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파리 해군 군축 조약(2)
편의상 파리 해군 군축 회의라고 이름이 붙었지만, 프랑스 정부는 회의장으로 베르사유 궁을 제공했다.
그리고 베르사유 궁에서는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프랑스, 미국,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가 각각 20:20:19:17:14:12의 비율로 전함을 보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 20:19:19:17:14:14의 비율이 적합하오!”
“우리가 당신네 조난자들도 구해줬는데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맙시다.”
“그건 감사할 일이지만 그거랑 이거는 엄연히 별개요.”
“차라리 함선 숫자를 정합시다, 프랑스 20척, 미국 20척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프랑스 제국은 현재 보유한 10척에 건조가 계획된 6척을 더해 총 16척의 주력함을 보유할 예정입니다.”
“미합중국은 현채 전함 12척을 건조할 계획이 있습니다.”
“대영제국은 현재 보유한 7척에 3척을 늘려 10척의 전함을 보유할 계획이 있습니다.”
“중재안을 제안합니다. 인터라켄 조약에 의거, 영국의 전함 총 배수량은 프랑스의 95%로 제한됩니다. 따라서 프랑스는 16척, 영국은 12척을 보유하되 영국 전함의 배수량 총합을 프랑스 전함의 총계의 95%가 되도록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미합중국 역시 전함을 12척을 보유하되, 개함 배수량에 한도가 없도록 하는 예외 적용을 요청합니다.”
“북독일 연방은 12척의 전함을 보유할 계획이 있습니다. 영국과 동일하게 프랑스 전함 배수량 총계의 85%에 해당하게 그대로 상계하는 것을 요청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부외자에 가까웠다.
일단 전함 보유 주장이 인정받으려면 자국이 그만한 경제력을 가졌으며 기공은 했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모두 경제적 문제로 건함은 생각조차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문제는 프랑스 제국에서 안티아와 루치아라는 이름으로 건조 중인 전함 2척입니다. 러시아 제국이 프랑스 제국에서 구매하기로 계약이 체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러시아 제국에 4척의 전함을 판매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만일 러시아 제국이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여 계약이 파기될 경우, 해당 전함들에 대한 우선협상권은 미합중국에 귀속된다는 계약이 있습니다. 협상 이전에 체결된 계약이니만큼 전함 양도 금지 조항의 예외로 적용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전함 양도 금지 조항은 영국 등이 캐나다 같은 속국에 전함을 넘긴 뒤 자국이 보유한 전함 아니라고 발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건 이전부터 맺어진 계약이니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현 합의안을 적용하면 잔 다르크급 전함 8척씩을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이 합의안이었지만, 이에 대한 조정이 필요할 듯 합니다. 러시아 제국이 계약금을 지불하지 못하면 우선 입찰권이 미합중국에 넘어간다는 조항이 있던데, 이 경우 합의와 다르게 미합중국이 전함을 16척 보유하게 되거나 프랑스가 전함 20척을 보유하게 됩니다.”
“해당 사안이 발생할 경우, 전함을 인수하는 국가는 해당 전함을 포함해 보유한 전함 가운데 4척을 즉각적으로 퇴역시킨다는 조항을 추가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북독일 연방은 프랑스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충분히 합리적인 조정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미합중국은 프랑스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랑스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애초에 러시아가 돈을 못 내지 않는 이상 발동될 리 없는 조항이라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돈을 못 낼 지경이면 어차피 전함을 보유할 수 없었기에 별 의미 없는 조항이었다.
결국 영국과 러시아가 소극적으로 불평했을지언정,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꼬우면 니들이 돈 내면 되지 않느냐는 말에는 할 말이 없었기에.
“여기에서 명시적으로 허용하지 않은 다른 모든 주력함의 건조는 10년간 중단하며, 주력함의 배수량과 함포 구경에는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력함은 10인치 이상의 구경의 함포를 가진 모든 함선을 의미합니다. 단, 10인치 이상 구경을 가졌더라도 만재 배수량 10,000톤 미만의 함선이면 예외입니다.”
결국, 협상을 통해 6개국은 ‘이 외의 주력함은 사고나 퇴역으로 인한 대체함 건조 이외에는 건조할 수 없다’는 살생부를 만들어내었다.
물론 각국이 건조한 성녀급 전함의 수가 워낙 적었기에 살생부라기보다는 추가 건조를 막는 데에 더 의의가 있었다.
프랑스 제국은 현역인 로렌급 전함 4척, 톨롱급 전함 3척, 낭트급 전함 3척과 건조가 계획된 브레스트급 전함 6척의 보유를 인정받았다.
미합중국은 사우스캐롤라이나급 전함 4척, 컬럼비아급 전함 8척을 건조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컬럼비아급 전함이 유래 없이 거대한 전함이었음에도 묵인된 것은 파나마 운하가 완공되지 않아 미 해군의 전력이 대서양 함대와 태평양 함대로 두 동강 난 상태라 실질적으로는 전쟁이 발생해도 6척만 동원할 수 있다는 미국의 주장이 먹혀들어간 까닭이었다.
파나마 운하가 건설되고는 있었지만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는 판국에 설령 파나마 운하를 판다고 해도 8만톤급 초거대 전함이 갑문까지 써야 하는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이 각국의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현역인 넬슨급 전함 5척에 킹 에드워드 7세급 전함 2척, 건조 중인 3척에 더해 2척의 가칭 엘리자베스급 전함을 배수량 제한 내에서 더 건조할 권리를 얻었다.
