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보나파르트-71화 (71/200)

71화 나비(5)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분위기는 차가웠다.

“프랑스 제국은 본국의 차관 제의를 결과적으로 거절했습니다. 명분은 자기들도 넉넉한 여유자금이 없을 뿐 아니라 증세는 국민의회에서 극구 반대해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만....”

“하, 독일과 영국에서 그렇게 막대한 배상금을 뜯어내고도 북경에서 두 번째로 많은 배상금을 챙겨간 자들이 돈이 없다고 말합니까?”

“그 예산을 해군 예산으로 돌렸다고 하는데, 누군 해군이 중요한 줄 모릅니까? 우리도 마음만 같아서는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청도 식민지로 삼고 해군으로 통제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우리 혼자 좋자고 놓는 철도냔 말입니다, 동맹을 해서 제대로 프로이센을 견제하려면 적어도 본국이 시도때도 없이 일어나는 반란을 통제할 능력은 갖추도록 도와줘야 할 것 아닙니까?”

프랑스인들이 저 기적의 논리를 들었으면 뒷목이 뻐근해지다 못해 졸도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막말로 배 터지게 영토 쳐먹은 건 본인들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 과확장에 딸려오는 백래시를 못 견디고 빌빌거리는 것도 본인들 아닌가? 못 먹겠으면 적당히 뱉든가, 그 와중에 체면에 손상이 간다고 반란이 터지는 땅을 기어이 틀어쥐고 있으면서 멀쩡한 동맹국에게 자국 내 사정 때문에 돈 빌려달라고 하면 선뜻 빌려주는 게 미친놈 아니겠는가?

“프로이센이 빌빌거리니 본국의 도움도 별로 절실하지 않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프랑스는 프로이센을 따위로 취급해줄 수 있는, 과거 나폴레옹 1세 시기의 성세를 거의 회복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아니, 영국을 쥐어패고 대영제국을 압도하는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미 능가한 거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그 상징적인 사건은 미국-스페인 전쟁에 한몫 끼어서 스페인의 섬 몇 개를 더 빼앗았고, 더 나아가 하와이 병합을 추진해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군력이 약했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다행히 타개책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알렉산드르 대사의 말로는 영국에서 차관을 좀 들여올 수 있을 모양입니다.”

“영국이?”

“그 자들, 돈은 있다던가?”

당장 전쟁의 혼란 속에서 여왕이 외국군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런던에 프랑스군이 밀어닥치자 퇴위한 전(前) 빅토리아 여왕만 해도 자기 패물들을 팔아서 국고에 보태고, 여러 귀족가와 명가, 기업들까지도 프랑스에 낼 배상금을 내고 국토를 재건하며 다시 해군을 재건하기 위해 가산을 털었다는 이야기는 러시아에서도 들려온다

물론 그것에 감명받아 파탄 직전인 국가 재정에 자기 재산을 기부한 귀족은 러시아에서는 거의 없었지만, 다르게 보자면 조소할 만도 했다.

그 대영제국이 어쩌다가 저렇게 추락해서 국고를 쥐어짜고 있는가? 물론 프랑스에게 내야 할 배상금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지만,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전체가 쑥밭이 되고 약탈당했으며, 영란은행 금고까지 약탈당한 데다 프랑스의 초인플레이션 공격을 당한 탓에 도저히 경제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민들조차 벽을 프랑스 군정 기간에 찍어낸 지폐로 도배할 지경이었으니.

이게 미숙한 국가경영이 아니라 작정하고 영국 경제를 영구히 파탄내려고 작정하고 찍어낸 돈이다 보니 대체 이놈의 돈이 얼마나 풀렸는지도 추측이 어려울 지경이라 화폐개혁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프랑스인들이 영국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파운드화를 마구잡이로 뿌렸으니 프랑스 정부조차도 총액을 파악 못하고 있다더라.

만약 프랑스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추가적으로 찍어낸 파운드화를 대량으로 숨겨뒀다가 화폐개혁을 시작하면 다시 이 돈을 시중에 풀어서 간신히 회복되던 영국 경제에 완전히 못질을 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영국 정부를 지배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금태환을 다시 실시하고 금본위제로 돌아가고 싶어도 프랑스가 배상금을 보통 금으로 받고 있는 탓에 대부분 거기에 빨려들어간다. 세계에 돌아다니는 금의 양은 한도가 있으니 영국이 이전처럼 중앙은행 지하에 금보유고를 넉넉하게 가지려면 금광을 여럿 더 찾아내야 할 터였다. 이전에 갖고 있던 금보유고는 런던이 무너질 때 바닥까지 싹싹 프랑스에게 약탈당했고.

시티 오브 런던이 복구되었다고는 해도 그 위상은 예전 같지 않고, 그 위상은 파리 금융가로 넘어갔다. 금융 중심지는 패권국의 수도 내지는 주요도시로 옮겨다닐 수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러시아에 대출을 해주고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투자한다? 논의가 의미없을 만큼의 소액이 아니라면 또 다시 어지간히 허리띠를 졸라맸을 거다. 그만큼 함대 복구도, 국토 복원도 늦어질 거고.

