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85화 (85/200)

85화 깽판(3)

날이 어두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 더울 정도로 햇빛이 내리쬐었는데, 오늘은 비가 올 모양인지 먹구름이 끼어 있었고, 덕분에 낮부터 불을 밝혀야 했다.

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신문을 펴든 생도는 아카데미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릇에는 식사 대용으로 가져다둔 소롱포가 여럿 있었다.

소롱포를 먹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따끈할 때 먹는 방법은 숟가락이나 큰 만두의 경우 접시 위에 올려서 육수를 빨아먹은 뒤 나머지를 먹는 법이 있지만, 그런 식으로 먹는 걸 선호하지 않고, 적당히 식혀서 먹어도 상관없는 상황이라면 만두피만이 아니라 속까지 충분히 식었다는 확신이 들 때 한 입에 털어넣고 아직 따끈한 정도의 육수의 맛을 즐기는 것이다.

파리에서는 먹기 쉽지 않은 요리지만, 청에서 황족들을 위시한 유학생들이 프랑스의 각 대학에서 흩어지게 되었을 때, 청 황실에서 숙수 몇을 보냈다.

프랑스 황제도 청나라의 황실 요리사들이 대접한 만한전석을 맛보고 극찬했으며, 특히 황제가 즐겨 먹는다는 몇 안 되는 청국 음식인 소롱포는 이것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재료도, 만든 사람도.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이유도 명확했다. 본인 역시 청의 황족이었기에.

본명 아이신기오로 셴위, 혹은 애신각라 현우.

친왕의 자식.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 국적을 명목상 가진 청의 황족.

‘결국 난, 어느 쪽도 진정한 일원이 될 수 없지.’

프랑스 국적을 가졌지만 진정한 프랑스의 일원이 될 수는 없다.

청의 황족이지만, 자금성은커녕 청나라의 땅을 밟아본 적도 없다.

중국어보다 프랑스어가 훨씬 익숙하다. 아니, 집 밖에서는 중국어를 사용해본 적도 없어서 발음하려면 어색할 지경이다.

교류하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면 아카데미의 그...... 그......

‘쓸데없이 오지랖 넓은 녀석.’

그 녀석 하나 빼고는 사실 대화도 거의 나누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기숙사에 사람이 아예 없군.’

가족들은 프랑스 정부가 제공한 저택에 살고, 자신은 아카데미가 제공해주는 개인실에 산다. 몇몇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큰 집을 주지만, 황태자조차도 결혼하지 않아 딸린 사람이 없으면 큰 방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아카데미 학생들이 2인실 4인실을 쓸 일은 없지만.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비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휴일이라서 다들 나간 것이다. 직원들 대부분, 생도들 거의 전부.

다들 가족이든 연인이든 만나서 어울리리라, 숙직하는 직원들 아니면 정말 만나러 갈 사람도 없지 않는 한 다들 자리를 비웠을 것이다.

‘방 정리는 직원이 하지만, 기숙사에 사람이 있는 한 들어올 리도 없으니.’

한숨을 쉰 현우는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난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 ‘오지랖 넓은 놈’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두 국가의 공주가 빠져들고 만 치명적인 매력!>

<한 명의 기사와 두 명의 레이디, 과연 장미꽃을 받을 공주는 누구?>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었다.

자연스럽게 팔을 뒤로 뻗자 근처에 늘어놓은 벌꿀술이 잡혔다.

프랑스에서는 와인이 유명하지만, 벌꿀술이 자신의 입맛에 더 맞았다. 대강 치즈 몇 조각을 입가심 삼아 입에 집어넣고, 독한 벌꿀술을 병의 주둥이를 잡고 입안에 털어넣었다.

“후우.... 좀 살 것 같네.”

물론 절대적 기준으로 따지면 매우 독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벌컥벌컥 마실 물건은 아니다.

술을 취할 정도로 마시는 게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냥 마시고 싶었다.

요즘 언론에서 그 오지랖쟁이의 이야기가 1면부터 3면까지 안 넣은 신문이 없었다.

심지어 몇몇 신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련 기사로 도배하기도 했다. 당연히 불티나게 팔렸다.

