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새로운 바람(2)
샤를 황태자의 프로이센 방문 명목은 만국박람회 참관이었다.
만국박람회는 이미 여러 차례 열렸다. 안타깝게도 1889년의 만국박람회 당시 프랑스 제국은 보불전쟁에서 얻은 치욕을 씻어내기 위해 자국의 국력을 과시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그에 따라 에펠탑도 역사의 가능성 중 하나로만 남아 사라져버리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만국박람회는 계속 열렸다.
특히 이번 엑스포(=만국박람회)는 1년전쟁 패배 이후 절치부심한 프로이센이 연 엑스포였으므로 그 규모는 어마어마했고, 각국 주요 인사들이 초청되었다.
그걸 생각하면 당연히 엑스포 장소로 가야 했지만, 그가 있는 곳은 포츠담에 있는 상수시 궁전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께서는 검소함을 추구하셨다니, 그 말이 어울립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프로이센의 왕궁치고는 제법 작다. 그래서 베를린 궁전이 따로 있는 거겠지만.
샤를의 눈에는 아버지가 거주하는 튈르리궁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아버지의 예를 따라 개인 거주지로 받은 팔레 루아얄보다도 작아 보였고, 그게 사실이었다.
“베를린 궁전에 가면 공식적인 행사가 될 수밖에 없어서 황태자를 이곳에 초대할 수밖에 없었네.”
빌헬름 2세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저 역시 비공식적인 쪽이 더 좋습니다. 그럼 이제 말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폐하, 저를 굳이 여기까지 부르신 이유 말입니다.”
그러자, 빌헬름 2세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 폐하?”
“프로이센의 시작을 아는가?”
“프로이센 왕국의 시작....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제가 알기로는 튜튼 기사단국이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세속화된 것이 프로이센의 전신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랬지, 우리의 전신은 저 튜튼 기사단이었네.”
빌헬름 2세는 그렇게 말하고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짐은 적어도 누가 강한지, 누가 약한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네. 그리고 명백히, 지금 프로이센의 상태는 좋지 않네.”
“설령 지금 당장 독일 제국을 선포하신다고 해도 아무도 반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독일 연방이 멀쩡히 있는데 반쪽짜리 제국을 얻어서 뭐하는가, 그대의 부친도 그걸 감안해서 남독일 연방을 만들지 않았나. 독일을 통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 그 전에 프로이센은 프랑스 제국을 공격해 선황 폐하를 승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랬지, 그 전쟁은 결국 1년 전쟁의 불씨가 되었고, 자네 아버지의 지위를 프랑스 내에서 신성불가침의 위치까지 끌어올렸네. 이제 와서 이야기하네만, 차라리 그 스페인의 역도들이 조부께 왕관을 바치네 어쩌네 하면서 망발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게야.”
“그렇습니까.”
“우리는 튜튼 기사단의 후예들이네, 그리고 게르만 민족은 언제나 동방을 향해 나아갔지, 서방은 언제나 배후지였어, 자네들도 알지 않나?”
“동방식민운동을 말씀하시는군요.”
“....... 그리고, 프랑스와 우리는 카롤루스 대제의 시대에는 한 몸이었지.”
설마.
“...... 혹시, 1756년과 같은 일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1756년 5월 1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그간의 모든 원한을 접어두고 동맹을 체결했었다.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는 철천지원수였음에도 영국과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프랑스 제국과 프로이센에 이 사건을 적용시켜보지 못할 이유는 어디 있는가?
물론 비밀리에 만나자고 한 것도 이해는 된다.
만일 이게 새어나가면 프랑스든 프로이센이든 간에 최소한 폭동이니까.
“당장은 아니네.”
빌헬름 2세는 인상을 팍 썼다. 샤를 황태자는 뭔가 실수한 게 아닌가 싶어 흠칫했지만, 빌헬름 2세의 짜증은 샤를 황태자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라면 그 배신자 영국인들의 면전에다 현실을 들이밀어주고 싶지만, 영국 놈들이 러시아에 접근하는 와중에도 어리석은 민중들 가운데에는 프랑스를 싫어하면서도 정부의 명령도 순순히 듣지 않는 불충한 자들이 많네, 내각에서 모두가 말린 탓에 공개적인 동맹은 당장은 불가능하네.”
