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나비(4)
웬만한 일은 총리 선에서 처리되지만, 요즘은 어전 회의가 하루 걸러 하루 열리고 있다. 그나마 어전 회의가 그렇게 열리는 거지 내각 확대회의는 매일 열린다고 한다.
한다 라고 하는 이유는 일반 회의에는 내가 참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각 확대회의와 어전회의의 차이는 내가 있다는 것 외에도 육군참모총장, 해군참모총장, 정보국장이 참가한다, 내각 확대회의에도 이 셋이 불려나오는 경우가 제법 있지만 정식 위원은 아니라서 매번 부르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어전 회의가 잘 안 열리는 이유는 국내 사안과 국제적 사안, 군사적 사안 등이 밀접하게 접하는 경우에만 열리기 때문이다. 국내 사안은 총리가 알아서 하고, 어지간한 외교나 군사적 사안은 내 쪽에서 처리한다. 이를 위해 의회 의결이 필요한 경우도 내가 총리에게 전달해서 알아서 처리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러시아 제국에서 차관을 요구해 왔습니다만, 그 규모가 유래가 없습니다.”
“대체 그걸 어디다 쓰겠다는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자금이 많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나라면 군에 내 친위세력을 집어넣은 뒤, 아니면 아예 내게 충성할 수밖에 없는 놈들로 친위대를 하나 만들어놓은 뒤 귀족들이 뒤통수를 치게 유도하거나, 아예 반역 사건을 조작한 뒤 귀족들의 재산을 싸그리 몰수하고 권한도 박탈해버린 뒤 그걸로 자금을 충당하고 개혁할 거다, 마침 세르게이 비테라고 괜찮은 재상감도 있겠다.
물론 친위대를 맡길 능력 좋고 믿을 만한 놈이 있어야 하는데..... 보통은 성공하면 사위로 삼아주겠다거나 하는 조건을 걸고 쓸만한 놈을 골라서 쓰겠지, 니콜라이 2세는 원래 4녀1남을 두었지만 여기서는 1남 1녀뿐이다. 원래는 외아들이 막내였는데 여기서는 아들이 먼저고 딸이 나중이기도 하고, 그나마 딱 하나 있는 딸인 아나스타샤가 샤를의 6세 연하인 만큼 아직 좀 많이 어린 탓에 그런 쪽으로는 써먹기 어려울 터.
근데 나이가 찼어도 니콜라이 2세가 그럴 인간은 아니지? 나름 정도 많고 모질지 못한 인간으로 알고 있다. 원 역사에서도 러시아 혁명 직전까지 빈민을 구제하느라 황실 자금을 다 쏟아부은 탓에 황녀들이 바느질을 해서 생계에 보탤 정도로 황실이 빈궁해졌다던데.
그렇게 착한데, 착하기만 한 인간, 차라리 어디 영국 왕이나 하다못해 어디 우크라이나의 사람 좋은 농부 니콜라이 씨로 살았으면 훨씬 행복했을 인간이 그런 결단을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돈을 빌리겠다는 생각을 하지. 나라면 세금 제도 개혁부터 하겠다만. 무슨 중세도 아니고 저 동네는 아주 현실로 튀어나온 판타지 세계관이야 진짜.
“재무장관.”
“예, 황제 폐하.”
“국고에 여유는 있나?”
“있긴 있습니다. 영국에서 받아낸 배상금, 프로이센이 지불할 배상금, 청에서 받아낼 배상금 등등 채권과 현금, 현물, 금 등이 국고에 있긴 합니다만, 함부로 반출하기 곤란합니다.”
하긴 그렇지, 건함경쟁에 적극 뛰어들어야 할 판이라 증세를 고려해야 할 마당에 지금 금고에 돈이 있다고 펑펑 쓸 수는 없다.
게다가 원 역사에서 그 돈.... 결국 다 못 갚지 않았나? 소련이 튀어나오고 러시아 제국이 공중분해되면서.
어디 러시아 제국에도 회귀자가 있어서 하드캐리한다는 보장이라도 안 나오는 한은 어렵다.
