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새로운 바람(5)
프랑스 제국이 이스라엘에 재규어의 판매를 승인한 이유는 간단했다.
재규어를 기반으로 개발되고 있던 단포탑, 단포신 전차, 폴테아가의 양산준비가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톤급 전차에 최고속도는 시속 42km, 4인승에 대전차전을 염두에 둔 75mm 주포 1문, 브라우닝 경기관총 4정으로 무장했지만, 여러 선진적인 개념들이 더욱 중요했다. 서유럽은 워낙 언덕지형이 많기에 이에 대응해 헐 다운 전술을 군의 기본 교리에 넣은 프랑스군은 요구사항에 부각을 15도까지는 확보할 것, 3인용 포탑에 잠망경이 주포와 연동될 것, 필요하면 전차장이 포탑을 움직일 수 있을 것 등을 요구사항에 넣었다.
물론 설계방식이 아직 구식인 건 어쩔 수 없어서 운전수용 차체기관총 1정 외에도 전방 공축기관총 2문, 포탑 후방에 전차장용 기관총 1문이 달리는 등 기관총을 도배해놓았지만, 그런 걸 감안해도 차고 넘치도록 고성능이었다.
아직 달리지는 않았지만, 무전기 역시 충분히 성능이 개량되면 달 수 있도록 설계에도 여유가 있었다.
무전기는 이미 개발되어 있다. 189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물리학자 굴라엘모 마르코니에 의해 개발된 무선전신기는 엄청난 속도로 개량되고 있었다.
그게 전차에 탑재될 정도냐고 하면 아직은 아니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탑재할 수 있을 터였다.
프랑스군의 혁신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해군은 조기퇴역이 고려되고 있는 잔 다르크를 강제로 끌어내 비행갑판을 깔고 항공기 이착륙을 시험하는 중이었다.
물론 항공전함이 그다지 좋은 건 아니지만 아직 항공모함이라는 개념도 제대로 안 만들어졌으니 항공모함에 필요한 여러 제반사항들을 연구하려면 기존 군함을 끌어다 써야 하고, 골병드신 성녀님은 이런 실험에 딱 맞았다. 마침 후속함급들도 속속 건조되고 있으니, 능파성과 복원성이 너무 떨어져서 원양작전이 불가능한 반쪽짜리 전함은 슬슬 퇴역시켜 드려야지.
좋은 철강은 비싸고, 전함 주포, 엔진이나 사격통제장치도 그렇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면 아마 성녀님은 아주 잘게 분해된 다음 장갑판, 용골 등은 싹 용광로로 가고 사통장치나 엔진 등은 검사 후 하자 없으면 재활용되지 않을까? 그 용광로에서 녹은 것도 다음 군함을 위해 아낌없이 쓰일 거고.
“그리고 정밀공업도 상당히 나아졌잖나?”
“그건 사실입니다.”
정밀기기 생산에 드는 품도 내가 일궈낸 혁신 덕분에 굉장히 줄어들었다. 전생의 은사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려야지.
“그러니 이제 슬슬 신무기 생각도 해야 하지 않겠나?”
“또 뭘 더 만들라고 그러십니까.”
“지난번에 참호전용 권총탄 기관총보다 나은 걸 만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아직 결과물 안 나왔지?”
“아직 시작도 못 했습니다! 설계도는커녕 개념도도 없단 말입니다!”
일 작작 시키라며 파업할 기세인 브라우닝에게 나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크흠, 그게 아니라, 내 말부터 좀 들어보게.”
“돈을 많이 주면 뭐합니까! 그 돈 쓸 시간 좀 주십시오! 집 천장 무늬가 가물가물하단 말입니다! 요즘 연구소에 침대 하나 갖다놓고 거기서 눈 붙이는 거 아십니까? 출퇴근 시간 아끼느라요!”
“이번 건만 끝내면 휴가 주겠네! 진짜로!”
“진짜입니까?”
“그래, 진짜, 휴가 주겠네, 각서 필요한가?”
“....... 써주십쇼. 근데 그 이번 건이 뭡니까? 말씀드리는데 신형 전함용 주포 그런 거면 파업 들어갈 겁니다.”
“소총이네. 자동소총, 뭐가 팍 땡기지 않나?”
“..... 소총이면 이미 있잖습니까, 뭐 불만이라도 나왔습니까?”
“그거와는 체급이 다르네.”
