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대육군의 아카데미(2)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는 가운데 보호장구를 갖춘 이들이 주먹을 교환했다.
발차기 같은 화려한 동작은 없었다.
철저히 실전을 염두에 둔 전투였고, 단순한 뒷골목 격투가 아니라 총포탄이 날아다니는 곳에서 총을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까이 붙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비실전적인 기술은 철저히 빠진다. 참호 속에서, 뒷골목에서, 소총조차 거치적거려 기관단총을 쏴대고 권총을 쏘며 서로의 심장소리마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총검과 곤봉과 맨주먹으로 싸운다.
“흡!”
상대의 옷을 잡고 그대로 자빠트린다.
“그만.”
교관의 냉정한 목소리가 맥을 끊었다.
“실전이었으면 네 대가리가 날아갔을 거다. 264번.”
“.........”
“들어가라.”
대다수의 생도들은 이런 훈련을 하기에는 나이도, 계급도 맞지 않다. 그러나 서른이 되지 않은 소수의 젊은 생도들은 이러한 훈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아직 젊은 황태자라 한들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이곳에 앉아 있는 자들은 전선에서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자들이 아니다.
프랑스 제국군의 심장이자 미래다. 이곳에 앉아 있는 자들 가운데 장성이 몇이 나오고 별이 몇 개가 탄생할지 모를 일이다.
아니, 이미 장성은 있다. 황태자는 원수의 대우를 받으므로.
물론 이곳에서는 평등한 생도지만, 일단 원칙은 그렇다.
근본적으로 이곳에서는 계급이 없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만이 있을 뿐이다.
원칙은 그렇다.
그러나 진짜로 황태자를 저렇게 갈구는 교관은 드물다.
“퉤.”
입안에 고인 침과 더불어 마우스피스를 뱉어낸 샤를은 한숨을 쉬었다.
“젠장, 이거 굳이 배울 필요가 있나? 내가 최전선에서 주먹질할 것도 아니고.”
“세상 만사 배워둬서 나쁠 거 없습니다.”
중얼거림에 현우가 답했다. 과묵한 데다 겉도는 유학생에게 제법 흥미를 느껴 먼저 다가갔지만, 현우의 반응은 뭔가 맥을 끊어놓는 그런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중국 황실은 어때? 정말 이야기처럼 암투가 심한가? 누가 다음 황제가 될지를 놓고 하렘의 여인들이 암살자도 보내고?”
“모릅니다. 전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차, 그랬지.”
“청 황실은 손이 귀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으면 위험하고, 또한 황실 종법이 지엄하기에 그런 암투가 끼어들 여지 자체가 부족합니다. 유럽인들에게 동양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 중 칠 할은 거짓입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지만, 약간 짜증스럽게 답한 현우를 본 샤를은 투덜거렸다.
“뭔 여자애도 아니고 사람이 뭐 저리 날카로워..... 물어볼 수도 있지.”
무례라기는 부족하더라도 상대방을 밀쳐내는 화법, 고의인지 천성일지 모를 일이었다.
***
미합중국, 워싱턴 D.C. 해군부.
긴 잠에서 깨어난 대머리독수리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쿠바와 필리핀을 빼앗아 쿠바는 ‘해당국 국민들의 간절한 성원해 의해’ 준주로 받아들이고 필리핀은 식민화한 미국은 배가 고팠다.
매우 고팠다.
안타깝게도 하와이는 함부로 눈을 부라릴 수 없는 유럽 열강의 손에 먹히고, 태평양의 제해권은 내어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남미와 카리브해 침략이 개시되었지만.
그걸로는 충분치 않았다.
“앉으십시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해군의 제독들이 자리에 둘러앉았다.
“잔 다르크급 전함.”
해군성 장관이 운을 뗐다.
“프랑스의 오리지널 잔 다르크는 퇴역했지요, 하지만 프랑스는 로렌급 전함을 취역시키고, 계속해서 전함들을 증강하고 있습니다. 영국 역시 넬슨급 전함을 기획했고, 러시아는 아예 프랑스에 전함을 주문했지요, 무슨 깡으로 그럴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입니다.”
“찔러나 본 것 아니겠습니까? 프랑스가 그걸 받아줄 줄은 몰랐습니다만.”
타국의 전함 주문 및 건조는, 그것이 한물간 구식함이 아닌 1선급 군함이라면 정말 최우방국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물론 적당히 성능을 타협한 함선이라면 능력이 있는 국가라면 아무나 구매할 수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겁니다. 우리는, 영국도 마찬가지지만, 잔 다르크급의 성능을 전혀 구현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포는 가능하다, 장갑재도 가능하다. 엔진은 영국이 만들어냈다. 프랑스의 기술과 같은 종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윌리엄 파슨스라는 자가 성녀급을 운용하기에 충분한 추력을 가진 엔진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집중방호체계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전함 건조하는 데 무리는 없다.
