 좋은 날에 왜 한숨인가?”
상대를 깔끔히 무시한 젊은 소위는 질문을 던졌다.
“황제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애초에 내겐 선택권이 없지.”
“여론만 보면 황태자 전하가 선택하는 여인이랑 충분히 결혼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애초에 내가 연정을 품은 여인이라고 하면 아나스타샤네, 루이제가 아냐. 그리고 그쪽도 내게 딱히 연심은 없을 거야.”
“예?”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발언에 두 장교의 시선이 마주쳤다.
“반대 아닙니까?”
알려진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듣기로는 루이제 공주님과 연인관계셨는데 첫눈에 반한 아나스타샤 공주님이 쫓아오신 거라고......”
“아니네. 오히려 아나스타샤와는 친구 이상 연인 미만, 그 정도의 관계였지, 루이제는..... 그냥 그렇게 알려지기를 바라야 하는 경우였고.”
“그렇게 ‘알려지기를’.”
“내가 대뜸 독일 여인과 결혼하겠다면 싫어할 사람들이 제법 많으니 말이네.”
“크흠,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버지는 그래야 한다고 판단하셨고, 난 따를 뿐이네.”
“다른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 프랑스가 그렇다면 어디에서 동맹을 찾아야 하는가? 에밀, 자네가 말해보게.”
“..........”
러시아는 못 믿을 동맹이고, 영국은 이미 틀어진 지 오래다. 애초에 영국은 신용할 수 있는 동맹이 아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괜찮은 선택지지만, 별 도움은 안 된다.
“애초에 남독일 연방과 동맹을 맺을 수 있었던 원인도 내 모친께서 바이에른의 공주셨던 까닭이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버지는 같은 일을 한 번 더 하고자 하시네. 이번에는 북쪽을 상대로. 아버지가 지금 빌헬름 2세와 협의 중인 조건 중 하나가 공석인 라인 공국의 공작위를 내 아내가 될 자에게 수여하는 거지.”
빌헬름 2세는 그렇게 될 경우 프랑스가 프로이센이 ‘평화롭게’ 룩셈부르크를 합병하는 것을 도울 것을 조건으로 내밀긴 했지만, 그건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이야기였다.
“독일인들과 손을 잡는다면.....”
“샤를마뉴 대제의 시대 이래 처음으로. 유럽이 연합해 러시아, 그리고 영국과 맞서는 셈이네.”
영국도, 러시아도 기본적으로 유럽 본토와는 뭔가 이질적이라고 평가받는 국가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방금 암시된 연합은 유럽 연합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영국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부흥하고 있네, 아버지는 지난 전쟁이 끝난 직후, 20년에서 30년이면 영국인들의 능력은 다시 대전쟁을 일으킬 정도가 될 거라고 예측하셨네.”
그럼에도 영국을 완전히 무너트리지 않은 이유는, 프랑스 스스로도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할 필요성이 다분했기에 영국의 결사항전만은 막아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프랑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베를린과 캐나다까지 쫓아가 영국과 독일 정부를 붙잡아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폐하의 말씀대로라면 길어야 10년 내에 대전쟁이 다시 일어나겠군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동맹에 필사적인 걸세, 아버지는 나폴레옹 1세 폐하의 실패를 반복하실 마음이 없으시지.”
“영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적대하시면서 말입니까?”
“자네들은 러시아와 영국과 우호관계를 지속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두 사람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영국은 애초에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할 상대고, 러시아는 저희가 쳐들어갈 때가 문제지 방어전이라면 충분히 이깁니다. 심지어 북독일과 남독일이라는 방패까지 낀 상태에서는 못 이기는 게 이상할 겁니다.”
“무엇보다 지금도 병력의 3분의 1은 국내 소요 진압에 투입해야 하는 자들이 무슨 재주를 부려서 유럽을 정복하겠습니까.”
독일이라면 모를까, 러시아는 절대로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
영국? 해군력에서 프랑스를 압도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섬나라 주제에 해군력에서 압도하지도 못하면 게임 끝난 거다.
“하긴, 지금 안티아급 전함이 완성되었는데도 대금 지급이 미뤄져서 부두에 묶여 있지 않나.”
계약상 프랑스가 기다려주는 건 취역 후 2년이다.
2년 뒤에도 러시아가 잔금 지불을 못해 함선을 인도받지 못할 경우, 프랑스는 즉시 미국과 재협상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과 재협상을 시작한 지 1년 뒤에도 러시아가 지급능력이 없을 경우 러시아 정부는 안티아급 전함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한다.
그리고 5개월째 건조가 완료된 안티아급 1번함이 부두에 묶여 있다.
모두가 우려한 것처럼 러시아가 대금을 지급하지 못한 것이다.
그때, 문이 열렸다.
“황태자 전하, 공주님께서......”
“어느 공주?”
“러시아 제국의 황녀 아나스타샤 님이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잘해 보십시오.”
능글맞게 웃는 소령과 무표정한 꺽다리 소위를 본 황태자는 묵묵히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자, 한숨을 쉰 소위는 입을 열었다.
“소령님.”