당연했다.

프랑스 제국의 황태자에게 러시아 제국의 적통 황녀와, 프로이센의 공주 두 사람이 홀딱 반해서 파리에서 치정극을 벌였다.

황태자가 프로이센의 공주를 선택할 기미가 보이자 로마노프 가문의 황녀가 파리까지 쫒아왔다. 이에 질세라 베를린에 있던 프로이센의 막내 공주도 파리로 달려왔다.

당장 파리, 아니, 프랑스 전역의 술집이나 샬롱, 카페 등에 가 보면 그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찾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프로이센 공주가 첫눈에 반하고 러시아 황녀의 가슴에 불을 지른 남자가 자국의 황태자다, 게다가 성격도 좋고 워낙 서민친화적인 인물로도 유명한 등 원래부터 인기가 좋았던 황태자다. 이미 제국에서 신성불가침 대접을 받던 아버지의 위광을 좀 물려받은 것도 있겠지만.

막말로 이런 이야기를 안 하고 참을 프랑스인이 있는가? 프랑스인이?

소위 말하는 국뽕을 채워주기 위한 기사들이 모든 언론을 꽉 메웠다. 두 명의 공주가 신부복을 입고 황태자가 가지고 있는 반지를 탈취하려고 싸우는 모습이 담긴 풍자화도 대놓고 실려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뒷골목의 작가들도 한창 바쁘리라.

그야, 이런 소재를 어떻게 그냥 넘기겠는가? 이름이야 조금씩 바꾸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소송당할 확률은 폭락한다.

프랑스 정부가 그걸 일일이 잡고 다닐 여력도 없고. 무엇보다 앙시앵 레짐 말기의 비슷한 음담패설들처럼 정부의 권위를 떨어트리냐면 그것 역시 아니니까.

‘되려 오르면 오르지.’

루이 16세 시기만 해도 루이 16세가 아내에게 쥐여산다거나 하는 소문이 왕실의 인기를 더 떨어트렸다.

지금은 반대다, 공주 둘을 단숨에 홀려버릴 정도로 뛰어난 황태자라면 되려 추종자들이 생기리라. 애초에 아내를 두고 다른 애인을 만드는 것쯤은 프랑스인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능력이 있으면 꽃 여럿을 손에 쥐는 건 용인된다. 능력이 있다면.

앙시엥 레짐이 무너진 지 오래지만, 그러한 관념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하물며 자기 때문에 두 공주가 치정싸움을 벌인다? 스스로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고, 반대로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게다가 프랑스인들이 더 좋아할 부분이 따로 있었다.

영국의 필립 왕세손.

이번 치정에 한 자리 낀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황녀는 영국의 필립 왕세손과의 혼담이 오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적어도 언론에는 그렇게 나와 있다.

즉 필립 왕세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프랑스의 황태자에게 여자를 뺏긴 꼴이 된다는 것이었다. 둘이 서로 만난 적도 없는 걸 넘어 편지 한 번 주고받지 않은 건 중요하지 않다.

프랑스 황태자가 영국 왕세손의 약혼녀를 뺏었다. 뭐 사실 약혼녀도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다면 프랑스인 중에 누가 이 상황을 반기지 않겠는가?

이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이들이야 유럽 왕실들의 높으신 분들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저 이 상황을 즐길 뿐이다.

‘그래도 아마 아나스타샤 공주를 선택하는 쪽이 인기가 좋겠지.’

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프랑스인들은 자기들 황태자가 영국 왕세손의 여자를 뺏었다는 카타르시스를 바랄 뿐.

그러나 의외로 여론은 팽팽했다. 프로이센 국왕이 죽고 못 산다는 막내딸 쪽도 제법 매력적인 선택지인 것이다.

이유도 단순한데,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프로이센에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프로이센의 금지옥엽을 황태자가 손에 넣는다는 것도 만만찮게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신문을 읽는 독자들, 파리, 더 나아가 프랑스 시민들의 대리만족성 음습한 욕망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은근하게 강하다.

‘언론의 어조도 제법 둘 모두 치열한 경합을 보이도록 유도하고 있고.’

