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새로운 바람(3)
음악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운다.
귀빈들을 위해 준비된 무도회장은 굉장히 화려했다.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피던 샤를은 피식 웃었다.
“무리했구만, 없는 살림에.”
“무리했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이게 무리한 게 아니고 뭔가. 이건 그저 프로이센의 장대한 자존심 세우기, 정신승리의 결과물이네, 이번 엑스포를 무리해서 유치한 것도 그래서고.”
자리에 앉아 있던 황태자는 천천히 일어났다. 아버지에게 보고하는 편지를 급하게 쓴 탓에 팔이 저렸다. 물론 암호화에 쓴 연습장들은 싹 태워버려야 했다.
벽난로에 쳐넣어 태워버리지고 재까지 꼼꼼하게 흩어버리지 않은 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와, 그 내용을 해독하기 위한 제퍼슨 바퀴의 종류와 세팅 방식을 의미하는 일련번호뿐이었다. 그것도 전부 아버지에게 부쳐서 한창 파리로 달려가는 중이거나 이미 도착한 후일 테니까 베를린에 남아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의 돈으로 잘 먹고 잘 놀고 가라고 판을 깔아준 건데, 좀 장단 못 맞춰줄 거야 없지만.”
“물론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황태자 전하께서 저놈들에게 한 방 먹여주면 모두가 기뻐하겠죠.”
“뭘 어떻게 먹이라고?”
“방법이야 많지 않겠습니까? 통나무 같은 프로이센의 목석들만 보고 살던 프로이센의 귀족 영애들의 넋을 무도회 가운데에서 춤 솜씨와 외모만으로 모조리 빼놓으신다거나. 아니면 적당한 꽃을 꺾어가신다거나?”
“됐네, 무슨 결투하자는 것도 아니고.”
일부에서는 결투하는 관습을 우스꽝스럽게 여기기도 하며, 특히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유럽에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등에서는 아직도 결투하는 문화가 남아 있었다.
“우린 시비걸려고 온 게 아니네, 어디까지나 손님으로 온 거지.”
“뭐, 그렇군요.”
“물론 기회가 온다면 사양하지야 않을 생각이지만 괜히 사서 분쟁을 만들면 우리 평판에도 그리 좋지는 않을 걸세.”
그제서야 상대가 납득하는 표정을 짓는 걸 본 황태자는 한숨을 쉬면서 무도회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얼굴은 알고 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적어도 이번에는 빌헬름 2세의 뜻에 따라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별반 잃는 것도 없으니까.
“한 곡 추시겠습니까, 레이디?”
정중한 제안에, 소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샤를의 손을 잡았다.
“영광입니다.”
음악에 맞추어 천천히, 한 발 한 발 발을 딛어나간다.
“공주님.”
“.......네.”
“국왕 폐하의 지시를 받으셨습니까?”
“... 예, 왜 그래야 하는지도 들었어요.”
“..........”
공주의 얼굴을 본 샤를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공주님께서는..... 만약 국왕 폐하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진다면 저와 혼인하시게 될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즉답이 돌아왔다.
“아버지의 뜻이고, 이 나라를 위한 일이니까 따라야죠.”
“그럼..... 저와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는 것도 개의치 않으시는 겁니까?”
그리고 그 직후 샤를은 정신적으로 자기의 따귀를 날렸다.
‘내가 미쳤지.’
뭔 개소리를 한 거지?
잠깐 어떻게 수습할지 꼬여버린 머릿속 생각을 풀려고 애쓸 때, 답이 돌아왔다.
“....... 잘 모르겠어요.”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니가 미쳤구나. 엉? 아주 제정신이 아니지?’
샤를 황태자는 그 대화가 오간 직후부터 간신히 내색하지 않으며 진한 자괴감에 빠져야 했다. 빌어먹을, 아까 대사관에서 마시고 온 커피에 이상한 게 들어갔음이 틀림없다. 대사관의 주방까지 스파이가 침투하다니, 이는 심각한 문제다.
그 가시방석 위에서 춤추는 듯한 시간이 끝나자 파트너를 바꿀 시간이 되었다.
어떻게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독일의 공주를 보낸 황태자는 들키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미친놈이지, 망할.’
지금 당장 알코올이 아주 간절하게 땡겼고, 적당히 자리에 들어가 앉으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리고, 그녀의 푸른 눈도 정확히 그를 향했다.
분명히 무도회 전에 마신 커피에 분명 뭔가 잘못 들어간 게 분명했다.
***
파리, 프랑스.
“빌헬름 2세가....지금 제정신인가?”
나는 암호해독이 잘못된 건 아닌가 두 번 세 번 확인했지만, 내용이 바뀌지는 않았다.
프로이센-프랑스 동맹? 그래, 뭐 필요성이 있으면 그럴 수 있고, 프로이센이 탐지한 러시아-영국 동맹의 현실화 가능성은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거다.
두 국가 내의 뿌리깊은 원한.
프랑스는 프로이센군과 맞서다 황제가 살해당한 원한이 있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의해 독일 통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영토를 빼앗긴 데다 배상금을 물고 군비제한까지 당했다.
물론 우리는 그래도 낫다. 프로이센에서 영토와 배상금을 뜯어내고 전쟁에서 이기면서 반독 여론도 제법 약해졌으니까.
그런데 프로이센에서는 반불 여론이 현재진행형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중국과 비교는 스케일이 안 맞으니까 한 1970년대쯤에 한국이 일본과 전쟁이 터져서 일본을 쥐어팬 끝에 일본에서 배상금과 영토를 뜯어내어서 민족적 자긍심을 충족시켰다고 치자.