북독일 연방은 현재 보유한 2척의 프리드리히급 전함에 이어 10척의 전함을 배수량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건조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협상장에서 제출할 만한 건함 계획이 없었기에 주포 구경 16인치 이하의 전함 8척을 자율적으로 건조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한편, 러시아의 경우 임시명칭 안티아급 전함을 러시아 제국의 전함으로 인정해, 주포 구경 16인치 이하에서 4척의 전함을 자체적으로 건조할 권리를 얻었다. 안티아급 전함이 대금 지급 문제로 타국으로 넘어갈 경우 에스컬레이션 조항을 적용, 8척으로 늘릴 수 있었으나 그 누구도 다 만든 전함의 대금을 대지 못할 상황의 러시아가 다른 전함을 건조할 재력은 있다고 보지 않았기에 사실상 무의미한 조항이었다.
- 이 함선들 이외의 모든 주력함은 10년간 신건조가 금지되며, 만일 건조하고 있다면 폐기해야 한다.
항공모함에 대한 규정은 없었는데, 이는 항공모함의 개념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주력함은 10인치 이상의 주포를 단 만재배수량 10,000톤 이상의 함선으로 규정한다.
이는 대구경 구포를 단 극소수의 모니터함 외에는 모두 주력함으로 취급하는 것, 즉 전함을 건조해놓고 구축함이나 순양함입네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동시에, 항공모함의 건조를 고려하고 있던 프랑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조항이었다. 10만톤급 함선을 만들든 1만 톤급 함선을 만들든 간에 주포가 10인치가 안 되면 주력함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항공모함에 다는 포가 커 봐야 5인치 대공포일 것이라는 걸 아는 입장에서는 항공모함의 보유수 제한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 시기에는 항공모함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개념조차 잡히지 않은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본 조약은 15년간 유효하며, 추후 협의를 통해 갱신할 수 있다. 본 조약을 탈퇴하고자 하는 국가는 5년 전에 통고해야 한다.
탈퇴하는 국가가 발생할 경우 타국에게 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 삽입된 조항이었다.
그 와중에도 조금이라도 더 이득을 보려고 으르렁거리는 상황이 지속되었지만, 일단 보조함의 경우는 추후에 논의하기로 하고 주력함 부분만 합의한 각국은 합의안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
그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온갖 의전, 행사 등이 그 본질을 포장하기 위해 이어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행사 가운데에는 고위급 인사들 간의 무도회도 있었다.
상대의 손을 잡은 샤를 황태자는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춤을 추는 상대, 러시아 제국의 황녀 아나스타샤는 그 크고 푸른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격조했네요. 편지만으로는..... 많이 아쉬웠는데 말이죠.”
“저 역시 그랬습니다.”
샤를은 부드럽게 리드하면서 그녀와 눈을 맞췄다.
“이번 조약이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인간 이성의 승리라고요.”
“그 말을 믿으십니까?”
“글쎄요, 전 회의장까지 가지 않았거든요.”
격을 맞추기 위해 황족 하나를 보내야 할 때 지원해서 오긴 했지만, 해군에 대해 아는 게 없는 황녀가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실질적인 협상은 해군 장성들과 외교관, 기술관료들이 다 처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렇다는 말씀은 드리기 어렵겠습니다.”
서로 조금의 이득이라도 더 보려고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깃장을 놓던 모습을 회의장 한가운데에서 생생하게 본 황태자로써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보조함 제한이 1만 톤 이상에 10인치 이상의 포를 달고 있는 함선으로 정해진 것도 러시아가 강력하게 반발해서입니다. 러시아는 정작 자국이 크게 양보했다고 선전했지만요.”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요?”
“현재 러시아 해군에서 가장 큰 함선이 12인치급 7천 톤급의 독일산 장갑순양함 2척입니다. 그 외에도 대구경 주포를 단 4천 톤급 순양함도 4척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아나스타샤는 잘 모른다는 듯 입술을 오므렸다.
“만일 저희가 요구했던 것처럼 모니터함 정도나 제한을 벗어날 수 있도록 1000톤급 이상의 10인치 이상 포를 단 함선을 주력함으로 넣었다면 이 방호순양함과 일반 순양함들도 꼼짝없이 제한에 걸립니다. 그렇게 될 경우 러시아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함선을 폐기하거나, 아니면 협약에서 양보를 할 수밖에 없지요.”
“...... 그런 게 현실이군요.”
“인간 이성을 통한 위대한 평화 같은 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주 말씀하셨죠, 평화는 없고, 오직 전간기 뿐이라고.”
평화의 끝에는 반드시 전쟁이 있고, 전쟁의 끝에는 평화가 있다. 영원한 전쟁이 없듯이 영원한 평화도 기대하지 말라고 황제는 조소했다.
그녀가 뭐라 답하기 전에 음악이 끝나고 파트너를 바꿀 시간이 되었다.
그러자 한 여인이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 러시아 황녀와 제법 즐거워 보이시네요?”
“아, 그저 안면이 있는 사이일 뿐입니다.”
“정말요?”
묘한 미소를 지은 북독일 연방의 공주는 리드해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곧장 황태자는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정의 온도가 명확하게 다르다는 것을.
‘....... 결국, 난 2등일 수밖에 없나?’
내심 씁쓸하게 웃은 공주는 황태자의 리드에 몸을 맡겼다.
음악은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