몸을 돌린 빌헬름 2세는 노골적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황태자, 그대는 아직 약혼하지 않은 것으로 아네, 틀린가?”
“아닙니다, 맞습니다만.....”
“격으로써는 열강의 황태자에 호엔촐레른의 적녀가 부족한가?”
“예..... 예?”
혼자 휙휙 넘어가버리는 발언에 샤를은 얼빠진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실패한 것 같았지만.
“그대보다 다섯 살이 어린 황녀가 있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이지만, 그 딸아이가 자네와 혼인하면 어떤가.”
“....... 빅토리아 황녀님을 말씀하십니까?”
“그렇네, 내 참모가 그리 조언하더군, 프랑스와 손을 잡고 싶으면, 두 국가의 국민들이 과거의 분쟁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거라고 말이네, 하지만 짐에게는 시간이 없어.”
빌헬름 2세는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대에게도 익숙하지 않은가? 내가 알기로 그대의 부친과 모친 역시 딱히 서로 사랑해서 혼인한 것이 아니라 바이에른 왕국을 정치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혼인이었을 텐데?”
“그건......”
“마음에 차는 여인이 있다면 정부로 둬도 상관없네, 대신 공공연하게가 아니라 비밀리에, 내 딸도 그 정도는 눈감아줄 테니. 다만 대외적으로는 서로 사랑해서 혼인한 것으로 해주게. 그래야 국민들이 납득할 테니.”
“아버님께 말씀드렸습니까?”
“아니, 자네가 전달해주게,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구두로. 아무래도 당사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게 훨씬 확실해서 말이지. 무엇보다 이 만국박람회장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가진 것으로 해야 하는데 자네 아버지에게 미리 이야기했다가는 정보가 모조리 새버릴 테지, 기자놈들이 혓바닥을 불경하게 놀리는 거야 막을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아는 자가 생길 거고, 영국과 러시아가 그 중 하나가 안 될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
“딸에게는 내가 직접 전달했으니 잘 맞춰줄 걸세, 자네 말고도 여러 나라 황족과 왕족을 초청했지만 내 딸은 자네 외에는 춤을 추지 말라고 미리 말까지 해두었으니 염려하지 말게나.”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만약 황제 폐하께서 제 보고를 들으시고 거절하시면 어쩌려고 벌써 이렇게 준비하셨습니까?”
“내가 공개적으로 혼인을 제안했나? 아니면 약혼이라도 했나? 자네 아버지가 거절하면 그저 청춘남녀가 함께 춤 한 번 춘 것으로 끝날 뿐이네, 그게 추문이라도 되나? 물론 말하기 좋아하는 작자들은 그런 것 가지고도 별별 이야기를 지어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지. 내가 틀린가?”
“.... 아닙니다, 폐하께서 옳으십니다.”
“무엇보다 자네 아버지가 거절할 리도 없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 얼간이 러시아 대신 프로이센과 동맹할 기회가 왔는데 잡지 않는다? 자네 아버지가 그 정도로 답답한 인간이었으면 1년전쟁은 어떻게 이겼겠는가?”
샤를은 할 말이 굉장히 많았지만, 괜히 빌헬름 2세를 자극하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했기에 침묵했다.
잠시 뒤, 샴페인 한 잔과 흑맥주 한 잔이 나왔다.
“나폴레옹 4세의 건강과 승리를 위해.”
샴페인 잔을 잡은 빌헬름 2세가 말하자, 샤를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흑맥주 잔을 잡고 답사했다.
“프로이센과 호엔촐레른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
“놀아나는 기분이군.”
숙소로 배정받은 방은 비워두고 프랑스 대사관으로 들어온 샤를 황태자는 짜증스럽게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예전에는 아버지는 이 쓴 것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물론 커피 취향은 다르지만.
나폴레옹 4세는 베일리스 커피를 즐겨 마시는 편이지만, 황태자는 카페오레, 특히 모카 마타리 종류의 원두로 만든 카페오레를 좋아한다.