그런데 10년 뒤 1980년대 중국이 대만과 손잡고 일본과 한국을 고립시켜서 각개격파하려 한다고 하니 일본과 한국이 손을 잡아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치자.
한국인들은 그들이 생생히 기억하는 과거로 과거의 복수를 이미 완료한 탓에 반일감정이 있었어도 제법 해소되었을 터, 동맹에 반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우리가 속 시원하게 한 번 패준 상대를 다시 우리에게 반격한 것도 아닌데 뭐하러 계속 적대하느냐는 주장이 힘을 얻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그런데 일본인들도 그렇게 될까? 10년 전에 국토가 짓밟히고 배상금을 뜯긴 기억이 아주 생생한데? 거기에 세력구도를 보면 자기들이 기어들어가야 할 판이라면 더더욱 그럴 터.
그러니 이 제안이 세어나가면 위험한 건 내가 아니라 이 제안을 보낸 빌헬름 2세다. 당장 독일에서 혁명이 터질 테니까.
물론 그럼 나도 골치아픈 일이기는 하다. 그 뒤에 세워질 정권은 반프랑스 정권일 테니까.
“세상이 미쳐돌아가는군.”
유럽만 문제가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에서도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다.
독일은 모로코에서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려 하고 있고, 러시아군 극동군은 아시아 내 저항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네팔을 점령하고 있으며 영국도 다시 식민지 사냥에 나서서 태국에 대놓고 집적거리고 있다.
“북독일 연방이 우리에게 붙는다면 분명히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
나는 지도를 두드렸다.
독일이 우리에 붙는 게 가능하다면, 우리는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냥 유럽연합이라고 쳐도 되겠다.
물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쉽지는 않을 거다. 나치 독일도 그 정도 체급은 갖춘 뒤에 소련에게 덤볐으니까, 물론 국민적인 저항과 나치 독일 특유의 체제 때문에 엄청나게 비효율적이기는 했다만.
하지만 소련과 러시아 제국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국이 전쟁에 안 끼어들면 완전히 달라지지.’
무기대여법 같은 일만 안 벌어지면 모스크바까지 진격해서 러시아를 패배시킬 수는 없어도 러시아에서 혁명이 터지게 만들어 줄 수는 있을 거다.
모스크바까지 진격 못하는 이유? 당연히 공세종말점이 100% 올 테니까 그렇지,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의 병신짓을 나까지 반복해야 하냐.
그리고 전쟁이 터진다면......
“외무장관, 지금도 러시아에서 범슬라브주의자들이 제법 설친다고 들었네만.”
“사실입니다. 그 중 일부는 아직도 체코 병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죠.”
“일부가 아니라 상당수겠지.”
파탄에서 한 발자국 앞까지 간 삼국동맹은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 원인은 다름아닌 체코 문제였다. 러시아 내의 범슬라브주의자가 체코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체코 역시 슬라브인들의 거주지이며, 이에 따라서 체코는 마땅히 대 러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당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거품을 물었다.
“체코는 제국의 강역이며, 타국에 양도하거나 판매할 가능성 역시 없다. 이것이 정말 러시아 제국의 책임 있는 해명을 요구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있으나 마나였던 발칸과는 이야기 자체가 달랐다. 체코는 이중제국에게 있어서 공업의 핵심 중심지로, 농업 중심지인 헝가리, 금융 중심지이자 정치 중심지인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중제국의 국력을 책임지는 장소였다.
그에 따라 발칸 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파장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이중제국이 항의해 오자 이중제국과 전쟁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던 러시아도 다급하게 성명을 발표했다.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 주권을 존중하며, 국내에서 나온 일부 주장은 결코 러시아 제국 정부의 의지가 아니다.”
물론, 이는 군부의 불만을 야기했다. 범슬라브주의자들의 본진이 바로 군부였으니까.
하지만 당장 전쟁을 할 게 아닌 이상 참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거기에 프랑스, 이중제국, 프로이센 등이 줄줄이 이번 체코 논란에 직간접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내자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 전체와 싸울 수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범슬라브주의자들 스스로도 이번 폭주가 실책이었고, 조금씩 여론에 힘을 실어서 분위기를 만든 다음 기회를 잡았어야 했는데 너무 성급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일단 너무 영토를 많이 확장해서 가뜩이나 러시아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은데 무리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는데 동맹 관계가 예전같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그 틈을 파고든 거고, 사실 민족주의 문제만 아니었으면 현명한 선택이라고 해줄 만 했을 텐데.”
“국내 반발만 어떻게든 누른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 입장에서도 프로이센이 적국이 아니라 아군으로 싸우겠다고 나선다면 막을 이유는 별달리 없기도 하고요.”
“후, 하여튼 힘들어, 앞으로는 외교권도 국민의회에 넘겨버릴까 싶군.”
“자유주의자들이 좋아서 날뛰겠군요.”
“뭐 어떤가, 나중에는 그냥 영국 왕실처럼 보나파르트 가문도 조용히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도 나쁘지많은 않을 것 같기도 하네.”
“지금 밖에서 폐하 외의 다른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맞아죽을 겁니다.”
“알고 있네, 내 생전에는 무리겠지.”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편지를 벽난로에 던졌다.
“어쩌실 겁니까?”
“벌써 논하기는 이르지, 일단 지금은 그쪽도 인정했다시피 밑밥이나 까는 거잖아? 춤이나 좀 추고, 그쪽에서 구체적인 제안이 오는 단계가 되면 그때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