물론 이상한 건 아니다. 그러면 신문 판매부수가 늘기는 할 테니까.

하지만......

묘하게 짜증난다. 이 신문들.

‘어디서 사람이라도 한 명 안 죽어버리나.’

이 망할 기사 말고 뭐든 다른 것을 보고 싶었다.

그게 어느 유럽의 고위 인사의 부고라도 마음에 들 지경이었다.

신문을 여럿 뒤적거리다가 간신히 찾아낸 연애와 무관한 기사에는 유럽 사회의 민낮이 드러나 있었다.

<영국, 집시 추방법 제정!>

대충 영국령 우간다로 집시들을 추방하고 아예 영구적으로 그곳에 정착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주의가 태동하는 시대, 명목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해 주었듯이 백인의 의무로써 기꺼이 땅을 떼어주어 그들에게 독립국가를 수립하게 한다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그냥 추방이었다.

유대인들이 과거에 당한 것처럼 패전의 원인으로 몰려 린치당하는 집시들을 나라에서 쫓아버리겠다고 선언해 몰표를 받고 총리까지 되었으니 영국에서는 집시는 모습을 감추게 될 확률이 높았다. 집시를 골칫거리 취급하는 건 전 유럽이 공통이니 십중팔구 타국들도 참여할 터.

유대인들이 탄압을 못 견디고 이스라엘로 사라지면서 유럽에 들어온 집시들이 대신 두들겨맞는 형국이었다.

‘자업자득 아닌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집시가 치안을 악화시킨다는 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전부 동의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들을 국가에 기생하는 기생충 취급도 서슴지 않는 게 현실. 전부 죽여버리기는 뭐하니 쓰레기통을 지정해 놓고 분리수거해버리겠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심지어 기사의 논조조차 영국이 야만스럽다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우리도 이런 법 빨리 제정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쪽이었다.

계속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순간 굳었다.

<위안스카이, 청 황제 폐위, 중국 내전의 향방 어디로?>

***

“청 황실은 유폐되었고, 위안스카이는 스스로를 대총통으로 선언했습니다.”

원 역사대로라면 위안스카이를 버텨낼 재간이 없던 혁명 세력이 위안스카이와 타협해 대총통 자리를 넘겨주는 대신 청을 멸망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혁명 세력이 위안스카이와 타협을 거부했고, 북양군벌은 영국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는 혁명 세력에 맞서 장강을 돌파하지 못하고 제법 고전해야 했다.

“둘 다 중화민국을 자칭한다는 게 웃기기는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의지는 명확합니다. 본인이 황제가 되려는 겁니다. 민국은 허울일 뿐이죠.”

“그래서, 위안스카이를 지원하는 게 좋겠나, 몰아내는 게 좋겠나?”

“위안스카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본인이 북양군벌의 수장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중국의 민심은 중화민국에 있습니다만......”

“그러나 북양군벌만큼은 위안스카이가 확실하게 쥐고 있겠지, 그리고 그 북양군벌이 있는 한 중국 북부가 무너지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지금 중국의 영토는 명나라 시절로 돌아갔지만, 위안스카이는 장강 이북의 모든 적대세력을 물리적으로 전멸시켰다.

위안스카이가 암살당하면 북양도 오래가지는 못하겠지만, 반대로 둘 모두가 건재한 이상 북양정부는 무너지지 않는다.

영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든, 북양군벌 자체나 위안스카이의 안위에 무슨 일이 생기든, 둘 중 하나만 벌어져도 북양정부는 끝이다.

반대로 영국의 지원이 끊기거나, 다른 열강이 위안스카이를 지원하는 순간 중화민국의 숨통은 끊기고, 쑨원의 꿈은 그저 한낱 일장춘몽이 될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북양정부의 수립과 동시에 전 열강에게 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권은 보장될 것이라고 약속했네, 이로 인해 전국적 저항을 맞이하고 있지만, 북양군벌 자체는 아직 건재해.”

“현재 우리가 할 일은......”

“황제 폐하, 급보입니다. 위안스카이가 죽었답니다.”

“.....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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