무엇보다 지금 빌려준 돈이 순수하게 시베리아 횡단철도에만 들어갈 것 같지도 않고, 횡령 같은 것만 문제가 아니라 지금 각지에 주둔한 러시아군의 군비도 만만찮게 들어가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단칼에 거절할 수는 없지.”
“물론입니다.”
“외교적으로 시간을 끌어보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거절하거나 액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 보고.”
소액이라면 빌려줄 생각도 있다. 받아낼 수 있다는 전제 하지만, 사실 못 받아내도 적당한 이권 정도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원 역사보다 일찍 일어나는 것만 아니라면 충분히 뽕을 뽑을 정도의 이권? 역시 광산이나 유전이 제일 유력한데.
“무엇보다 국민의회의 의원들이 이 안건에 동의하지는 않겠지?”
“사전작업을 한다면 모를까,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국민들도요,”
러시아인들은 도움되지 않는 동맹이다. 프랑스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그래도 초반을 넘긴 뒤 프랑스가 한 번 고착된 전선을 붕괴시켜주니 나머지 이탈리아 전선은 혼자 마무리지었고, 네덜란드는 제때 벨기에의 뒤통수를 후려쳐 벨기에 포켓의 북독일 연방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안 보이는 데서는 식민지 영국군을 잘 견제해 주었고.
근데 러시아 놈들은? 동프로이센 공격하라고 지랄할 때는 안 하고, 쳐발리기나 하고, 그러면서 땅 욕심은 제정신인가 의심받을 만큼 많고...... 그놈들이 원래 병신이기는 해도 생각해보니 나도 열이 받는데 국민들은 어떻겠는가?
“그 러시아인들에게 1수도 빌려주지 말자고 할 사람들이 널렸지, 게다가 한때 폴란드 독립운동을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지원한 게 우리 아니었나?”
국가적 기준으로는 그리 얼마 되지 않은 과거, 민간에 폴란드 동정론이 퍼졌을 때의 이야기다. 덕분에 좀 좋았던 당시 러시아와 프랑스 관계는 파탄났고, 내가 알렉산드르 2세와 다시 손잡을 때 고생해야 했지.
그 나비효과로 알렉산드르 2세를 노린 폭탄 테러에 알렉산드르 2세가 아니라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사하고 알렉산드르 3세는 황제가 되어보지도 못하고 차를 타고 가다가 오스만 청년에게 총 맞아서 암살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리고 그 대가로 오스만 사람들이 대량학살당하고 나라 자체가 사라졌으니 자업자득이라기는 치른 대가가 제법 크긴 하다. 세르비아 같았으면 그놈들은 나라 자체가 미친놈들이었고 정부부터 국민까지 싸그리 글러먹은 놈들이라고밖에는 못 평가하겠지만.....
상식적으로 100% 본인들이 잘못한 일에 말장난을 하면서 언플을 하는 건 비교도 할 수 없는 대국과 전쟁으로 끌려들어간다는 점에서 국익에 도움도 안 되고, 거기에 도의적으로도 도저히 상종 못 할 놈들이다. 여기서야 제대로 세워지기도 전에 알렉산드르 2세에게 괴뢰화되었다가 합병되었지만, 내 생각에는 발칸은 그냥 러시아에 흡수되어서 독립의 독 자도 못 꺼내고 사는 게 나을 것 같긴 하다. 괜히 화약고 터트리느니 러시아가 혼자 쳐먹고 혼자 배탈나게 하는 게 낫지 터져버리면 그게 무슨 광역 민폐냐.
‘세르비아든 뭐든 발칸에 나라 세워지는 건 도저히 지원은 못해주겠다. 방해를 하면 하지.’
러시아가 최소한 다른 데는 토해내도 발칸은 통째로 꼭꼭 씹어삼키고 소화해서 화약고고 나발이고 터질 여지도 안 남겨주기를 바랄 수밖에.
애초에 그 미친놈들이 기껏 독립시켜놔도 자기들 권력에 방해된다고 샤를 녀석한테 총질 안 한다고 누가 장담하냐? 당장 페르디난트 황태자도 대 발칸 유화파였는데 황태자가 즉위하면 자기들의 명분이 약해진다고 암살한 게 세르비아 놈들이다. 21세기에 탈레반이나 알 카에다, 다에시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있으면 20세기에는 세르비아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축국은 중국 같은 놈들이랑 비교해야지.