물론 카페 비에누아는 두 사람 모두 은근히 마시는 편이었기에 마시던 거 못 마실 때 찾는 대용품은 통일되는 편이었다.
아무튼 간에 지금 황태자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카페 비에누아였다.
“딴에는 맞는말이지.”
주변인들 전부 급한 보고 없이는 들어오지 말라면서 내보내서 대사관 내의 특별실에 혼자 남은 황태자는 볼 사람도 없겠다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빌헬름 2세의 말 자체는 맞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지키기 어렵다. 괜히 살인멸구라는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보내서 사전에 협의라도 했어야 하지 않는가, 하다못해 봉인해놓은 편지 하나만 보내도 되었을 일이다.
그래놓고 춤 한 번 추면서 밑밥 좀 깔아달라고? 이게 진짜 동맹을 진지하게 맺을 의사가 있는 건지 도발하려고 부른 건지.
말이 틀린 건 아닌데 비밀을 지켜야 한다지만 그런 요청을 하는 방식이 글러먹었다. 지금 저쪽이 아쉬운 거 아니었나.
프로이센은 현재 명백히 프랑스에 비해서 그 위상이 못하다. 자칫하다가는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협공당할 것 같아서 다급하게 동맹을 찾는 상대의 태도인가?
‘아니면 나랑 자기 딸을 맺어주겠다는 것 자체가 빌헬름 2세의 생각이 아닐지도 모르고, 빌헬름 2세가 이것 자체에 별로 의욕이 없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
그러면 설명되는 게 몇 가지는 있다. 그리고 제국에서 실권을 가진 자들이라면.....
‘융커들이 요구한 건가?’
융커들 가운데 일부 세력이 이런 방식을 쓰라고 황제를 압박하고, 황제는 못마땅해 하면서도 어거지로 받아들였다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특히 사전에 조사된 빌헬름 2세의 성향상 국가를 위해 황실이 이렇게저렇게 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불경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받아들였지만 파워 게임에서 밀린 탓에 내키지 않는 제안을 해야 하는 처지로 몰린 건지도 모르고.
“에라, 모르겠다. 정보 자체가 부족한데 머리 굴려서 뭐하나.”
중얼거린 샤를은 결정권을 지닌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를 고민했다. 빌헬름 2세는 보안을 기하기 위해 그가 복귀했을 때 직접 나폴레옹 4세에게 보고할 것을 요청했지만, 그걸 반드시 들어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래도 대사관에 있는 통신시설은 사안의 중대성, 즉 대중과 타국만이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의 내부자, 심지어 고위 관료들 상당수에게까지도 일단 어떻게든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숨겨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신뢰하기 어려우니, 역시 가장 확실한 건 황태자 본인이 메신저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확실한 건 그가 아버지 외에는 편지를 뜯어보지 못하도록 봉인한 편지를 열차편으로 아버지에게 보내는 것이다. 일단 그가 엑스포 기간 동안은 여기 묶여 있어야 하니 그만큼 아버지에게 보고가 빨라지는 것이 장점이다. 단점이야 누가 중간에 편지를 뜯어볼지 모른다는 거고.
‘편지를 암호로 써야 하나.’
문제는 그와 아버지 둘만의 암호 같은 건 없다는 거다. 쓸 수 있는 암호체계는 많지만 그건 전부 프랑스 제국의 군용 암호체계다.
제국 내에서 군용으로 사용된다는 건 그 정체를 일정 수 이상의 사람이 안다는 것이다. 알아야 쓰니까.
그리고 프랑스 군부 내의 장성들에게도 상황에 따라 숨겨야 할 정보를 군이 해독할 수 있는 암호체계로 보내는 것 역시 딱히 좋은 생각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편지를 암호로 써서 보내든가 해야겠군, 아무리 촌각을 다투는 일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귀에 정보가 너무 늦게 들어가는 것도 좋지는 않아.’
물론 그와는 별개로 무도회는 참석해야 한다. 지금 당장 편지를 써도 아버지의 지시를 새로 받아오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모자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