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75화 (75/200)

75화 새로운 바람(4)

“이것은 기회다.”

프로이센군의 군복을 차려입은 여러 장성들 사이에서 빌헬름 2세가 발언했다.

“러시아 놈들의 탐욕과 후안무치함을 전 유럽이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러시아와 싸우려면 누구의 협력이 필요하겠는가? 우리다. 우리 프로이센만이 저 타타르 놈들의 망동을 막을 수 있다.”

지리상으로도 그렇고, 빌헬름 2세의 생각으로도 그랬다. 아니, 융커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프로이센이 어떻게 태어난 국가인가. 그 전신은 동방식민운동을 위해 세워진 튜튼 기사단국이었다. 고대 기사단의 후예인 그들은 마땅히 저 슬라브인들에 맞서는 전선에서 선두에 설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민간과는 다르게 프로이센의 수뇌부인 융커들은 의외로 삼국동맹 중 러시아를 제외한 국가들에 대한 적개심이 크지 않았다.

남독일 연방은 애초부터 그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곳이 아니었다. 당장 원 역사에서도 독일 제국을 선포할 때 빌헬름 1세는 마뜩찮아했지만 비스마르크가 밀어붙였다.

빌헬름 2세 역시 그게 이미 자기 손에 들어온 대상이라면 모를까 굳이 남독일 연방과 전쟁을 하면서 통합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통일되어야 한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도 전쟁을 해야 하지 않던가? 굴러들어온다면 모를까.

프랑스도 마찬가지, 프랑스는 서부 영토를 제법 떼어갔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프랑스 입장에서도 권리를 주장할 만한 영토이기는 하다. 나폴레옹의 후예가 된 입장에서는 더더욱.

사실 애초에 제국 서부와 동부는 그야말로 다른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제국의 실권을 틀어쥔 융커들은 제국 서부를 군대 유지비 대고 돈 내놓으라면 내놓고 탄약과 식량, 무기 생산하는 후방 공장 취급을 했고, 서부의 자본가들은 융커들의 전횡에 뒷목을 잡고는 했다.

그런데 라인 강 서부가 통째로 떨어져나갔다.

물론 그게 독일이란 국가에 있어 제법 아픈 건 사실이어도 치명상까지는 아니라는 게 융커들의 생각이었다.

쾰른을 비롯해 주요 공업지대의 능력이 3분의 2에서 절반까지 떨어졌지만, 일단 라인 공국은-명색이 공국이지 아직 대공을 어느 가문의 누가 맡을지도 확정되지 않아 공석이지만-독립국이기에 프랑스도 독립보장은 했을지언정 함부로 라인 공국에 군을 배치할 수도 없으니 라인 서쪽보다 동쪽에 오히려 더 많은 공장지대들이 직접 포화에 노출될 일은 적다. 작정한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시간이 소모되고, 프로이센군이 방어선을 갖추기에는 충분하다.

물론 라인 강 이서가 통째로 날아간 것에 대해 제국 서부를 장악한 자본가들은 그야말로 펄펄 뛰었지만, 제국의 심장인 동부에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서부 놈들 사정은 별로 알 바 아니었고 설령 잃은 땅이 요충지라고 해도 다음 전쟁에서 이겨서 탈환해오면 그만이지 않은가.

동부와 서부의 유리는 분명 제국 내부에 심어진 심각한 종양이지만, 적어도 황실을 중심으로 한 프로이센 융커들이 군권을 비롯해 권력이란 권력은 모조리 틀어쥐고 있는 한은 심각하게 번질 일은 없었다.

“요즘 영국이 이상하게 러시아와 친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건 모두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배신자 라이미 놈들 같으니.”

독일이 영국을 배신자라 부르는 건 다른 게 아니었다.

1년전쟁으로 인해 함선의 총 배수량에 제한이 걸리기는 했지만 아무튼 해군 양성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영국 내에서 잔 다르크급의 유사품을 연구하고 있다고 해서 프로이센은 당연히 그 자료를 나눠달라고 했다.

어차피 조약을 준수하자면 영국과 독일은 힘을 합쳐야 프랑스 해군을 견제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당연히 프로이센에서도 잔 다르크급을 건조할 수 있어야 하니 동맹으로써 못할 요청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 입장은 달랐다. 어차피 전함을 사고파는 게 드물지 않은 시대, 그냥 영국이 건조할 테니 전함은 영국에서 사서 쓰라는 거였다. 겸사겸사 장사를 해서 국가를 복구할 돈을 버는 건 덤이었고.

당연히 이를 지시했던 빌헬름 2세는 물론이고 독일 조야가 발칵 뒤집혔고, 영독동맹은 삽시간에 파탄 직전까지 몰렸다. 그나마 독일 국내에서의 반대여론 등으로 인해 동맹 파기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과거처럼 대할 순 없었다.