사통장치는 없어도 거리측정 등의 기술은 있으니 협차사격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한데 묶어서 한 척의 전함으로 변하게 만들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이탈할 경우, 정말 아군이랄 게 없는 고립무원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있다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국론분열이 극심하고, 실질적으로 군사적 도움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나폴레옹 1세의 파멸을 재현하기 싫다면 나폴레옹 4세도 어느 정도 러시아를 배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독, 그럼 한 가지 묻지.”
장관이 입을 열었다.
“본래 군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되네, 그러나 정말 만약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답을 들려주고, 전부 잊어주게.”
“말씀하십시오.”
“만일 미합중국이 프랑스 제국을 지지한다면, 프랑스 제국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겠나? 그리고 그럴 경우, 그 전함을 우리 미합중국이 대신 인수할 수 있겠나?”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이번 거래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가 파탄나는 것만은 막아 보려는 프랑스 제국 수뇌부의 마지막 시도로 보입니다. 이 거래마저 어떤 사유로든 취소되는 순간, 양국은 적으로 돌아서겠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삼국동맹이 분열하면 어디 설 것 같은가?”
“황제의 성정상 프랑스 편을 들 가능성이 높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내부 사정상 전쟁에 끼어들 상황이 아니니 우호적 중립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탈리아를 감당하기도 벅차다 이거겠지.”
“장관님, 대서양 건너에서 벌어지는 일에 본국이 개입할 능력이 없습니다, 혹시나 해서 여쭙습니다만, 백악관에서는.......”
“멕시코와 또 다시 전쟁을 치르거나, 아니면 유럽의 일에 끼어들거나, 둘 중 하나는 필연이네.”
제국주의에 미국은 눈을 떴다.
그러나 세계를 돌아보니 전 세계에 미국의 깃발을 꽃을 만한 곳이 없다.
식민지가 되지 않은 국가가 없다. 식민지가 아닌 상태인 국가는 쉽사리 도모할 수 없는 열강이거나, 적어도 그들 중 하나가 노리고 있거나 보호국 신세다.
간신히 전쟁을 벌여 스페인에게서 필리핀과 쿠바를 빼앗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서쪽도 대양, 동쪽도 대양에 도달했고, 북쪽에는 영국의 자치령 캐나다, 남쪽에는 멕시코가 있지, 저 타코 놈들에게서 더 많은 영토를 빼앗거나, 아니면 영국과 전쟁을 벌여 옛 형제인 북부의 캐나다를 되찾거나.”
되찾는다.
애초에 캐나다는 미국의 형제였다. 하나되어 태어났어야 하지만, 미완으로 끝난 독립으로 인해 전혀 달라진 쌍둥이.
그렇기에 미국은 캐나다를 합병하려는 계획도 암암리에 세웠다.
워 플랜 레드를.
동시에 태평양을 통해 중국으로 진출하는 것 역시 미국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 태평양의 모든 항로는 프랑스가 꽉 틀어막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프랑스에게서 강제로 태평양 식민지를 빼앗거나, 아니면 영국에게서 캐나다를 빼앗거나.”
멕시코와의 전쟁도 방법이지만, 한계도 명확했다. 국내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명분도 그다지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둘 중 하나의 편을 들어주면서 참전 대가로 그 나라가 가진 걸 넘겨받고, 전리품으로 나머지 하나도 가지는 것이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게다가 캐나다는 영국 왕실과 내각이 프랑스를 피해 임시정부를 세운 곳이기도 하며, 현 영국 국왕의 대관식도 캐나다에서 했습니다. 상징성 때문에라도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는 의외로 순순히 포기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공들였던 알제리도 군비증강을 하느라 팔아버리지 않았소? 참전 대가로 요구하고 넉넉한 금전도 약속하면 외교적인 수단으로 넘겨받을 수도.....”
“거기까지, 그건 우리가 논의할 게 아니네, 제독. 우리는 군사적인 면만 봐야 하네.”
“솔직히 말하자면 프랑스 해군과 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왕립해군이야 이빨 빠진 호랑이가 다 되었지만, 프랑스 해군은 독보적입니다.”
프랑스 해군이 현역으로 보유한 성녀급 전함은 10척에 달한다. 영국의 경우 7척, 북독일 연방은 2척이 건조 중이거나 취역했다.
물론 개함의 성능은 다 다르지만, 일단 현재 영국과 북독일 연방이 힘을 합쳐도 프랑스 해군을 이길 수 없다.
그럼 미합중국의 성녀급 전함은?
0척이다.