지금은 인도에서 봉기가 일어나기도 쉬워지고 진압하기는 더 어려워진 만큼 인도를 족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당연히 영국 관헌들이 인도에서 독립한 이스라엘에서 활동할 수는 없고, 그에 따라 불순세력들이 무기나 물자 등을 이스라엘을 통해 들여올 수 있으니까. 물론 이스라엘과 인도의 국경이 서가츠 산맥으로 나뉘었다지만 남부나 산맥이 끊어지는 지역에서 거래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인도에서 수익을 얻어도 예전보다 덜 쥐어짤 수밖에 없는 영국이 돈 벌 곳이라면.....

“뭐 아편이라도 홍콩을 통해서 청에 대량으로 팔아먹지 않았겠습니까?”

“아편을 팔든 여자를 팔든 상관없네, 그 돈이 결과적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놓는 데 도움이 된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본국의 복구도 힘들고 식민지들의 자치권 요구를 막아내기도 힘들어하는 영국이 본국에 굳이 투자 제안을 한 이유는 의문스럽군.”

세르게이 비테 장관이 그렇게 말하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비테는 죽은 알렉산드르 황태자가 총애하던 신하였고,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의 총신을 박대할 수 없었기에 그는 조만간 수상직을 맡게 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돈이 급한 건 사실이지만, 상대는 영국인들이네, 그 돈에 과연 어떤 의도가 담겼을지 몰라, 외무장관 각하께서 좀 알아봐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우리 측도 정보가 많지 않아서 말이오. 일단 알아는 보겠소만 영국 놈들을 상대로 내 부하들이 많은 정보를 빼낼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을 못 하겠군, 일단 최선을 다하겠다고만 해 두겠소.”

***

영국, 런던.

신사가 드나든다면 그 평판이 확 떨어질 만한 곳은 런던에 많다.

그런 장소들 중에는 사창가, 매음굴도 포함된다. 인근에는 아편굴까지 있었으니 양식 있고 분별 있는 신사들이라면 그곳에 돌아다니지 않으리라. 당연히 외국 스파이들도 국가 기밀을 손에 넣겠다고 이런 곳을 들쑤실 리는 없다. 사건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는 사립 탐정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이 방 안에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변복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편에, 진에, 럼 등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거기에 손을 댄 이는 없었다.

그 사람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많으면 비밀이 새나갈 가능성만 커진다.

누군가는 신사의 옷을, 심지어 기름때가 탄 노동자나 헤어진 부두 작업자의 옷을 입고 온 이도 있었다.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의문이구려.”

“내각의 결의가 외부로 유출되고 있다는 정황이 있소, 내각에 배신자가 있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 엿듣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그 배후도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경고를 받은 이상 신중해야 할 거요.”

“그래서 여기요? 방음은 될까 의문인데.”

“술 취한 작자들이 패싸움을 벌이면 엿들을 귀는 멀어버리지, 무엇보다 더 이상 우리는 수단 방법을 가릴 상황이 아니오.”

“그래도 이런 방식은 앞으로는 피합시다, 혹시라도 추문이 되면 곤란하오, 차라리 어디 별장에 몰래 모이는 게 낫지.”

“그건 대놓고 여기가 수상하다고 프랑스나 독일의 첩자에게 알려주는 거요, 물론 이곳은 좀 심하기는 하구려. 차라리 템스 강 위에 배를 띄우고 하는 게 낫지.”

“그건 그것대로 고역은 고역대로 치르고 제대로 된 회의가 안 될 것 같소만.”

“그럼 앞으로는 어디 비행선이라도 타고 회의해야겠구려, 확실히 첩자가 숨어들 수는 없을 테니.”

“이번 안건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의미로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의회와 내각, 국왕 폐하의 정식 승인이 있어야 하지만, 일단 이곳에 계신 분들 정도는 알아두셔야 기본적인 틀은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각과 의회가 승인하고, 폐하께서 재가하신 뒤 그들이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칠 수 있습니다.”

“...... 대체 그게 무슨 안건인지부터 말해줄 수 있겠소? 그래야 여길 빨리 나가든지 말든지 하겠군.”

이곳에서 숨쉬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단 듯 한 중년의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 턱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국왕 폐하와 총리 각하께서는 꽤 오랫동안 논의를 거치셔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과거의 대영제국의 영광은, 빅토리아 여왕 폐하께서 퇴위하신 순간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

지금 와서 신경질을 내 봐야 현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들 모두는 속이 꼬이는 것 같은 불편함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룰 브리타니아는 끝났습니다. 대영제국은 한동안 프랑스에게 눌려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 세인트급 전함(잔 다르크급)을 자력으로 건조하기 위한 핵심 기술을 확보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프랑스와 건함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영제국은 그 핵심 기술이 어떠한 종류인지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실정입니다.”

