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파리 해군 군축 조약(1)
중국 내전은 가면 갈수록 커져갔다.
프로이센은 청의 유지를 바랐고, 영국은 뒷공작을 통해 중화민국을 지원했다.
거기에 아일랜드와 네덜란드, 러시아 등이 각자의 이유와 이득을 위해 끼어들면서 중국은 순식간에 각국의 대리전 장소로 변해버렸다.
심지어 각 지역의 군벌들도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외세들과 손잡으면서 한 치도 앞을 볼 수 없는 난세가 시작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고 앨버트 왕자가 즉위했으며, 미국에서는 사상 최대의 전함 건조 제안이 나왔다.
미합중국 상원의원 틸먼 의원이 제창한 ‘최대 전함(Maximum Battleships)’ 계획.
해군성 내에서는 가칭 컬럼비아급 전함이라고 이름이 붙은 이 전함은 배수량이 무려 8만 톤에 16인치 50구경 함포를 6연장으로 4기나 장착하거나, 동일한 함형에 18인치 50구경 3연장 함포 1기와 18인치 50구경 연장 함포 5기로 총 18인치 13문을 장착하는 계획안이었다.
한편, 영국과 러시아는 중화민국이 청국을 멸망시키고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군림하게 될 경우, 이들과 제휴하는 계획안을 수립했다.
***
파리, 프랑스.
“두 시간 전, 영국군이 지브롤터를 인계받았습니다.”
“아쉽게 됐군.”
저놈들이 그걸 기어이 다 낼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조기완납으로.
영국이 배상금을 못 내면 아예 지브롤터의 조차기한을 계속 늘리려고 했는데, 그걸 기어이 완납해버리냐 어떻게.
아무튼 간에 지브롤터를 뺏어온 게 명분상 배상금의 담보였으므로 배상금을 다 냈으면 돌려줄 수밖에 없다.
독일 놈들도 배상금은 마찬가지로 완납했다.
“미국인들의 독자적인 잔 다르크급 건조에 대해 검토했습니다.”
“결론은?”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합니다. 시행착오를 몇 번 거치다 보면 충분히 자체적인 전함 건조가 가능합니다.”
“그러면.....”
“미국과 협상하는 게 낫습니다.”
어차피 미국이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는 꼴을 보느니 미국의 기술력을 흡수하고, 겸사겸사 미국의 군비증강에 제약을 걸자는 주장이었다.
“..... 미국과 협상 자체는 한다. 대신 조건을 조금 바꿔야겠군.”
“뭘 하시겠습니까?”
“해군조약.”
“예?”
“영국과 독일에 걸어놓은 목줄에 더해 미국에도 목줄을 걸어야겠다, 물론 미국 혼자 목줄을 건다면 받아들일 리 없으니, 전 세계적인 협약이 되어야겠지.”
전 세계 각국이 모두 드레드노트의 건조기술을 획득했다면 그 다음은 국력 싸움이다.
이미 영국과 독일, 미국 등은 전함을 만드는 법에 대해서 가닥을 잡았을 거고, 시간과 예산만 주면 전함들을 뽑아낼 수 있다. 당장 미국이 틸먼 전함인지 뭔지 뽑겠다고 하는 거 봐라.
8만 톤급 전함을 미국이 진짜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8만 톤급 전함이 만들어져 배치된다면 문자 그대로 태평양과 대서양의 전력 격차를 단숨에 뒤집고 프랑스 해군을 세계 2위로 밀어낼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의 산업능력을 고려하면.... 진짜 우리가 뭔 짓을 해도 미국을 못 따라잡을 가능성이 높다. 건함경쟁을 계속하다 보면 뱁새가 황새 따라하다가 다리가 찢어져서 일본제국마냥 건함비용에만 국가예산 40%를 쓰고 그럴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건 미친짓이지.’
미국이랑 군비경쟁을 하는 것만큼 미친 짓은 세상에 없다. 우리가 무슨 소련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데.... 아니, 그 소련과 중국이 결국 둘 다 미국에게 나가떨어졌다는 거 생각하면 더하다.