브라우닝 반자동소총, 그래, 그거 잘 써먹고 이제 와서 뭐라 그러면 좀 그렇기는 한데, 사실 하자가 제법 있다.
일단 이놈은 체급이 볼트액션급이 아니다. 한 마디로 개런드보다는 카빈에 더 가까운 놈이라는 거다. 그래서 자동화 개조가 제대로 되었느냐 하면 자동화기로 개조하면 명중률이 그야말로 형편없어져서 문자 그대로 총알분무기로 쓰는 게 아니면 별로 의미가 없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반자동으로 쏘고.
아무튼, 기존의 브라우닝 반자동소총은 후방의 비전투병력에게 돌리고, 그 자리를 대체할 무기가 필요했다.
분대마다 기관총 한 자루씩 들려주고 자동소총도 분대원 전원에게 들려주면 시가전에서 엄청난 화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다. 이미 탱크가 나온 이상 참호전은 이제 안녕이고, 볼트액션 소총이 설 자리는 저격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이 탄약을 사용하는 총을 만들어주면 좋겠네.”
“.... 이 탄약도 실제 있는 건 아니죠?”
“규격은 다 정해줬잖나. 디자인도 해 줬고....... 그냥 구현하기만 하면 되네.”
프랑스의 정밀가공기술이 확 올라간 상태니까 이런 제안이라도 하는 거다.
“규격은 7x43mm..... 가스 작동식에 유효사거리 700m, 중량은 3.5kg 미만, 전장 890mm 미만, 탄창은 20발에....”
“여기 보면 내가 그려놓은 청사진도 있네. 영국 놈들의 기술이 조금 들어갔는데, 뭐, 영국놈들은 정식채용 안 한 물건이지, 이걸 쓰면 총열 길이를 유지하면서 소총의 길이도 단축할 수 있네.”
시가전에서 휘두르기 좋아지겠지, 참호에서도.
“재장전이 불편할 것 같습니다만.”
“그건 감수해야지, 사실 그놈들도 그래서 채용 안 했다고는 하더군.”
불펍 구조는 의외로 1866년 영국의 조지프 커티스라는 양반이 만들어낸 구조다. 그리고 1901년에 최초의 불펍 소총이 역시 영국에서 등장했으니 진짜 따끈따끈한 기술이지.
“이런 지옥 같은 동네인 줄 알았으면 그때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오지 않았을 겁니다.”
“하하, 그래서 가족들은 잘 지낸다는가? 프랑스로 부르지 그러나.”
“형제들에게 원망 듣기 싫습니다. 제 형제들도 부르면 똑같이 야근시킬 것 아닙니까?”
“일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데 그 총량을 1/n이 될 테니 자네 몫의 일이 그만큼 줄어들 거라는 생각은 아닌가?”
“유혹하려 들지 마십시오. 가족들에게 평생 저주당하기는 싫습니다.”
“이번 연구 끝나면 3년간 휴가 주겠네, 어디든 가게, 남프랑스? 아니면 태평양 식민지?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이 그렇게 좋다던데 말이네, 아니면 뉴질랜드로 가고 싶나?”
“그쪽은 아직 치안이 불안하잖습니까.”
“아무튼 간에 어디든 가게, 자네 신분은 프랑스 정부가 보장하고 있다는 것 잊지 말고. 아니면 몰디브도 좋겠군, 이스라엘 정부에게 요청하면 바로 특별......”
“거기 가면 쉬는 게 아니라 일하게 될 것 같습니다만. 제가 알아서 쉬겠습니다.”
자꾸 등 뒤에서 악마가 어깨에 손을 얹는 느낌이 든 브라우닝 백작은 발작적으로 어깨를 털었다.
***
아버지는 어떤 결론을 내리셨을까.
그런 의문을 품은 채 황태자는 파리로 돌아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보다 며칠 전에 받은 기억이 더욱 선명했다.
“정신차려라, 샤를.”
한숨을 내쉰 샤를은 제 뺨을 몇 대 쳤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동맹, 정말 실현된다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초유의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러시아 위협론을 내세우며 선동하고 반영 감정을 끓어오르게 할 만한 사안이 발생하면 충분히 가능할 법도 한데.’
반영, 반러 감정을 동시에 끓어오르게 하면서 독일에 대한 여론을 잠재울 방법? 그딴 걸 그가 어떻게 아는가.