물론 건조계획은 분명히 있다. 잔 다르크 쇼크 이후 4척의 성녀급 전함인 사우스캐롤라이나급 전함의 건함계획을 다급하게 세운 것이다.
문제는 그 사우스캐롤라이나급이 도면 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의회는 배수량에 제한을 걸었고, 성녀급 전함에는 기존과 차원이 다른 수준의 배수량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해군부는 의회가 제안한 16,000톤의 배수량을 넘어 2만 5천톤의 배수량을 가진 신형 전함을 허가해 달라고 드러눕고 있었고, 의회는 예산이 너무 많이 든다며 거부하고 있었다.
건함 경쟁의 초기부터 2만톤 3만톤이 가볍게 논의되자 질려버린 스페인 등 어중간한 소국들은 깔끔하게 성녀급의 건조를 포기해버리기도 했다.
전 세계에서 성녀급의 보유를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국가가 6개국, 그 중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는 국내 사정 탓에 보유를 포기하다시피 했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4개국 간의 경쟁이 벌어지는 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3개국을 현재의 프랑스는 단독으로 압도할 수 있다.
“틸먼 상원의원이 다행히도 사우스캐롤라이나급을 밀어주고는 계십니다만.”
“그 자는 우리가 이번에 사우스캐롤라이나 4척을 받고 입 다물기를 바라는 거네, 최소한 유효전력이 8척은 있어야 하는데.”
태평양에 4척, 대서양에 4척.
프랑스가 손을 떼버린 탓에 파나마 운하는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고, 순수히 미국의 능력만으로 파나마를 파낼 수밖에 없었던 미국은 인력은 청나라의 쿨리들을 이용하더라도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에 가까웠다.
당연히 태평양함대와 대서양함대는 상호연계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신형 전함을 제대로 운용해서 한 척씩이라도 일선에 내보내려면 함대마다 4척이 필요했다.
거기에 돈이 얼마나 들지를 생각해보면 악몽이지만.
“파나마를 빨리 뚫든, 아니면 성녀 아가씨 8척을 건조하든 어느 쪽이든 해주지 않으면 본토의 방위를 절대 보장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야 해. 우리가 가만히 있으니 무시당하잖아! 육군 놈들이 협조만 잘했어도.....”
“땅개들도 나름 고생이랍니다. 이번에 도입한 프로이센제 권총 문제 때문에 말입니다.”
“그건 왜?”
“그 필리핀이랑 중국에서 마약 빨고 달려드는 놈들이랑 총질하다가 땅개들 권총이 너무 약해서 땅개들 여럿 죽어나간 사건 관련해서 신규 도입된 루거 권총이 작동불량이 너무 잦다고....”
소소하지만은 않은 역사의 개변이었다. 프랑스 제국이 브라우닝을 데려가면서 미국에 브라우닝의 무기가 풀리지 못했고, 외화벌이에 혈안이 된 프로이센 정부의 지시를 받은 DWM은 미국 정부에 막대한 로비 끝에 무기들을 팔며 브라우닝의 자리를 채워나갔다.
30-03 스프링필드 탄이 제식채용 1년도 안 되어 써먹을 수가 없는 구식화가 되어버리고, 바로 그 해 벌어진 미국-멕시코 국경 분쟁에서 독일제 소총과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멕시코군에게 구닥다리 스프링필드 M1873 따위로 무장한 미군이 훨씬 많은 머릿수로 공격했다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는 사건이 벌어지자 충격받은 미 육군이 개인화기와 공용화기를 대대적으로 교체하자 7.92mm 마우저 탄을 그 자리에 밀어넣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기존의 개틀링 포와 리볼버를 밀어내고 맥심 기관총과 루거 권총을 밀어넣은 것 역시 미국-멕시코 국경분쟁 당시의 충격과 DWM의 로비를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루거 권총이 작동불량이 잦은데 이게 땅개 놈들이 DWM에 뇌물을 배터지게 쳐먹고 나서 채용한 물건이라 그놈들이 뽕을 뽑는다고 원가절감을 해서 생긴 문제냐 아니냐, 애초에 설계가 잘못된 물건을 채용한 거 아니냐 어쩌냐 해서 의회에서 제법 시끄럽답니다. DWM은 당연히 병사들이 잘못 다뤄서 그렇다고 발뺌하고, 스프링필드 조병창이 이번에 작정을 했더군요.”
“개망신을 제대로 당했으니 당연히 독이 올랐겠지. 우리 알 바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남북전쟁 이래 장비에 투자를 거의 안 한 연방정부의 잘못이기는 했다. 오죽하면 프랑스의 전차도 제대로 못 베껴서 다포탑전차와 탱켓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트윈포탑에 기관총만 포탑당 하나씩 달린 경전차를 제식이랍시고 채용했겠는가.
남은 75mm 포 단 전차를 실용화하는 판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