“황태자 전하께 맞춰드린 것 뿐이네.”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듯 합니다만.”
“샤를, 개인적으로 한 마디 해주자면, 자네는 유능하네, 하지만 오만하지. 세상에 자네만 옳은 게 아니야, 자네가 그런 태도를 전혀 고치지 않는다면.....”
그 오만이 언젠가 자네의 발목을 잡을 걸세. 샤를 앙드레 조제프 마리 드골 소위.
***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팔레 루아얄의 정원에는 차가운 바람이 감돌고 있었다.
오늘따라 텅 비어 보이는 정원에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둑한 하늘은 우울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날짜로는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뵙는 느낌이네요, 황태자 전하.”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런가요.”
조용히 샤를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비가 한바탕 쏟아질 것만 같지만, 아직 비가 오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둘은 여전히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연인이라기는 어색하지만, 친구라기에는 이상하리만치 가까운 사이.
그러나 결정을 내릴 때가 되었다.
더 이상 어제와 같아서는 안 된다.
한 걸음 다가가면 한 걸음 도망치는, 그런 관계도,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뒤돌아서거나, 아니면 다가가서 손을 맞잡거나.
더 이상은, 그저 시간을 흘려보낼 수 없었기에.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 걸음 다가갔다가는 친구라는 관계마저 사라질 게 두려운 한 사람, 그리고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아니, 않아야 하기에, 답을 돌려줄 수 없는 한 사람.
두 사람에게 부족했던 건 용기였다.
그녀는 묵묵히 백포도주의 잔을 바라보았다.
크리스털 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한심해 보였다.
두려워서 말하지 못한다, 용기가 없어서 다가가지 못한다.
내게 소중했던 그 시간들이 상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을 들을까 봐.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의 감정, 어린 소녀가 품었던 감정.
침잠해 있던 감정이 고개를 든다.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않는 것이 아니다.
할 말은 가슴 속에서 끓어넘친다.
그저 그 말이 정제되지 않을 뿐이다.
싫었다.
만난 시간이 자기와 몇 시간 차이도 나지 않는 여자에게 그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게.
어쩔 수 없다고 위안하면서 물러나기 싫었다.
첫사랑은 열병이라고, 정신없이 앓고 나면 어른이 된다고,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 법이라고 애써 다독이고 싶지 않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으니, 어린 날에 품은 자그마한 감정 따위는 나중에 보면 추억이라고 누가 정했는가. 그녀는 이미 어른이 되었기에 이미 가져버린 감정에 충실했다.
설령 그가 자신을 거절한대도, 구질구질하게 추하게라도, 진창을 해치고서라도.
오빠의 지시는 명분일 뿐이었다.
오빠는 자신에게 그의 결혼에 훼방을 놓으라고 했지만, 그의 말이 없었더라도 그녀는 기꺼이 진흙탕에 구르면서라도 발악했을 것이다.
포기하기가 싫었으니까.
허무하게 놓아버리기 싫었으니까.
‘전 당신이 제 손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절 안아주었으면, 그래서 제가 당신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이 제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하지만 알 수 없다, 미래가 푸른색일지 검은색일지, 다만, 그 중간은 없으리란 건 확실하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모르는 상자에 자신이 바라는 것이 들어 있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 손도 대지 않는 이 모든 것도, 끝낼 때가 되었다.
달콤한 꿈에서 깨어날 때가.
“샤를.”
아나스타샤는 이를 악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단지 스처가는 존재? 친구? 어쩌면 그 이상?
당신이 저의, 제가 당신의 반려가 된다면,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당신의 아버지가 국가 전략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이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어요, 이제 와서 켜켜이 쌓인 업보를 되돌리기는 불가능하는 것 역시 알고 있어요.
당신이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물은 게 아니에요.
당신이 누구를 사랑하고 ‘싶은지’ 묻는 거에요.
당신은, 저를 사랑하고 싶나요.
눈은 영혼의 창이라고 한다. 샤를은 오래 전부터 그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많은 부분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샤를은 아버지가 도무지 자연스럽게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입은 입술과 혀를 움직일 필요가 없을 때에는 언제나 굳게 다물어져 흔들리지 않았다. 웃어야 할 때는 웃지만, 그 입술의 모양으로 아버지의 실제 감정을 추측하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샤를은 같이 지내다 보니 아버지의 감정 상태를 추측할 방법을 알아냈다.
아버지의 눈을 보면 감정 상태를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요령이 생기면 쉬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생각을 전부 읽어낼 수는 없고, 상당 부분을 유추해야 했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샤를은 상대의 감정을 느낀다.
그녀의 눈에 깃든 것은 불안과 희미한 기대, 두려움, 그리고 갈망.
그것만으로 그녀가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랑하냐고?
이 감정이 사랑일까.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든다.
‘당신의 아버지는 이 나라의 군주에요, 하지만 당신의 삶은 당신의 것이니, 당신에게 묻고 싶어요,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그냥.....’
당신이 누굴 사랑하고 ‘싶은지’ 말해 줘요.
가슴이 뛴다.
두근거린다.
사랑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