현재 영국과 독일이 작정하고 건함경쟁을 하지 못하는 건 인터라켄 조약을 준수하느라 그런 건데, 미국은 인터라켄 조약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이 말은 미국은 일단 결심한다면 아무런 제약도 없이 성녀급을 자기들 꼴리는 대로 양산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도록 놔두기보다는 차라리 나도 건함 못하니 너도 건함 못하게 한다는 식으로 해군 조약을 맺는 게 낫지.
“미국에 비공식적인 수단으로 알리도록, 베르사유에서 해군 군축 조약을 맺을 건데, 함선 건조 기술의 제공 전제조건으로 이 군축 조약에서 미합중국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란다고.”
***
파리, 프랑스.
전 유럽과 미국의 소집은 어렵지 않았다.
미국은 프랑스가 기술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선선히 조약 체결에 동의했고, 영국과 독일은 인터라켄 협정과 관련해 이번 기회에 그 배수량 제한을 재협상할 생각이었다.
한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해군력을 키울 여유 자체가 없었던 탓에 오히려 조약 체결에 적극적이었다. 해군 조약이 체결되면 군비를 조금이나마 아낄 수 있으니까.
그리고 프랑스 제국은 당연히 조약 체결에 찬성했다. 슬슬 군비도 아니고 단 한 척이 비용을 국가예산의 퍼센트 단위로 잡아먹는 전함의 건조비에 의회도 질려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파리 해군 군축 회담이 준비되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열차에서 내리는 빌헬름 2세를 맞이한 샤를 황태자는 빌헬름 2세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래, 빅토리아는 언제 데려갈 건가?”
“하하...”
“아니면 온 김에 두고 가도 되겠나?”
드문 농담을 한 빌헬름 2세의 뒤를 따라서 한 여성이 내렸다.
“황녀님.”
“황태자 전하, 오랜만에 뵙네요. 그간 격조했어요.”
“편지는 자주 보내드린 것 같습니다만.....”
빌헬름 2세의 강권과 나폴레옹 4세의 승인 하에 비공식적인 약혼과 같은 상태가 된 황태자와 황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타국 대표단은?”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표단은 도착해서 짐을 풀었고, 미국 대표단은 늦어져서 내일쯤 올 것 같답니다. 러시아 대표단은 출발은 했다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요.”
“굼벵이 놈들 같으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황태자는 붉은 카펫을 밟고 걸어나가면서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 해군이 북대서양에서 군사훈련을 시작했다던데, 무력시위인가? 하필 장소도 뉴욕-런던 항로 바로 근처인데.”
“아버지의 지시셨습니다. 특정 국가를 겨냥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만. 게다가 공격적 목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공격적 목적이 아니라니?”
“자세한 건 설명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해야 할 일이라고만 하셨고요.”
샤를 황태자는 씁쓸하게 말했다.
“항상 그러셨죠.”
언제나 자신들보다 멀리 보고 방향을 지시하지만, 그 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 불친절한 선장.
자기 아버지가 원래 그런 인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상금과 영토조정도 끝난 지 오래니, 이번 조약이 발효되면 인터라켄 조약도 무효화되는 거나 다름없군.”
“분명 배상금 지불과 영토 조정 문제가 끝난 지금 인터라켄 협정의 효력은 해군 배수량 제한에 한해 적용되기는 합니다.”
“이번 기회에 그 부분을 좀 적당한 수준에서 재조정할 수 있으면 좋겠군.”
사실 세계적으로 잔 다르크급을 건조할 능력을 가진 국가는 미국,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밖에 없으니 이들 6개국 간에 합의만 이루어지면 전 세계의 바다를 어떻게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뭐, 애초에 그 6개국이 합의했는데 못하는 일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1912년 4월 15일 0시 15분, 북대서양. 프랑스 해군 훈련지. 프랑스 해군 전함 로렌.
