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84화 (84/200)

84화 깽판(2)

깽판, 일을 망치기 위해 괴악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짓거리를 자칭하는 속어.

사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현재 파리에서 벌어지는 일은 깽판에 가까웠다.

“아나스타샤 공주는 수행원이라고는 카자크 장교 한 명에 하녀 한 명만 데리고 왔습니다. 언론에 사방팔방에 알린 건 아니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언론인들의 속성을.”

“그리고 입소문도 무시할 수 없지. 그 수행원들은 어디 잇지?”

“파벨 소령과 하녀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푼 호텔에...... 막말로 버려졌습니다. 정보원들의 보고에 따르면 비 맞은 강아지마냥 처량하게 로비에 서 있다는군요.”

“버려진 게 아니겠지, 그러면 적당히 어디 객실에라도 들어가 있었을 텐데, 굳이 이목을 끌게 한다?”

그럴 리가.

“오히려 본인들의 존재를 알리려는 거다.”

프랑스 제국에는 나폴레옹 3세가 확립해놓은 언론 검열제도가 멀쩡히 살아 있었다.

황제가 적극적으로 막으려고 든다면 황녀의 방문 사실을 조용히 묻어버린 다음 아무 관심도 못 받고 돌아가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그걸 막아버리는 게 파리 시내에서 가장 비싼 호텔을 잡고, 자기 수행원들을 로비에 대기시키는 행위였다.

“뚫렸어.”

원래, 우리는 프랑스와 독일 간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한 편의 치정극을 꾸미려고 했다.

독일의 공주와 프랑스의 황태자와의 만남과 운명적인 사랑, 가문의 반대, 이런 걸 신문을 이용해서 판을 한도 끝도 없이 키워서 ‘어쩔 수 없이’ 둘의 관계를 인정한다는 식으로 넘어가고, 더 나아가 동맹까지 성사시킨다는 계획.

양국 간의 해묵은 감정을 없애고 동맹으로 만들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이 양국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러시아 공주가 끼어든다면?

이렇게 되면 상황은 명백히 삼각관계가 되고, 오히려 정략결혼을 하려던 쪽은 프랑스와 독일이 되어버린다.

사실 그게 진실이기도 하고.

“아나스타샤 공주도 그냥 온 건 아니겠지, 누가 보낸 거지?”

니콜라이 2세? 아니, 그 양반은 그런 음모를 꾸밀 성품도 못 되고, 상황도 못 된다.

“러시아의 누가 꾸몄는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황태자가 꾸몄든, 황제가 꾸몄든, 확실한 건 이번 일로 이번 계획 자체가 상당한 곤란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입니다.”

“끄응.........”

정보가 샜다. 아니, 어쩌면 선제적 조치일지도.

영러합작이 이루어지면 프랑스가 손을 벌릴 곳은 소거법으로 독일밖에 남지 않으니까.

양국 간의 원한이 워낙 깊어서 쉽지는 않아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까지 제거하고 싶어서 공주를 팔았다고 해도 말은 된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사방에서 밀려든 외신 기자들을 피해 간신히 팔레 루아얄을 탈출해 황궁으로 온 샤를은 이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진 표정이었다.

“샤를.”

“예.”

“빅토리아 공주와 너는 비밀 약혼을 한 상태다. 그리고.......”

“아버지, 저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겠지. 안다.”

“전....... 전.... 그러니까......”

“네가 아는 건 나도 거의 다 안다. 샤를. 하지만 내가 확신할 수만은 없는 건 네 마음이다. 인간은 상대의 마음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까.”

“제가 뭘 해야 합니까.”

“반대로 묻지, 뭘 하고 싶나?”

샤를은 입술을 깨물었다.

뭘 하고 싶냐니, 그야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

지금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은데.

아니.

달려가고 싶은 게 맞나?

지금 그가 달려가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가고 싶지 않다.

아니, 이건 가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고 하는 건가?

혼란스럽다.

어렵다.

“사람이 하는 행동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고 싶어서 하는 짓, 그리고 의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의무와 욕구를 구분하는 법은 간단하다. 막말로 ‘왜 그랬어?’ 라고 할 때 ‘너도 내 입장 되어보면 안다’ 이런 식의 대답이 나오면 욕구가 아니라 의무감 때문에 한 거라는 거지. 이건 내 말은 아니고 나도 어디선가 들은 말이다만.”

“........”

“네가 내 앞에 앉아 있는 건 욕구냐? 의무냐. 네가 달려가려 하는 건 욕구냐? 의무냐.”

“그건........”

“상투적인 대답은 필요없다. 사랑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있고, 의무감으로 사랑하는 이가 있다.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에 따라 의무로써 행동하는 이와 진정 갈망해서 하는 이가 있다. 쉽게 구분하긴 힘들지, 그 차이점을 보더라도 대충 보아넘기는 이들도 많고.”

“아버지.”

“국가는 의무를 강조하지만, 나는 욕구 역시 의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아버지가 욕구 없이 살아왔기 때문입니까?”

“.......”

“아버지, 아버지는 가족을 사랑하십니까. 아니, 이 말은 의미가 없겠죠, 아버지는 저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감히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침묵이 이어졌다.

샤를은 정말 오랫동안 내심 의문을 품어왔지만 끝내 던지지 못했던 질문을 가슴 속의 가장 깊은 우물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려 입 밖으로 내었다.

“이 질문을 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아버지가 저를, 누님을, 어머니를 사랑하신 것은, 욕구였습니까, 아니면 의무였습니까?”

군인은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

황제와 황태자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충실해야 한다.

자식은 부모님을 존경하고 효를 행해야 하며,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대하면서도 하나의 인격체로써 존중하며 자녀가 잘 성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다.