여기에서 격렬하게 반대한 게 독일 서부 자본세력들이었으니 융커들 입장에서는 서부 놈들이 곱게 보일 수가 없었다. 물론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영국과 제법 깊게 얽혀 있는 판이었으니 영국과 손을 끊으면 보통 손해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융커들 입장에서는 국가가 모욕을 당했는데 제 잇속만 챙기는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북독일 연방은 작금의 문제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해결책을 고려하게 되었다.

동맹국 하나 없이 유럽에서 고립되지 않기 위함이었고, 그 길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다름아닌 프랑스와의 불가침조약이었다.

***

불야성(不夜城)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듯, 엑스포장은 밤늦게까지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고요한 장소는 있었다.

풀밭 한가운데에서 달아오른 뺨을 찬 바람에 식히던 황태자는 몸을 돌렸다.

“프랑스의 황태자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입니다.”

그러자 풀숲에 있던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디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녀는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제 이름은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전슬라브의 차르 니콜라이 2세 황제 폐하의 외동딸이며 그분의 외아들 알렉세이 황태자 전하의 여동생이 됩니다. 황태자 전하, 수행원도, 경호도 없이 여기 계시다니, 너무 위험한 행동이 아닌가요?”

“....... 황녀님도 피차일반이신 듯 합니다만.”

황태자의 답에, 그녀는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듯 웃었다.

“여기는 왜 오셨습니까? 수행원들이 염려할 겁니다.”

“뒤를 밟았죠, 어딜 가는 걸까 궁금해서요.”

“..........”

“무례하다고 생각하셨나요?”

“일반적인 시선에서는 충분히 무례합니다. 그리고 이국에서 쓸데없는 추문이 생기면 황녀님은 곤란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소녀, 아나스타샤는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요, 일단 우리는 동맹이 아니던가요?”

“동맹.... 예,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그것과 이것은 또 다르지 않습니까.”

삼국동맹은 유효하다. 아직은.

그러나 그녀는 싱긋 웃었다.

“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일단 제 입장에서 봤을 때, 저와 눈이 마주치시자마자 자리를 비우신 것부터가 실패하셨다고밖에 할 수 없겠군요.”

“그런가요.”

그녀를 본 순간, 미친 듯이 가슴이 뛰었다.

그 외의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뭐, 저도 완벽히 실패했지만요.”

“예?”

“따라나와 버렸잖아요? 수행원들도 떼어놓고요.”

그녀는 나른한 듯한 눈동자로 눈웃음을 지었다.

아직 아름답다기보다는 귀엽다는 인상이 많이 남아 있는 소녀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물론 애초에 제 마음대로 하는 짓이니 실패나 성공을 따질 것도 없긴 하지만요.”

“........”

“소문이 나 버린다면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으시겠죠, 저를 영국 왕비로 만들어주려고 준비하고 계셨는데 말이죠.”

“필립 아서 프레드릭 왕세손입니까?”

“글쎄요?”

“그걸 제게 말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변덕이죠, 어쩌면 약간의 장난일 수도 있고요.”

오라버니는 제 장난에 학을 뗀답니다?

아나스타샤의 약간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샤를은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번 행사를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야트막한 언덕 위는 불야성의 베를린에서 유일하게 별빛에 휩싸일 수 있는 곳이었다.

파도. 샤를이 아나스타샤에게 받은 인상이었다.

그녀의 장난기와 수다 등으로 포장된 감정은 파도가 되어 해안가의 모래사장에 서 있는 샤를의 발치를 간지럽혔다. 그런 그녀의 천성을 막으려면 파도치는 바다조차 얼려버릴 강렬한 추위가 닥쳐와야 하리라.

바다조차 겨울 앞에 얼어버리는 동토에 세워진 제국에서 온 황녀에게 이러한 비유를 하는 것도 우습긴 했지만. 바다를 갈망해온 제국의 황녀라고 생각하니 제법 어울리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물론 해외에 나온 황족들의 행동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죠, 그걸 면하려면... 모든 게 한 차례 무너진 뒤에나 가능하겠죠, 나폴레옹 1세가 세상을 뒤집어놓은 뒤처럼요, 하지만 전 장난기도 많고 어린걸요?”

물론 그녀는 북독일 연방의 공주보다 1살밖에 어리지 않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의 일탈은 용납받을 수 있답니다.”

아나스타샤는 뛰는 가슴을 지그시 내리누르며 이야기했다.

***

이스라엘 공화국, 인도 아대륙.

이스라엘은 여러 특수성을 가진 국가다.

수백 년간 천대받던 유대인의 민족국가지만, 일단 여러 문제가 있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분명 유대인들의 국가고, 최근 100년 내에 이주해온 유대인만이 아니라 기존에 인도에 살던 유대인들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 수가 기존에 살고 있던 인도인들을 넘지는 못했다.

게다가 협정에 따라 국경주권을 지킬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독립 이후 항구 이용권을 영국에 99년간 내준 게 문제였고, 그게 아니더라도 열강에 의한 압력을 신생국인 이스라엘이 쉽게 막아낼 수 없었다.