“프랑스가 작정하면 인도 식민지와의 연결은 바로 봉쇄, 현 상황에서 인도를 잃는다는 건 대영제국의 멸망을 의미하오,”

본토가 불타고 파괴된 지금, 영국 경제에서 인도가 차지하는 비율은 훌쩍 뛰어올랐다. 캐나다와 호주는 이제 간신히 자립이나 할 수준이고, 인도에는 흠집이 크게 났다 한들 그 덩치와 부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거기에 본토가 박살난 데다 막대한 배상금까지 물어야 할 판이니 그 배상금을 물어주고 본토의 복구까지 하려면 인도를 되는 대로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청도 빨아먹어야 했다. 인도 하나로는 모자랐다.

하지만 이마저도 파탄난 해군으로는 불가능했다. 최소한 프랑스와 러시아를 완전히 배제하기 전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끝났습니다. 우리는 패배했습니다. 본토를 수습하려면 20년은 족히 걸릴 것이며, 이 상황에 러시아가 부동항을 확보하는 것을 저지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유용한 동맹국이었던 프로이센이 이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 역시 가능해보이지 않습니다. 이탈리아는 멸망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깃발이 그 위에 꽃혔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이제라도 개구리 놈들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가자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두려워하는 존재가 하나라면 전 유럽을 모아 싸웠지만, 우리가 두려워하는 존재가 둘이라면 그 둘을 서로 맞붙게 만들어야겠죠.”

“...... 프랑스와 러시아를?”

“프랑스와 러시아가 직접적으로 맞붙으려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그렇다 쳐도 그 사이에 있는 북독일 연방부터 짓밟아야 합니다. 프랑스가 러시아와 부담없이 동맹을 맺은 이유가 그거 아닙니까? 사이가 파탄나도 어쨌든 러시아는 프랑스를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난 전쟁의 패배에서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은, 러시아 제국은 인도를 손에 넣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러시아군은 숫자만 많은 약체일 뿐이고, 지금 극동에서의 반란도 쉽게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전선이 너무 먼 극동이라는 것도 작용했겠지만, 프로이센에게 박살나서 수도를 잃을 뻔하고, 프랑스 덕에 이긴 뒤에도 반란군에게 쩔쩔매고, 해군력을 복원하기도 힘들어서 청 함대를 뺏어다 쓰는 모습을 보고 영국은 현재 프랑스와 러시아 구도가 세워질 경우, 불리한 쪽은 러시아라 판단했다.

더욱 그렇기에 러시아가 당장 급체해서 숨이 넘어가기 전에 응급조치를 취해 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러시아가 숨이 진짜 넘어가버리면 전성기보다 한참 못한 국력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은 프랑스를 상대로 어중이떠중이들을 선동해서 돌격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르니까.

“북독일 연방과의 동맹은 명문화된 것도 아니었고 그저 공동전선에 불과했지, 전쟁은 끝났고, 우리가 북독일 연방의 편의를 봐주어야 할 의무는 진작 소멸했소, 무엇보다.....”

러시아는 영독을 적대하며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유지한다는 선택지가 있지만,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적대하지 않는다? 프랑스 황제가 프로이센과 싸우다 죽었고 프로이센은 이번 한 번의 일격으로 막대한 사상자를 냈을 뿐 아니라 사실상 이류 열강으로 굴러떨어졌는데 그게 가능하겠는가? 두 국가의 국민들의 적대감이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대번에 혁명이 일어나리라. 프랑스에서 혁명이 또 터져서 내란으로 힘을 낭비한다면 이 역시 영국의 이득이었다.

결국 프랑스는 동맹을 하나 잃지만 그 반대급부가 없고, 러시아는 동맹 하나를 잃고 하나를 대신 얻으며 당장의 숨통은 틔울 수 있다. 영국은 약해진 임시동맹을 버리고 좀 골골대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 넘기면 더욱 강해질 동맹을 이용해 프랑스와 싸울 수 있다.

영국은 이득만, 러시아는 일장일단이 있는데, 프랑스는 손해만 보는 전략이었다.

“과거 나폴레옹의 시대처럼, 영-러 동맹을 추진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리고 장차전을 위해서라도 러시아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자금을 융통해줄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번에 여러분을 모신 것 역시 이를 위해서였습니다.”

동맹도 상대가 여력이 남은 상태에서 하는 거지, 지금 러시아가 소화불량으로 무너지면 그만한 코미디도 없다. 그리고 그 경우, 영국은 마땅한 동맹 하나 없이 상당히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하리라.

당연히 프랑스에도, 독일에도, 심지어 러시아인들에게도 알려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어쩔 수 없이 알게 된다고 해도 그 시기는 제국의 내각과 황제가 정할 것이다. 동맹의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늙은 사자는 이빨이 빠졌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발톱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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