한다.

한다.

하고 싶다는 없다.

아버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깊은 생각을 해야 할 때의 아버지의 버릇이었다.

‘감히 묻겠습니다, 아버지는 저희를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셨습니까,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셨습니까.’

황제의 의식 너머에서, 마음 속 쓰레기통에 구겨넣은 한 자락의 기억이 피어오른다.

‘안 돼.’

언제부터인가 그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바라는 것이 없으면, 누구에게도 거부당하지 않는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스스로 얻어낸 것으로 거래를 했다.

누군가에게 빚을 지지 않으려 했다.

감정적인 부분이든, 금전적인 부분이든.

불가피하게 해야 할 때는 확실하게 빚을 최대한 빠르게 청산하고는 했다.

하지만 정작 주변에 가까이 두는 이는 거의 없었다.

‘연애는 안 하고 일만 하니?’

‘인연이 없습니다.’

‘나가서 누구든 만나야 인연이 생기지. 나가서 좀 놀거라. 일이 바쁜 것도 아니면서.’

‘미리미리 처리해두면 막상 닥쳐서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여유가 생깁니다. 만날 이들도 지금 전부 바쁜 시기입니다.’

‘그 여유시간도 전부 일에 쏟아붓고 있잖니. 우리도 이제 제법 나이를 먹었다. 넌 아직 젊어서 살 날이 창창하지만. 그래도 염려스럽구나. 가정을 이제 꾸리는 걸 생각해야지.’

‘누구랑 말입니까?’

‘회장님께서 괜찮은 상대가 있으니 자리를 마련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과거에 침잠해 있던 나는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래된 의무는 진심과 때로는 구분하기 힘들 때가 있지, 반대로 의무를 수행하다 보면 그것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기도 한다.”

빙빙 돌려 말했지만 결론적으로 모르겠다는 소리였다.

“...... 저 역시 그렇군요.”

***

“가만히 놔두면 일이 커지거나 잊혀지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기자놈들이 장작을 쏟아넣는 한은 후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네, 프랑스 혁명 시기부터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의 치정 문제는 시민들의 좋은 취미생활이었으니.”

“퍽 고상한 취미생활이야.”

마리 앙투아네트를 소재로 한 야설과 음담패설이 당대에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는 역사적으로도 정설이다.

“그래서, 어쩔 건가?”

대화를 나누던 참모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영양가 없는 말은 그만두고, 이 상황을 수습할 방법을 찾아볼 수 있나?”

한참의 침묵 끝에 소심하게 손을 든 젊은 참모가 입을 열었다.

“.......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폐하.”

“말하게.”

“그런데..... 음... 문제가......”

“문제가 뭔가?”

“그...... 그러니까......”

“속 터지게 굴지 말고 말하게, 당장.”

“황태자 전하가 양다리를 걸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 장난하나?”

“나폴레옹 3세께서도 수많은 사생아를 두셨지만 그래도 큰 문제가 된 적은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거랑 이거는 무게감이 전혀 다르잖나!”

아니 그보다 샤를이 그러면 진짜 쓰레기가 되는 것도 문제다. 그러니까 연인이 있는데 다른 여자한테도 꼬리친 게 대외적으로 되어버리는 거잖아.

“차라리 빅토리아 공주와 황태자 전하께서 연인 관계이신데 아나스타샤 공주가 샤를 황태자 전하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한다고 몰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건 러시아 측에서 반박에 나서면 논파될 가능성이 높아서 더 안 되네.”

샤를과 아나스타샤의 관계는..... 친구 이상, 연인 미만, 내가 이거 이상의 표현을 도저히 못 하겠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아무튼 간에 편지든 뭐든 간에 러시아가 작정하고 수집해서 대응에 나서면 이건 또 곤란하다. 연애편지라고 충분히 우겨볼 법한 편지들도 있었고.

반면 빅토리아와의 관계는...... 솔직히 말하자면 친하다. 친하기는 한데, 그게 이성적으로 발전할지를 놓고 생각하면 별로다. 내가 보기에 빅토리아 쪽에서는 음이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닌 것 같지만 정작 샤를 녀석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그래도 나름 연기에 충실해 보겠다고 연애편지 비슷한 걸 주고받기는 했다. 주로 시켜서, 혹은 편지가 왔으니 답장을 해야 한다고 쓰는 감이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샤를은 연애편지를 동시에 두 여자와 주고받은 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의 편지봉투가 바뀌는 일이 한 번쯤 일어날 법도 한데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것 같다.

한 쪽은 시켜서 보낸 거고 한 쪽은 원해서 주고받았으며 수위도 연애편지인지 아닌지 애매한 정도라는 것 정도는 기자들의 펜촉의 끝부분에서 글자가 씌여질 때는 없는 일로 치부되리라.

‘따지고 보면 진짜 쓰레기는 나군.’

20대 청춘남녀들의 애정사를 가져다가 전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 생중계하는 걸로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노괴가, 그것도 그 드라마 남주인공의 아버지씩이나 되어서 그런 음모를 꾸몄다면 쓰레기가 아닐 리가 있나.

문제는 쓰레기 소리를 듣는 게 내가 아니라 애먼 내 아들이 될 판이라는 게 문제지만. 각본이 이미 헝클어졌는데 이대로 이야기를 밀어붙이면 샤를 녀석이 여자 둘 마음 가지고 장난치고 애매하게 굴어댄 쓰레기로 낙인찍히는 것 외에는 길이 없지 않나.

‘내 아들이 쓰레기라니. 내 아들이 강제로 쓰레기가 되다니,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작가의 말

고구마파트는 다 끝날 때까지는 연참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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