덕분에 일부 국가들에서는 골칫거리로 생각하는 이민족들을 대거 추방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집시였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상당수가 이주를 통해 사라지자 민족주의자들의 집단 폭력성의 타겟은 유대인들과 똑같이 뒤를 봐줄 정부가 없는 집시로 옮겨갔다.

그리고 사회 혼란을 바람직하지 않게 보고 있던 열강의 정부들은 프랑스가 예전 프랑스령 인도에 유대인들을 짬처리했듯이 이번에도 국경 주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스라엘로 집시들을 공권력을 이용해 대거 추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유대인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자체적인 군대도 없이 프랑스에 국방을 위탁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반발을 해 봤자였다.

물론 자체적인 치안조직 정도는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택도 없었던 유대인들은 기존의 치안대를 기반으로 자체적인 군대를 양성할 준비를 시작했고, 프랑스에 요청을 넣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 답이 돌아온 날이었다.

“귀관이 책임자인가? 베르트랑이라고 불러주게.”

“이스라엘 공화국의 까뮈 중장입니다.”

“유대인식 성은 아니구려.”

“유대인은 애초에 모계사회니 유대인의 정체성에 성씨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죠.”

“알고 있소, 듣자하니 유대교를 믿는다면 전부 유대인이라던데.”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오갔다.

“제가 중장 치곤 많이 젊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부정하진 않겠소.”

“원래는 경찰이었습니다만, 이번 이스라엘군 창설 건에 관련해 전속 명령을 받았습니다. 기존에 있던 치안조직을 합친 뒤 기존 구성원들을 기간병력으로 해서 10만 명 규모의 병력을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쉽지는 않을 거요, 치안조직과 군인에게 요구되는 목적은 다른데.”

“하지만 그만큼 훈련받은 신뢰할 만한 인원이 적습니다. 오죽하면 소방대까지 흡수시켰겠습니까. 저만 해도 경찰서장도 아니고 일개 파출소장이었습니다. 수도에 있긴 했습니다만. 그나저나.....”

“정부에서 승인이 내려왔소,”

그 말과 함께 베르트랑이라 자칭한 남자는 나무 상자를 열었다.

포병용 포가 위에 얹어진 공랭식 기관총이 그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대포는 다 내렸고, 독일제 권총과 박격포는 지금 하역이 진행 중이오. 전부 우리에게서 구매하지 않은 건 좀 아쉽지만.”

물론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대포는 오스트리아에서, 권총은 프로이센에서, 기관총은 남독일 연방에서, 박격포는 프랑스에서.

그리고, 전혀 수출 허가가 날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물자도 있었다.

그에 걸맞는 엄청난 값을 치렀지만.

“재규어는 어디 있습니까?”

의화단 전쟁에서 맹활약하면서 첫선을 보인 프랑스의 최신예 전차.

본래 프랑스는 처음에는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고 해외에 수출, 막말로 짬처리하려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과 프랑스는 모두 그런 중요한 무기를 판매하기 껄끄러웠고, 오스트리아-헝가리나 남독일 연방에 파는 것이 고려되었다.

그러나 남독일 연방은 자국산 전차를 개발하겠다면서 거절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역시 제법 진지하게 구매를 고려했으나 결국 수량 논의로 넘어가기도 전에 자국산 개발로 선회, 도합 60대의 전차는 애물단지로 남겨졌다.

이에 프랑스 정부가 싹 용광로에 집어넣어서 신형 전차 만드는 재료로나 쓰라는 명령을 내리기 직전 이스라엘 정부가 소량이라도 전차를 팔아달라는 요청을 하면서 이들의 운명은 바뀌었다.

본래 이스라엘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정부는 1년전쟁을 치르고도 격파되지 않거나 벨기에나 독일에서 완파되지 않고 수리가 가능하다고 판정되어 회수되는 등의 방식으로 살아남아서 후속 차량이 나오자 창고에 쳐박힌 143대의 구형 샤를마뉴 전차와 54대의 경장갑 정찰차량, 60대의 재규어 전차를 전부 팔아치우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기술력으로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굴려먹기가 거의 불가능, 복제해서 생산하는 것 역시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프랑스 제국은 이들에 프리미엄을 잔뜩 붙여서 팔아먹는 계획을 세웠다. 무엇보다 영국에게 빅엿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과 기술유출을 우려하지 않아도 좋다는 점이 프리미엄이 붙었다.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제안에 프랑스가 화끈하게 답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예산을 급하게 전용하고 국방성금을 모아가면서 계약을 체결, 프랑스에 계약금을 지급했고, 프랑스 기술고문단이 딸린 200여 대에 달하는 전차와 50여 대의 경장갑차량을 주문, 이제 막 항구에 도착한 차였다.

“저 안에 있소, 일단 귀국 관리들이 육안으로 확인하고 인수증에 서명하면 끝나는 거요, 잔금은 어디 있소?”

“금괴로 준비해뒀습니다. 하역이 끝나자마자 드리겠습니다.”

“뭐, 알아서 하시오, 우리야 기술자들이니까.”

물론, 프랑스가 이걸 승인한 건, 이미 그들을 대체할 만한 준비가 끝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