“함장님, 신호가 수신됩니다, 긴급 구조요청입니다.”
“뭐?”
하품을 쩍쩍 하면서 나온 함장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뭐야, 구조요청? 조난? MGY가 누구 호출부호였지? 무슨 함이더라....”
“RMS 타이타닉, 여객선입니다.”
“엉?”
“구조요청, 당소 MGY, 현 위치 북위 41.45, 서경 50.24, 즉시 와주기 바람, 빙산과 충돌했음.”
“북위 41.45, 서경 50.24면.....”
“현 위치에서 직선거리로 대략 32km입니다.”
“제독님 깨우고 수병들 소집해.”
“알겠습니다.”
“전속력 기동은 위험하다. 우리까지 빙산에 충돌할 수 있어.”
아무리 전함이 함포 사격을 버텨가면서 적과 싸우도록 만들어졌다지만 흘수선 아래에서 타격을 받으면 위험할 수 있었다. 어뢰 사격을 버티게 만들어놓은 벌지가 빙산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고.
물론 상대적으로 어슬렁어슬렁 가도 너무 늦지는 않을 거리였다.
“수병들 대기시키고, 부포에 조명탄 장전하라고 해, 거 참 공교롭군.”
안 그래도 예정되어 있던 훈련 중에 해난사고 혹은 적 공격으로 침몰당한 우군 함선 생존자 구조도 있었고, 이를 위해 구명정을 넉넉하게 실어둔 상황이었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함장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 해군성에서 훈련 일정을 짤 때부터 이 시기에 뭔 사고가 터질 거라고 예견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제독님.”
“함장, 무슨 일인가?”
“RMS 타이타닉에서 긴급 구조신호가 잡혔습니다. 빙산에 충돌했고 즉시 구조를 요청한다고 합니다.”
“빙산과 충돌해?”
“예, 그렇습니다.”
“함대에 탐조등 켜라고 전파하라, 우리도 빙산에 충돌할 수 있다. 함장, 구조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저희가 가면 확실합니다.”
“.... 그렇지, 우리가 가는 게 확실하긴 하지.”
고개를 끄덕인 제독은 지시를 내렸다.
“데네브에게 우리 뒤를 따라오라고 해, 나머지 함선은 투묘한 상태로 빙산 접근에 유의하면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파하고, 우리는 타이타닉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제독님. 부장! 견시 추가 배치해! 의무병과 군의관들 전부 대기시키고, 포술장! 자네는 수병들 데리고 담요 좀 걷으라고 하고 취사병들에게 따뜻한 마실 것 좀 준비하라고 해.”
“예!”
“기관실! 들리나?”
“들립니다, 함장님.”
“기관장, 기관 속도는 얼마나 높일 수 있지?”
“설계상 최고속도는 20노트입니다.”
“함 내 몇몇 필수구역을 제외한 난방과 온수 공급을 차단하고 그 동력을 터빈에 몰아주면 속도를 얼마나 더 높일 수 있나?”
“함장님, 외람된 말이지만 추천하지 않습니다. 타이타닉은 빙산에 충돌했습니다. 견시들을 증원했다고 해도 지금은 밤입니다. 최고 속도로 이동해도 위험이 있는데 지금....”
“부포는 노나? 조명탄으로 하늘을 밝히면 되잖아!”
“포술장 도로 불러옵니까?”
“찾아와, 지금 시간이 없다.”
“알겠습니다.”
***
약실이 폐쇄된 직후, 장약의 폭발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기화한 화약 가스는 부피가 증가하면서 격렬하게 탄두를 추진시켰다.
강선의 효과로 인해 회전하던 탄두는 마침내 포신을 벗어나 공중으로 사출되었다.
그와 동시에 포탄이 발화했고, 주황색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최고점에 도달한 포탄은 낙하산을 펴면서 자신을 불태우며 나오는 빛을 사방에 퍼트렸다.
“조명탄이다!”
하늘을 노랗게 빛내는 조명탄의 불꽃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