“폴란드 문제는 러시아와의 협약에서 프랑스 정부가 앞으로는 막기로 약속했으니 동맹 조약이 파기되지 않는 한 거론할 수 없습니다. 국내에서 그런 여론이 퍼진다고 해도 동맹 조약을 러시아가 준수하는 한 막아야 하고요, 지난 전쟁에서 러시아가 보인 추태는 분명 동맹의 실효성을 의문할 만한 사안이지만, 그것이 동맹 조약을 러시아가 어겼다고 하기에는 미묘합니다.”
러시아는 공격작전이라고는 전혀 수행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선전포고를 했고, 러시아군이 한 건 아니지만 동장군으로 인해 마지막 정예부대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눈앞에 두고 전멸 상태에 빠지면서 독일의 항복이 결정지어졌다.
결론을 내리자면 동맹은 상호호혜적인 것인지라 동맹국의 국익보다 자국의 국익을 중시하는 건 당연한 것, 그러나 러시아는 그래도 유럽에서 통용되는 상례적인 그 수준을 넘었다,
하지만 전쟁 내내 러시아가 공헌한 게 전혀 없다기에도 뭐하다. 동맹은 뒷전에 제 욕심만 차렸다는 평가를 피할 수는 없어도 러시아가 동맹 조약을 어겼다는 비판을 할 수는 없다.
한 마디로 새로 동맹을 맺자면 마이너스 요소가 생겼지만 있는 동맹을 끊을 정도는 아니다, 대충 이 정도로 봐야겠지.
“하지만 러시아가 명분을 주면 동맹을 끊을 수도 있겠지, 물론 그렇게 될 경우 상당히 연합이 불안정해지겠지만.”
삼국동맹의 주요 국가를 따져 보자면 프랑스와 이중제국, 러시아다. 그 외에도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한 남독일 연방도 있고 네덜란드, 아일랜드나 우리 괴뢰국인 라인 공국 등도 있지만 일단 그만한 국력을 지닌 국가가 셋밖에 없다.
남독일 연방이나 라인 공국 같은 경우 성장 가능성이 제법 있는 동네기는 한데 그래도 둘 다 인구 문제도 있고 해서 그렇게 잘나가는 동네까지는 아니고.
“계륵이군.”
있으면 도움 안 되는데 끊어져도 대체할 만한 국가가 없다. 내가 영국 총리만 되었어도 러시아보다 독일 쪽과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고려해봤겠는데 프랑스가 독일이랑? 니콜라이 2세는 하는 거 보니 글렀고 알렉세이 황태자가 초인이라서 니콜라이 2세를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버리고 대대적인 개혁을 하고 지금 쳐먹은 영토를 어떻게든 소화시키고 러시아를 소련 수준의 국력으로 키워버리고 그 과정에서 전 유럽에 어그로를 끌어버리면 모르겠다.
근데 지금 먹은 영토를 소화할 수나 있나? 알렉세이 황태자가 어디 유색인종 혼혈쯤 되거나 어디 현지인 아내를 맞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둘 다 말이 안 되니......
“독일, 혹은 영국이 대놓고 숙이고 들어오거나, 아니면 이들과 비슷한 수준을 가진 강국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파탄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수준의 차관 제공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무슨 프랑스가 아니라 어디 남북미 대륙을 통일한 전제군주국이라면 모르겠다, 미국이면 그 정도 재원을 무리 없이 마련할 수 있겠지만 국민들이 그 정권을 엎어버릴 테니 역시 선택불가. 민간의 투자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미국 같은 자본가의 천국도 아니고 러시아 같은 전제군주국, 다른 놈들 다 빅토리아 시대를 사는데 혼자서 십자군 원정 가는 동네는 그다지 매력적인 투자처는 아닐 거다.
즉 러시아가 원하는 만큼의 차관 지불은 불가능하다, 솔직히 해주고 싶지도 않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분명 기분 나빠하겠지. 물론 외교에서 모든 걸 얻을 순 없지만, 러시아도 이제 와서 우리랑 손 끊는 것도 어려울 테니 별 일 없겠지.