아버지라면 모를까 그는 아직 그런 분야를 생각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군권과 외교권만 빼고 다 넘겨준 상황에서도 정치력과 인기만으로 사실상 내각의 인사권까지 행사하고 있는 게 아버지 아닌가.
군권, 외교권, 인사권까지 합하면 사실 아버지가 누리는 권력은 독일의 빌헬름 2세가 누리는 권력에 못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프랑스 황제라는 직위가 정통성이 떨어지는, 취약한 지위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프랑스 황제, 프랑스의 제 1시민은 왕이 아니다, 왕이 되어서도 안 된다.
덕분에 왕은 받는 면세 특권 등등도 웃기게도 황제는 못 받는다.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러시아처럼 사실상 황제=왕 취급받는 나라에서는 그래도 되는데, 프랑스는 그러면 안 된다.
애초에 황제라는 직위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로마 제국이 개창할 때 옥타비아누스가 호민관 특권에 임페리움을 합쳐 세습한 것이 원조다. 전제군주와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아버지 전에 있었던 두 황제 역시 그 지위가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먼저 프랑스의 첫 번째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경우 쿠데타로 얻어낸 종신 통령의 권한과 황제의 권한이 다르지 않았다, 한편 할아버지의 경우, 이미 본인의 권위 손상으로 인해 원 역사보다는 못해도 의회에 많이 양보를 한 상태였다.
예를 들자면 과거에는 행정권, 사법권은 명시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입법권 역시 의원 후보자를 정부 입맛에 맞는 이들만 후보자로 받아주고 선거를 한 탓에 사실상 황제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실정이 이어져 자유주의 세력이 반등하자 입법권은 아예 놓아줘야 했고, 사법권과 행정권도 상당수 위임해야 했기에 아버지가 제위를 물려받을 때는 이미 후보자 추천권을 상실함에 따라 입법권은 완전 상실, 사법권도 대부분 상실에 행정권도 크게 가질 수 없었다.
게다가 본인 지지층 중에 자유주의 세력이 대다수였던 탓에 아버지도 크게 타협을 하셨어야 했고, 면세 혜택을 시작으로 여러 권한을 포기한 것은 결국 국민의 철저한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대타협이었다고 알고 있다.
아버지 왈 전 국민을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확보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나. 콘크리트 지지층이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그 맥락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그든, 아버지든 결정을 강요받을 때가 올 것이다.
언제가 되었든 간에.
‘아나스타샤.’
샤를은 왜인지 입 안에 맴도는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
“타는 불꽃을 얼어붙게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신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을 한 이들을 위해 도망칠 길을 열어줄 만큼 자비롭지 않기 때문이다.”
멋진 문장이다.
나중에 써먹어야지......하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내가 그걸 써먹을 일이 이번 생에 딱히 있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문이 느껴졌다.
‘신이 없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여기로 날 날려버린 걸 보면 신은 분명 있긴 있을 거다. 적어도 그에 준하는 존재는 있겠지.
그게 천주교에서 말하는 신과 같은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행동을 조심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다.
잠시 딴 생각에서 현실로 돌아와 보면, 지금 내 골치를 가장 썩이는 건 당연히 독일 문제다.
저놈들이 뭔 생각으로 동맹을 제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성사되면 확실히 이득이다.
독일의 공업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고, 무엇보다 우리 피보다 앞서 독일인들의 피를 흘릴 수 있다. 전쟁 나면 러시아의 공세를 정면으로 받아쳐야 하는 최전선이기도 하고. 뭣보다 지금 쪼개진 상태라 뭐라 하긴 그래도 일단 남독일 북독일 합친 게 우리보다 인구 훨씬 많고, 인구증가율도 아직은 쩔어주지 않나?
사상자도 원 역사 1차대전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고, 그러면 뭐 결론 나왔지. 우리 대신 좀 죽어줘야지. 우리는 뒤에서 미국처럼 보급이나 담당하고 원정군 보내서 꿀이나 빨면 되지 않을까? 설마 자기네 앞마당인 동프로이센이랑 그 너머인 러시아에서 싸우는데 우리더러 주력이 되어서 싸우라는 개소리를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려면....... 이류로 굴러떨어진 영국은 차치하고 러시아 위협론이 강력하게 대두되어야 한다. 실제로 그게 가능한 건 냉전기에 와서 러시아를 그만큼 경계하게 된 뒤에나 가능했으니까.
‘어디 전쟁이라도 나서 러시아가 크게 이겨주지 않으려나.’
물론, 어디까지나 그냥 해본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